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영화

<파업전야> 생생기(2004.8.24)

참된 2009. 2. 22. 02:00
<파업전야> 생생기
 
영화 <파업전야> 중
▲ 영화 <파업전야> 중

이용배 _ 계원조형예술대학 애니메이션학과 교수 yblee@kaywon.ac.kr    컬처뉴스  2004-08-24 오전 11:45:19

 

 


1990년 4월 7일 오후 4시, 민예총 사무실
전화기를 바꿔 든 내 귀로 낮지만 떨리는 목소리(이 은)가 들려온다.


“형, 지금… 놈들이 쳐들어와서… 다 가져가… 영사기랑… (필름)릴까지…”

 

같은 시각, 혜화동 ‘예술극장 한마당’


드디어 경찰 병력이 밀고 들어와 상영 중이던 <파업전야>에 대한 압수수색을 집행하는 순간이다. <파업전야>(16mm 장편 극영화, 105분, 영화제작소 장산곶매 제작, 1990년) 상영 이틀째이다. 5분경 입구가 술렁이더니, 몇 마디 고성으로 상영장의 긴장된 어둠이 깨진다. 환한 조명 빛 속에서도 털털거리며 돌아가던 영사기마저 사복들에 의해 멈춰 선다. 실루엣 사이로 인계되고 있는 우리의 필름, 필름들. 시나리오를 담당했던 ‘장산곶매’ 회원 한 명은 한쪽 구석에서 벽에 머리를 박으며 ‘꺼이꺼이’ 통곡하고 만다. 예고된 탄압에도 자리를 지킨 그날의 영화 관객들은 나머지 회원들과 함께 비장한 표정으로 서로 어깨를 건다. <철의 노동자>(<파업전야> 주제가)를 외쳐 부른다.  

 

같은 시각, 다시 민예총 사무실


(이미 “일부 운동권이 노동자 파업을 부추기는 영화로 사회 불안을 조성”하는 불온영화사(?) ‘장산곶매’ 대표로 수배령이 떨어진) 나는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전화를 내려놓고 농성이 시작될 것임을 사무총장님(김용태)에게 알린다. 얼마 후 다행히 연행자 없이 현장에 있었던 장산곶매 회원들과 다른 영화패 동지들이 속속 민예총에 집결한다. 그날로 ‘<파업전야> 탄압분쇄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이하 공투위)가 결성되고, 영화운동사에서 일찍이 없었던 조직적 대응들이 신속하게 펼쳐진다. 민예총 민족영화위원회, 인천민중운동협의회, 수원문화운동협의회, 충남문화운동협의회, 충북문화운동연합, 춘천사회문화연구회, 대구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영상분과 ‘새날’, 진주영상패 ‘남녘나리’, 부산민주청년회, 전북민중문예운동연합, 광주민중문화운동협의회 영상매체연구소 등 11개 지역문화예술단체와 한국독립영화협의회, 서울영상집단, 노동자문예운동연합 영화분과 ‘11월 13일’, 영성영화집단 ‘바리터’, 대학영화연합, 한국조감독협의회 등 모두 18단체가 연대하여 전국적인 <파업전야> 상영투쟁이 전개된 것이다.

 

1990년 4월 8, 9일(?), 연세대 캠퍼스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상영투쟁과 “내용이 파업을 선동하고 있으며, 노동쟁의 조정법상 제 3자 개입금지에 해당된다”며 이를 저지하려는 공권력의 공방이 치열해진다. ‘공투위’차원의 전국 상영 첫날. 연세대 100주년 대강당이다. 당국의 엄포와 봉쇄에도 불구하고 <파업전야>를 보려는, 아니 지켜내려는 관객들의 줄은 정문에서 대강당까지 이어진다. 그 줄이 길어진 또 하나의 이유는 험악(?)한 ‘사수대’들의 검문 아닌 검문 때문이다. 대학영화연합이 중심이 되어 짜였던 학생 사수대들은 입장 관객들의 학생증 등을 일일이 검사해서 입장시킨다. 관객들마저 이런 불편은 지금 상황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절차라 여긴다. 강당 안 역시 우리의 전재산이기도 한 16mm 영사기와 필름이 있는 공간을 빙 둘러서 마스크 쓰고 쇠파이프 든 학생들이 지킨다. 비장감마저 흐르는 열기가 가득하다. 상영 도중에 경찰들이 학교 안으로 진입을 해 극장 안에 불이 켜진다. 상영 책임자들이 황급히 학생 사수대들의 보호를 받으며 영사기와 필름을 챙겨 연세대 뒷산으로 빠져나간다. 관객들은 길을 터주며 목청껏 운동가요를 불러 그들을 지원한다.

