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화예술

칼끝에 번뜩이는 민중의 전투신명

참된 2008. 11. 17. 13:12

칼끝에 번뜩이는 민중의 전투신명

 

오윤 작고20주기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1월5일까지

 

 

 

김형순 (seulsong) 오마이뉴스

 

 

 

▲ 오윤의 회고전 <낮도깨비 신명마당>열리는 제2전시실 입구. '북' 31×25cm 목판 1985
ⓒ 김형순
80년대 사회 변혁기에 민중미술의 뿌리를 내린, 오윤의 작고 20주년 회고전 '낮도깨비 신명마당'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제2전시실에서 11월5일까지 열린다.

이번 회고전에는 판화 140여점, 유화뿐만 아니라 평소에 접하기 힘든 작가의 드로잉, 작업노트, 작업통판, 누이에게 보낸 편지, 조각까지 공개돼 관객들이 그의 작품에 더 친근감을 가지게 했고 작업과정이 알고 싶은 이들의 궁금증을 적절히 해소시켜주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작가의 70년대 습작노트나 드로잉을 보면, 형태를 원통으로 분석한 세잔이나 브라크, 피카소의 큐비즘을 연상시킨다. 테라코타 작품의 곡선이 완만하고 너그러워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포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작가의 심성과 속내를 훤히 들여다본 것 같다.

▲ 오윤의 초기 드로잉과 테라코타 조각 그리고 판화시집 표지, 탈춤패에 사용된 '강쟁이 다리쟁이' 탈과 마케팅 연작 '발라라 발라' 등을 모자이크한 사진
ⓒ 김형순
오윤은 1946년 소설가 오영수의 아들로 부산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이사와 사대부고와 서울대 미대조소과를 다녔다. 69년에는 '현실동인 제1선언'에 참여했고, 사회변혁의 불을 붙였던 80년대 새벽기인 1979년에는 '현실과 발언'에 주도했다. 80년 이후 병고에도 엄청난 작품을 쏟아냈다.

대학시절에 민중문화에 심취했고 탈춤, 민화, 불화, 무속화 등 우리의 전통연희에 관심을 보였으며 이를 민족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에 전념했다. 동시에 멕시코 혁명정신을 벽화로 새긴 리베라, 오로스코, 시케이로스와 영국과 프랑스 조각가 헨리 무어와 마이욜 그리고 레제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작가가 된 건 우연이 아니고 집안내력인 것 같다. 소설가인 부친은 물론 누이도 서울미대를 나온 작가였다. 하지만 오윤은 시대상황이 급박하고 사회변혁의 요청이 커 그냥 작가가 아니라 억눌린 민중의 한을 전투신명으로 풀어내는 민중작가가 되었다.

▲ '아이들의 노래' 1984 종이, 목판. 아동문학가 이원수도 보이고 동화나 민화 풍. 오윤의 주된 경향인 전투적 신명과 달리 아주 부드러운 신명이다
ⓒ 김형순
1986년 각고 끝에 민족미술협의회 회원들은 인사동에 '그림마당 민' 전용전시장도 확보했고 첫 '오윤판화전'을 여는 등 큰 호응을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역량을 맘껏 펼치지 못했고 그동안 과로에 따른 피로와 병고로 그 해 산화했다.

그의 정신은 1979년 '현실과 발언'의 발문 '미술적 상상력과 세계의 확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파편화 되는 세계를 확대키 위해 미술적 상상력을 꿈꾸었고 구비문학의 생명력을 새삼 발견했으며, 렌즈처럼 굴절되는 세상에 작가의 애정 어린 비판을 보냈고 자본주의가 낳은 물질숭배, 자연파괴, 과잉소비를 경고했다.

그는 또한 서구미술의 근간이 되는 비례, 명암, 원근법보다는 기(氣)와 신명과 생동감을 불어넣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 '기운을 쓴다'는 개념을 그림에 도입했다. 창작에서의 제도화와 상투화를 비판했고 판화에 일상뿐만 아니라 현실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전반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민중적 삶이 농축된 판화

▲ 작가 오윤. '노동의 새벽(박노해시집 표지화)', 종이, 목판 1984. 작가와 판화 속 주인공이 꽤 닮아 보인다
ⓒ 오윤
그의 판화작업은 책 발간과 인연이 깊다. 1976년에는 '청년사'를 비롯하여 1984년에는 '풀빛출판사' 민중시집 속 삽화와 표지에 그리고 '분도출판사'의 김지하 이야기 모음 '밥'의 본문과 삽화에 사용되어 그의 위상을 대중에게 크게 각인시켰다.

민초들의 서러움과 고달픔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이런 양식만큼 더 좋은 매체는 없었다. 시 한 편에 판화 하나, 그 속에 모든 메시지가 농축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변혁을 꿈꾸는 세력은 그의 판화를 먹고 자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판화뿐만이 아니라 당시 탈춤패의 '강쟁이 다리쟁이' 탈도 제작했고, 춤패의 포스터도 그렸고, '민족의 노래, 통일의 노래' 출판기념 걸개그림인 '통일대원도'도 제작했다. 당시 민중집회에 그의 탈과 판화와 포스터와 걸개그림은 대중을 사로잡는 무기였다.

