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영화

파업전야

참된 2009. 2. 21. 22:43

아래는 다음 백과사전(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10XX165113)에서 발췌한 것이다  

 

 파업전야
 
 
장르 드라마
감독 장동홍, 이은, 이재구, 장윤현
제작 이용배, 이은
각본 공수창, 김은채
주연 임영구, 왕태언, 고동업, 엄경환, 조현모, 최경희
음악 안치환, 조성욱
촬영 김재홍, 오정옥, 이창준
편집 정성진, 정진완
조명 김정호, 송훈, 이태형, 이천형, 이윤동
시간 105분
언어 한국어
등급 (심의 받지 않음)

 

 

 

실시간음악감상 이곡을 듣습니다.(출처 피엘송닷컴 http://plsong.com/home.php) 

 

12269

 

 


(힘찬 결의대회를 방불케하던 파업전야 상영장 모습) 

 

 

위 사진과 아랫글은 노동자 역사 한내(http://www.hannae.org/)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씨줄날줄]영화 <파업전야>와 철의 노동자
글쓴이 등록자 관리자
조회수 126 등록일 08-09-02

2008년 9월 [뉴스레터 창간호] 씨줄날줄


노래를 통해 본 노동자역사 (5) : 영화<파업전야>와 철의노동자


글 : 최도은 회원 / 사진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간답게 살고 싶어서 노조를 만들고 투쟁을 시작한 건데……. 어떤 이는 비정규직 철폐를 외치며 80여 일간 곡기를 끊고 있고, 또 어떤 이는 두께가 1cm도 되지 않는 철골로 만들어진 40여m 조명철탑 위에 널빤지 하나 대 놓고 목숨을 건 고공농성을 하고 있으니 자본 공화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는 목숨을 내놓고 싸워도 해결이 되지 않는 건지 답답함으로 맞는 9월입니다. 세상사 빛과 그림자가 한 몸을 이루듯이 지금 이 시간 힘들게 싸우는 노동자들의 절망과 한숨이 희망의 씨앗이 되길 간절히 바라며 9월의 노래로 ‘철의 노동자’를 불러 봅니다.


철의노동자(1990년 안치환 글과 곡)


민주노조 깃발아래 와서 모여 뭉치세 / 빼앗긴 우리 피땀을 투쟁으로 되찾으세 / 강철 같은 해방의지 와서 모여 지키세 / 투쟁 속에 살아 있음을 온 몸으로 느껴보세 / 단결만이 살길이요 노동자가 살길이요 /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 아, 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 사랑 / 단결투쟁 우리의 무기, 너와 나 철의 노동자.


노동가요를 대표하는 노래 중 하나인 ‘철의 노동자’는 1990년 만들어진 독립영화 <파업전야>의 주제곡입니다. 이 노래는 영화 <파업전야>의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가수 안치환이 만들었습니다. 안치환은 영화의 주 무대로 사용된 공장에 방문했다가 닫힌 공장의 녹슨 철문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 합니다.

 


 


영화 <파업전야>를 만든 영상집단 ‘장산곶매’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우리나라 영화법의 부당함에 저항하며 영화의 제작과 배급, 상영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독립영화단체입니다. <파업전야>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전국적으로 만들어졌던 민주노조 건설 과정을 둘러싼 노동자들의 일상과 갈등 그리고 고민과 투쟁을 배경으로 노동자계급의 문제를 주제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라는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의의로는 영화 제작 현장이 셋트장이 아닌 직장폐쇄된 인천의 ‘한독금속공장’에서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투쟁하는 ‘한독금속노조 조합원’과 함께 촬영을 진행한 점인데, 이것은 영화가 예술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현장노동자의 참여와 그들의 지원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의의도 갖습니다.


