매주 수요일 12시,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 할머니들이 시위를 벌인다. 지난 11월 23일 수능 시험이 있던 날도 어김없이 종군 위안부였던 할머니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일본 정부에게 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제국 군대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가 노예로 살았던 한국 여성들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요시위를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다하더라도 특정 사람들의 일로 치부하고 그냥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식민지 백성의 아픈 역사로 인해 남의 나라 대사관 앞에서 시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위안부할머니들이 연로한 탓에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군 '위안부'란 일제 식민지시기에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강제로, 반복적으로 성폭행당한 여성들을 일컫는다. 약 20만 명의 한국 여성이 '공출(供出)'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의 관리·감독은 일본군이 직접 담당하였으며, 패전 후에는 전선에 그대로 방치한 상태였다. 그러나 귀국한 대다수도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군위안부 문제가 청산해야 할 민족수난기의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것은 1980년대 후반에 와서다. 이어 1993년 3월 정부 차원에서 구호와 일본 정부의 철저한 진상 규명과 해명을 요구하였으나,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일본 측이 한일 간의 식민지 지배 배상 요구는 1965년 박정희 집권 당시인 제 3 공화국에서 이른바 김종필-오히라(大平正芳) 각서와 한일기본조약으로 일단락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뒤틀린 역사를 넘어 '여성'을 발견하다
사실 이 문제가 가시적으로 더욱 표면화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가 한 몫을 하고 있다. 수치와 침묵의 세월을 딛고 일어나 나이가 지긋한 여성들이 자기 굴욕의 기억을 한 토막 베어내 세상에 내보이는 이 영화는 피사체와의 관계가 중시되는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위안부할머니를 향한 감독의 낮은 자세가 낳은 결과물이다. <낮은 목소리>가 다큐멘터리 사상 최초로 극장 개봉하고, <낮은 목소리 2>가 일본 121개 극장에서 개봉해 11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는 호사스런 기록들은 치열한 창작정신이 배태한 결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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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 포스터 |
변영주 감독은 제주도의 기생관광에 관한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3)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위안부였던 매춘여성을 만나게 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백피트회원’의 '주머니돈'을 모아 일본군‘위안부’에 관한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5)을 만든다. ‘나눔의 집’에 모여 사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현재와, 이들의 증언을 통해 처참한 과거의 역사를 복원시킨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관심은 그를 다시 <낮은 목소리2>(1997)로 이끌었다. "이사를 했으니 영화를 찍어야 한다"라는 할머니들의 전화를 받고 다시 나눔의 집으로 달려간 감독은 스스로를 연출하고 싶어 하는 할머니들을 향해 다시 삼각대를 편다. 따라서 감독의 애정이 가장 눈에 띄는 건 2편이었다. <낮은 목소리>의 제작과정을 "종군위안부 할머니들과 연애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2편은 그들의 연애가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있다.
이제 감독에게 더 이상 객관적인 관찰자의 위치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는 할머니들과 둥그렇게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노랫가락에 박자를 맞춘다. 2편을 가장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건 그래서일 거다. '나눔의 집'에서 함께 살아가는 할머니들은 채소를 심고 닭을 치며 그림을 그린다. 세상의 여느 할머니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할머니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될 기억, 역사의 흔적이 있다.
전편이 할머니들의 고통과 역사적 의미의 형상화에 공을 들였다면, 후편은 이처럼 할머니들의 일상과 그 일상에 스며있는 슬픔을 보여준다. <낮은 목소리 2>는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들의 개인사를 기술하기 위해 카메라를 불러들인 다큐멘터리였다. <낮은 목소리>의 참된 가치는 종군위안부 문제라는 거대 담론을 제기하고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으려 했다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여성성을 잃어버리고 정체성이 찢겨졌던 여성들이 카메라를 빌려 상처를 어루만졌다는 데 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2>는 이러한 가치가 정점에 이른 작업이다.
말하기, 그것이 갖는 치유의 힘
7년 작업의 매듭으로써 1, 2편이 고통의 기원을 거쳐 위안부할머니들의 ‘현실’이 드러났다면, 낮은 목소리의 3편이라 할 수 있는 <숨결>은 다시 그들의 일상을 빌려 ‘과거’로 들어간다. 할머니들의 현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과거의 끔찍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은 위안소 시절에 관한 인터뷰를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일방적인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것은 어쩌면 서로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1, 2편은 언제나 그때의 경험에서 한걸음 물러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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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 2> 포스터 |
<숨결>은 어떻게 안이한 동정이나 공감이 아니라 대화로서 과거이야기를 화면에 담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의 결과로 위안부할머니가 위안부할머니를 인터뷰를 하는 장치를 들고 나온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 즉 이용수 할머니가 인터뷰어로 어린 시절부터 위안소 시절까지를 다른 할머니들에게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하는 전반부와, 현재 할머니들의 심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감독과 김윤심 할머니로 나누는 구성방식을 선택했다.
또한 <숨결>의 후반부에 이르러 <낮은 목소리> 연작은 할머니들의 일상에서 최고의 장면을 길어올린다. 위안소에서 성병에 걸려 청각장애자인 딸을 낳은 김윤수 할머니는 철썩같이 딸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믿는다. 하지만 변영주 감독과 할머니와 딸, 세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딸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을, 다만 어머니를 위해 숨기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제작진도 예상치 못했던 기막힌 삶의 순간에 카메라는 갑자기 할머니의 얼굴을 클로즈업해 들어간다. 제작진조차 놀라고 흥분했음이 화면에서 엿보인다. 오래 기다린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삶의 명장면이다.
<숨결>은 내레이션이나 음악 등의 장치를 지워내고 할머니들 스스로 그들의 이야기를 하게 함으로써 가혹한 역사 속에 뭉개진 그들의 목소리를 나지막히 되살려냈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이 영화의 본질이 종군 위안부의 배상문제가 아니라 위안부였던 여성들이 스스로의 활동을 통해 획득해가는 내적변화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랫동안 등 굽힌 채 자기 안에만 가둬둠으로써 화석처럼 경직되었던 '슬픔'이란 명사를, 그들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슬퍼한다'는 동사로 바꿔나간다. 자신을 짓누르며 혼자 힘들기만 하였던 고통의 덩어리를 증언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트라우마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자연스러운 치유를 경험하는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그 속에서 잊혀진, 아니 잊기를 강요당했던 역사가 제 얼굴을 내민다. 이로써 할머니들은 스스로 그들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그것이 역사의 복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해도, 짓밟힌 채 질 뻔했던 들꽃들이 이름을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자신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