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예술

민중미술 선구자 "오윤 회고전"

참된 2008. 11. 17. 14:03

        

 

민중미술 선구자 "오윤 회고전"

오마이뉴스   2002.12.07 10:37

 

 

암울하였던 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 시대상황에 맞서 싸운 일련의 청년 미술가들이 있었다. 그 당시 치열한 역사현실속에서 감히 보수적인 한국 미술계에 반기를 들고 커다란 변혁을 일으킨 선구자중의 한 사람은 다름아닌 청년미술가 오윤이었다.

 

저항문인 김지하가 "펜"으로 시대모순과 저항하며 투쟁하였다면, 민중미술가 오윤은 "조각칼"로 민중의 정서와 시대정신을 표출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윤은 1986년 41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비운의 미술가 오윤의 자취와 그의 치열하였던 작품세계를 다시 한번 감상할 수 있는 회고전이 서울 인사동 "갤러리 아트사이드"에서 열리고 있다. 회고전에는 일반인에게 처음으로 공개되는 테라코타(점토 조각), 드로잉, 여타 습작품을 포함하여 생전에 작업된 수많은 판화들이 엄선되어 전시되고 있다.

 

"오윤 목판화의 특징을 한마디로 함축한다면 "힘"일 것이다. 여기서 힘은 한(恨)과도 통하는데, 정한(情恨) 곧 내재적인 한이 외재적으로 표출된 것이 힘인 것이다. 그리고 한은 삶의 설움을 자기 내부로 불러들인 응축된 힘으로서, 분노를 한바탕 풍물로 풀어헤친 춤사위로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귀(鬼)의 형태로서 표출된다. 특히 오윤은 춤사위를 매개로 하여 생과 사를 하나로 관통시키고 있는데, 이는 예술가를 무당에 비유한 작가의 말과도 통하는 것이다. 또한 말년에 그린 도깨비 그림에서의 한은 삶의 지평과 신화의 지평을 하나로 아우른다. 이로써 오윤의 목판화에 있어서 힘은 한이 밖으로 표출된 것으로서, 한과 힘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념성과 도덕성이 강한 힘의 정서를 표출시킨 그의 목판화는 그대로 시대정신의 표출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힘의 정서였던 것이다." (고충환/미술비평가)

 

오윤의 예술의식을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세계가 보여주는 다양성과 역사인식 그리고 암울하였던 시대상황과 맞물린 짤막한 인생역정속에서 민족적 한(恨)의 정서를 민중의 힘으로 고양시키고,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조각 칼날을 세우고 민중정서를 목판에 각인하였던 그의 삶을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미술사에서 오윤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 문학사에서 신동엽이 차지하는 위치와 비슷하다는 평가가 나왔는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이후,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미술가들은 고뇌와 번민을 거듭하며, 민중현실과 외세 그리고 분단현실에 정면으로 대결하는 "민중미술" 혹은 "민족미술"이라는 쟝르를 개척해 나갔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부하고도 폐쇄적인 화랑전시 마저 부정하면서, 길거리 미술, 현장 미술, 시위미술로 이어지고, 변혁적인 "걸개그림"까지 대중들에게 선보이면서, 민중의 에네르기를 고양시키기까지 하였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민중미술가 오윤(1946~1986)의 짤막한 생애>

 

 오윤은 1946년 부산 동래에서 출생하였으며, 그의 부친은 아시아자유문학상을 수상한바 있고, "갯마을"의 소설로 유명한 작가 오영수씨이다. 1965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한후, 대학 4학년 때인 1969년 제도권 미술에 대항한 "현실동인전"을 준비하였으나, 결국 당국의 제재와 교수들의 만류로 무산되어, 한국 미술사에서 탄압사례 제1호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그는 한동안 멕시코 벽화운동의 거장인 리베라(Diego Rivera), 오르즈코(Jose Orozco), 시케이로스(Alfaro Siqueros) 등과 격렬한 선전용 판화로 민중미술의 한 전형을 제시하였다는 포사다(Gwadalrupe Posada)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고, 자신의 예술세계로 흡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작 가운데 환경미술의 선례를 남겻다는 구 상업은행(현 우리은행) 구의동지점 내외벽 테라코타 전돌 부조 벽화(1974)와 구 상업은행 동대문지점의 외벽 테라코타 전돌 부조 벽화(1974)는 바로 멕시코 벽화운동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미술가 오윤이 본격적으로 "민중미술"의 세계에 뛰어든 것은 1980년 "현실과 발언" 창립전 때부터였다. 그 당시 그는 본격적으로 기성화단에 반기를 들고, 미술계의 일대 변혁과 충격을 안겨주는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유채화 기법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해학적으로, 날카롭게 풍자한 "마케팅 1.2.3 "시리즈, 생과 사, 저승과 이승의 관계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세계를 묘사한 "원귀도", 민속의 축제 형태를 빌어 민족통일을 기원하는 굿거리 걸개그림 "통일 대원도"등은 너무도 유명한 작품이다. 그가 목판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몰입한 시기는 1983년 무렵이었으며, 그의 독보적인 목판화 작품들은 80년대 하나의 민중미술 쟝르로 자리잡게 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각종 문학지의 표지화, 삽화로서 김지하 시인의 "오적"과 박노해 시인의 "노동의 새벽"을 비롯하여 당시 많은 사회과학 서적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1983년 간경화증세로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서양의학을 배척하고 민간요법과 한방으로 고치겠다는 생각으로 1개월 만에 병원을 탈출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서구 과학에 대한 회의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탈출한 그는 지방을 전전하며 요양을 한뒤, 1986년 봄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그 무렵 진보미술진영은 공권력의 탄압에 맞서 "건강한 민족문화의 건설과 민주화 운동에의 적극기여"라는 목표로 "민족미술협의회"를 결성하였고, 인사동 외진곳에 "그림마당 민"이라는 상설 전시장을 마련하였다. "그림마당 민"의 첫 개인 초대전으로 "오윤 판화전"이 1986년 5월 30일부터 6월 9일까지 열렸다.

 

그러나 이 개인전은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개인전이 되버린다. 예상밖으로 전시회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나, 7월 6일 오윤은 41세의 나이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장례는 민족미술협의회장으로 치러졌고, 장지는 벽제 문봉리 국제공원묘지 한쪽 길가에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