 

같은 날 밤, 민예총 사무실


‘공투위’ 농성장에는 밤마다 상영팀들의 무사 귀환을 위한 전술들이 개발되고 땀내 난 회원들이 돌아와 탈주의 무용담이 펼쳐진다(그런 가운데 강경한 시위진압에나 쓰일 법한 당국의 대응으로 상영투쟁에 따른 피해도 많아진다는 소식들이 속속 들어온다).

 

1990년 4월 13일 오후 5시 40분, 광주 전남대 캠퍼스


다연발 페퍼포그가 쏟아낸 최루가스 구름을 헤집고 천 여명의 전경(경찰 추산 1, 300여 명)이 쏟아져 들어온다. 순간 하늘에서는 요란한 소리의 헬기 한 대가 해산할 것을 알리며 선회한다. 직격 최루탄은 결국 사수대를 맡던 한 학생(유석)의 턱 뼈를 가격하고 만다.

 

같은 무렵, 전국에서 발생하는 사건들 몽타주


<파업전야>가 상영되었던 전국에 걸쳐 비민주적이고 반문화적인 탄압과 상영봉쇄조치들이 마구잡이로 진행된다. 관람 중이던 시민을 불법으로 연행(인천, 수원, 춘천 등), 구금(광주, 인천, 서울 등)한다. 필름과 영사기가 무단으로 압수(서울, 수원, 광주 등)된다. 상영이 진행된 공연장의 허가가 취소(서울, 청주 등)된다. 영화를 관람한 이유만으로 노동자가 해고(인천 등)된다. 한 편의 16mm 독립영화에 대한 통제와 규제치고는 영화사적으로도 유례가 없었던 전면적인 폭거들…

 

같은 무렵, 상영장과 농성장


상영장마다 영화를 지키는 데 사용하라는 관객들의 지원성금이 모아진다.
한 모금함을 털자, 동전들, 지폐들 사이로 금반지 하나! 순간 농성장엔 환호성이 터지고…
‘공투위’의 상영투쟁을 넘어 공고한 민중연대로 확장되는 모습들이 이어진다.

 

1990년 4월말, 몽타주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지도부가 공개 발표를 시작한다. “무엇보다 노동자가 주인공… <파업전야>에 전폭적인 지지를… 노동절 101주년 기념영화로 지정합니다.”


전국의 여러 민주노조 사업장들, 이제 대학가에서의 안전한(?) 상영을 넘어 조직적으로 공공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파업전야>를 상영하고 토론한다.


KBS 본사. 때마침 방송민주화 투쟁이 진행 중인 그 곳에도 경찰의 바리케이트를 뚫고 들어가 <파업전야>가 상영된다. KBS 사원들, 주제가를 함께 따라하며 열광한다.


민변(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실. 변호사들의 요청으로 벽에 작은 사이즈의 스크린을 만들고 같은 영화가 상영된다. 영화가 끝난 후 상기된 한 변호사(김형태), 재판이 벌어질 경우 적극적인 변론을 맞겠다고 나선다.


김포 국제공항. 미국 길에 오른 한 소설가(윤정모)가 <파업전야> 비디오를 치마 속에 숨겨 세관을 통과한다. 후일 한 대포집에서 해외 동포와 함께 돌려보았다고 말하는 같은 소설가의 미소 띤 환한 얼굴이 겹쳐진다.

 

과거(1989년 1월), 중앙대 캠퍼스


영화제작소 ‘장산곶매’는 1988년도에 처음 만들어진다. 여러 대학에 흩어져서 단편영화 작업을 하던 친구들이 함께 모여 공동창작으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뜻으로. 그때 모두에게 가장 관심이 있던 주제는 광주를 담는 것. 드디어 <오! 꿈의 나라>(16mm, 90분)가 만들어진다. ‘장산곶매’는 광주를 형상화한 이 첫 16mm 장편 독립영화로 최초의 시련을 겪는다. 이 영화의 대중적 공개를 막고 있는 (당시)영화법이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검찰은 필름을 압수, 수색하고자 영장을 청구했으나 기각된다. 검찰은 대표(홍기선)를 불구속 기소한다. 검찰 쪽의 한바탕 소동과 이어진 재판을 통해 영화법 위헌 조항(8mm, 16mm 필름으로 만든 소형영화에 대한 영화법 적용 시비)이 드러나고 헌법소원이 신청되는 등 <오! 꿈의 나라>는 유명세를 치르며 전국 대학가에서 상영된다. 물론 이 경험이 1년여 후 <파업전야>의 상영을 준비하면서 ‘장산곶매’가 당국의 예상되는 제재에 대처하는데 도움이 될 줄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과거(1989년 12월), 부평의 촬영현장