악귀 쫓기

▲ '원귀도' 캔버스에 유채 1983. 평탄지 않은 한국현대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
ⓒ 김형순
우리풍속의 골자는 '악귀 쫓기'에 있다. 한 마을을 갈라놓고 쑥밭을 만드는 악의 세력을 그 공동체의 주인들이 힘을 모아 내좇는 행사이다. 오윤의 판화에는 바로 그런 정신과 원칙이 서 있다. 한 시대의 악귀 혹은 공공의 적을 확실히 밝혀내고 이를 타도하기 위해 총공세를 벌리는 것이다. 다만 오윤은 그 몫을 판화로 대신했을 뿐이다.

어느 시대나 자발적으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아닌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조작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81년 신군부는 '국풍'과 같은 조작된 행사를 단행했으나, 오윤은 이를 폭로하듯 작은 판화로 자발적 신명의 놀라운 힘을 보여주었다.

이런 경향의 작품은 그만의 특출한 유머와 기지와 상상력이 넘치는 '마케팅 연작', '지옥도', '원귀도' 등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한국현대사의 비극과 민중의 한을 그린 '원귀도'는 형식과 내용에서 틀을 깬 수작이다. 이념과 자본이 억압의 도구가 된 세상에서 민중의 귀곡성을 들려주면서 동시에 이를 다독이는 진혼곡 같기도 하다.

악순환 고리 끊기

▲ '칼 노래' 1985 광목, 목판, 채색 32.2×25.5cm 유족소장
ⓒ 김형순
오윤은 이처럼 시대의 악령을 추방하고 악순환의 고리를 확실히 끊는 주역이 되고 싶어 했다. 그렇다보니 그의 칼바람에는 살벌한 전투신명이 인다. 그의 칼바람은 억눌림을 당하는 피해자에게는 후련함을, 억누르는 가해자에게는 서늘함을 주기에 충분했다.

예컨대, 한 농민이 피폐한 시골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다 일용직 노동자가 되고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다 시위에 연루돼 실업자가 되고 다시 도시빈민이 되고 결국 인륜을 상실하여 도둑이나 범죄자가 되어 감옥을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의 악을 끊고자 했던 것이다.

뿔난 도깨비와의 해우

▲ '낮도깨비' 1984 광목, 목판 54.4×36cm 유족소장
ⓒ 김형순
그런데 이번에는 느닷없이 그의 판화에 머리에 뿔나고 김나는 도깨비가 나타난다. 이 기(氣)가 펄펄 넘치는 도깨비들이 오윤의 눈에는 또 다른 민중의 전형이었나 보다. 악귀와 싸우는 도깨비 그들은 현명하게도 분노와 미움보다는 조롱하고 놀리는 익살과 해학으로 더 큰 힘과 위력을 발휘한다.

이런 도깨비의 제시는 민중의 형상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진전이라 할 수 있다. 김지하의 말대로 그는 80년대 중반 중병에도 이런 도깨비를 만나 신바람이 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업에 전념했다고 한다. 이건 분명 그에겐 하나의 개가였고 병고 속 위안이었다.

인정공동체 실현

오윤이 꿈꾸는 나라는 어떤 것이었을까? 죽기 1년 전 작품인 '춘무인 추무의(春無仁 秋無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강일순의 말을 인용한 이 제목은 심상치 않다. '봄에 인(仁)을 심지 않으면 가을에 의(義)를 얻을 수 없다'라고 해석해 볼 때 결국 인(仁)과 의(義)가 하나가 되는 그런 나라를 그는 염원한 것이다.

▲ '춘무인 추무의(春無仁 秋無義)', 종이, 목판 채색 1985
ⓒ 김형순
이런 생동감 넘치는 판화가 탄생했다는 것은 1985년 당시의 삶이 얼마나 척박하고 어둡고 힘들고 괴로웠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기에서 하루바삐 빠져나와 어느 곳에서, 누구와도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실현해보려는 시대의 타는 갈증을 엿볼 수 있다.

가장 독창적인 한국미술

그는 판화로 민중의 이미지를 대중 속에 스며들게 했고 사회변혁에도 파급력을 주었다. 결국 민중이란 단어는 인문학, 종교, 예술 등에서 전반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작업은 민중미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며 자리를 굳혀나갔다.

이리하여 80년대 한반도은 엄청난 시련 속에서도 민중이라는 담론을 통해 우리들의 정체성을 찾아냈고 자연스럽게 자주의식과 주인의식을 되살려냈다. 서구적 잣대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고 부분적이지만 역사의 상흔도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오윤은 한국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의 통합시키지는 못했지만 이런 작업을 통해서 민중예술도 세계적 보편성을 띠고 인류애에 호소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또 고난 받는 민중적 삶과 억압받는 역사 속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가장 독창적인 한국미술을 일구어 낸 선구자임에 틀림없다.

▲ '무호도' 1985 종이, 목판. 그의 판화 전반에는 포효하는 한국 호랑이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 김형순

덧붙이는 글 | [미술관소개] 과천국립현대미술관 요금 3000원, 초중고 1500원 '오윤 다큐멘터리도' 상영. 월요일 휴관.
[전시설명회] 매주 금-토-일13:00,15:00
[재미있는 그림이야기(오윤관련)] 초등학생(4-6학년) 미술비평 활동. 9월23일(토)~11월4(토)
매주 토요일 오후2시~4시
[오윤 특강]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소강당 시간 2006.10.19(목) 오후1시30분
강사: 김지하 '오윤의 생애와 작품세계' 사회: 강수정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토론: 김지하 시인, 성완경 교수, 이성민 평론가, 이치로 하이루 평론가, 조인수 교수

 
 
2006-09-27 15:33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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