노동자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 이 영화는 정권에 의해 ‘상영금지조치’가 내려져 노태우 정권과 노동운동 진영간 계급투쟁의 대리전을 치루는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당시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신문 등 전국중앙일간지에는 영화 <파업전야>와 관련된 기사가 매일 올랐는데, “노동쟁의를 선동하는 영화 <파업전야>를 상영할 땐 처벌한다.” “계급의식을 고취시키는 <파업전야>의 상영을 강행한 8명을 연행했다”, “<파업전야> 필름 압수했다” 등의 내용으로 수차례 기사들이 올랐습니다(1990년 4월 5일∼18일).

 



(영화 파업전야를 보기 위해 줄지어 늘어선 노동자들)


1990년 4월 어느 날, 저도 1,500원의 관람료를 내고 인천대학교 인문관 강당에서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노동영화라는 걸 봤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는 단조공장 노동자들의 사랑과 분노, 희망과 단결을 표현한 거였는데 갑자기 강당에 전기가 나가고, 곧 이어서 어둠속으로 번쩍번쩍한 하이바를 쓴 시커먼 바퀴벌레 같은 백골단들이 몰려들어왔습니다. 저를 비롯한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을 쳤지만, 넘어지고, 다치고, 아비규환 상황에서 제 선배를 비롯해 몇몇은 연행이 되었고, 영화필름과 영사기도 빼앗겼습니다. 한 마디로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노태우 정권 당시 노동자의 삶을 담은 영화를 보는 것은 그 자체가 불온시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청카바 사복경찰들이 영사실에 들이닥쳐 파업전야 필름을 압수하고 있다.)


제가 살고 있었던 인천지역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영화필름은 빼앗겼고, 영화 상영장엔 백골단이 투입되어 관객을 끌어내는 일이 계속되었습니다. 1990년 4월 14일에는 ‘광주지역노동조합협의회’ 주최로 ‘전남대’에서 <파업전야>를 상영했는데, 영화 상영을 지키고자 노동자와 학생들이 화염병과 쇠파이프로 무장을 하고 투쟁을 전개하자 경찰은 교내 진입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헬기를 띄워 상영장을 포위하고 수 천여 명이 넘는 병력을 증원 투입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시 검찰과 치안 당국은 이 영화가 파업을 선동하여 ''''''''''''''''제3자 개입금지조항''''''''''''''''에 해당된다며 영화 창작자 이 은씨에게 수배령을 내렸습니다. 심지어 영화를 보고 온 노동자에게 해고를 강요하는 사업주도 있었고, ‘영화를 보는 노동자는 해고한다.’는 신문 광고도 있었습니다.

 


 


러나 노태우 정권의 폭압적인 탄압이 심해질수록 이 영화는 전국 곳곳에서 상영과 재상영을 거듭하며 지역 노동자들의 단결을 돕는 연대의 장이 되었으며, 상영하는 곳곳마다 결성된 ‘노동자-학생 사수대’는 노학연대의 자연스러운 진원지가 되었습니다. <파업전야>는 마침내 1990년 결성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한국전쟁 이후 최초의 자주적인 전국노동자의 조직)’를 통해 ''''''''''''''''전노협 원년 세계 101주년 노동절 기념 영화''''''''''''''''로 선정됐고 전국 곳곳의 지역노동조합협의회를 중심으로 현장 곳곳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정부와 언론, 검찰과 경찰, 백골단의 폭력에 맞서 싸우며 지켜낸 영화<파업전야>와 주제가 ‘철의 노동자’는 이후 수 많은 노동자의 가슴에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힘찬 결의대회를 방불케하던 파업전야 상영장 모습) 


<파업전야>에 참여한 창작자들은 지금 충무로 영화계에서 이름 꽤나 날리는 감독들로 변해 있습니다(에 이 은, <접속>에 장윤현 등). 더불어 영화음악을 담당했던 안치환도 지금은 대중적 유명세를 누리고 있는 가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1990년 이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 사회적 배경에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날이면 날마다 노동자의 투쟁이 있었고, 노동자 투쟁이 한국사회 변혁의 전면에 서면서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사회운동에 진출한 젊고, 진보적 의식으로 무장한 예술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