부평공단에 있는 한독금속이다. 사측의 일방적인 휴업으로 노조가 위장폐업 철폐투쟁을 하는 중인데 노조와 연락이 닿아 촬영 장비를 싸들고 온 것이다. 이번에 찍지 않으면 얼마나 더 기다릴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오! 꿈의 나라> 이후 지난 수개월에 걸친 현장취재들이 눈앞을 스친다. 이미 세창물산의 깡순이들, 남일금속 등 경인지역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취재하며 다큐멘터리(<87에서 89로 전진하는 노동자>, 16mm, 42분)까지 제작을 마친 상태. ‘장산곶매’ 전체 구성원의 집단토론과 줄거리 구성에 이미 9개월이 넘는 시간을 흘려보낸 터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집단 합숙하며 농성투쟁 중이던 노조원들은 우리를 반긴다. 그러나 막상 이 현장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충무로 단역배우, 진보적 연극운동패, 대학연극반원들로 구성된 연기자들의 의상과 분장을 만지는 일이 고작. 한전에서는 전기를 끊어 놓은 상태였고, 프레스 기계는 싸늘하게 멈춰 있은 지 오래다. 자정을 넘기면서도 촬영에 별 진척은 없다. “우덜끼리 함 해보지 뭐” 발빠르게 노조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 이래서 노동의 새벽 아래서는 모두가 동지인가 보다. 촬영용 봉고를 타고 나가 청계천에서 구입한 전신주용 퓨즈가 연결되자 공장 안에 온기가 차 온다. 노동자 한 분이 오랜만이다 싶은 지 팔 걷어 부치고 프레스 레버를 움켜쥔다. 불에 달군 쇠봉이 프레스 아래 놓이고 쾅쾅. 시뻘건 스페너의 외관이 점차 뚜렷해진다. 몇 번의 쑥스러운 시범, 그 성스러움이 그대로 필름에 담긴다. 

궁끼 흐르던 식당도 가마솥에 김이 오른다. 밥판엔 국 한 가지지만 제법 먹거리 내음을 날린다. ‘장산곶매’ 회원 중 하나(정성진)는 완전히 프로 주방장이다. 음식점용 쇼팅(덕용 마아가린)을 깡통 채 사와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누가 이걸 다 먹어?’ ‘비싼 거 아냐? 등등) 합숙촬영 기간 내내 왕성한 식욕들과 꼭 맞춤하여 깔끔하게 비워낸다. 일인다역의 엑스트라 역을 마다않던 한독금속의 노동자들도 주방장만 보면 엄지손가락을 높이 세운다. 주간지의 환상이 사라진 (독립)영화의 촬영현장을 체험한 그들도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또 다른 노동의 현실을 이해하고 따듯한 어깨를 내준다. 아마 <파업전야>에 노동의 건강함이 담겨있다면 그건 모두 이런 노동자들과의 신명나는 한판, 그 동지적 관계가 스며든 까닭이다.
   
오랜 시간이 경과한, 1996년 10월 4일, 헌법재판소
공연윤리위원회의 영화사전심의가 위헌임을 판결한다.
“영화법 12조 영화의 사전심의제도는 헌법에서 금지하고 있는 사전검열 제도로…”

 

같은 달 12일 오후 5시, 명동성당


‘영화검열 위헌결정 환영 및 표현의 자유 완전쟁취를 위한 결의대회’가 열리고 있다. 독립영화 배급 투쟁에 이골이 난 친구(낭희섭)의 지휘로 천막 스크린이 엉성하지만 굳건하게 세워진다. 16mm 필름(스크레치로 비가 많이 흐르는)으로 <파업전야>가 다시 상영된다.


상영이 끝나고 ‘장산곶매’ 당시 회원들이 군중들 앞에 늘어서 소개된다. “…또 여기 이 친구가 바로 식당 씬을 찍을 수 있게 만든 주방장 이었을 뿐더러 테러 장면 등 액션 씬에서도 거의 무술감독같이 활약한…”

 

 

* 윗 글은 기억을 되살려 시나리오체로 구성한 것으로 대부분 사실에 근거하지만, 필자의 주관에 의해 장소, 대사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김선아] 2004-08-24 오전 11:4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