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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OST 붐, '응팔'처럼 속 찼을까

참된 2016. 5. 21. 19:32

[Oh!쎈 초점]드라마 OST 붐, '응팔'처럼 속 찼을까


[OSEN=유진모의 취중한담]1988년은 우리나라가 최초로 올림픽을 치른 역사적인 해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이후 오랫동안 우리 국민의 정서와 문화에 지배적인 영향을 끼친 팝송을 가요가 누르고 시장을 점유한 원년으로 기록될 만큼 가요계가 풍성해져, 1990년대의 전성기와 오늘날의 K팝의 자양분이 되고 초석 역할을 한 분기점으로 봐도 무방한 가요의 전성시대였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로 재조명되고 있는 그 해의 가요계는 얼마만큼 풍성했을까?
당시는 지금과 달리 지상파 방송사의 가요순위 프로그램-KBS와 MBC에 단 두 개밖에 없었기에-이 가요시장의 판도를 쥐락펴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판세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특히 KBS2 ‘가요 톱 텐’에서 1위를 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고, 곧바로 음반판매와 밤무대 개런티로 직결되는 수익창출의 궁극적 목표였다. 



그해 ‘가요 톱 텐’에서 1위를 한 곡은 이정석의 ‘사랑하기에’, 민해경의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최성수의 ‘동행’, 유열의 ‘이별아래’, 조하문의 ‘이 밤을 다시 한 번’, 여운의 ‘홀로된 사랑’, 이선희의 ‘나 항상 그대를’, 전영록의 ‘저녁놀’, 김종찬의 ‘사랑이 저만치 가네’ ‘토요일은 밤이 좋아’, 정수라의 ‘환희’,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 이상은의 ‘담다디’, 최호섭의 ‘세월이 가면’, 이치현과벗님들의 ‘집시여인’이었다. 
한 눈에 봐도 버라이어티하다. 대중성과 음악성에서 균형감각을 절대 잃지 않는 조용필을 비롯해 여가수 중 최고봉인 이선희가 건재하다. 하지만 이정석 최성수 조하문 전영록 김종찬 최호섭, 민해경 정수라 주현미 이상은 등 신구세대 대항마들이 조용필과 이선희를 보필 혹은 견제하고 있다는 게 풍성한 판도를 형성한다. 
여기에 그룹 이치현과벗님들과 여운이 건재하다. 장르도 다양하다. 록 발라드 가요 댄스 트로트까지 편식이 없다. 
이건 제도권의 최고봉인 부자들의 잔치일 뿐 제도권을 노리는 차트 밖 경쟁이나 비제도권에 머무는 언더그라운드들의 도약과 약진 역시 우리 가요를 풍부하게 살찌워줬다.


김완선을 비롯한 모든 미모의 여가수들을 위협했던 이지연의 데뷔곡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를 비롯해 발라드와 트로트를 넘나드는 양수경의 ‘바라볼 수 없는 그대’, 석미경의 ‘물안개’, 장혜리의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추억의 발라드’, 심수봉의 ‘사랑밖에 난 몰라’ 등의 히트로 여가수들이 남자가수들과 대등하게 활동한 것을 볼 수 있다. 
그 외 변진섭의 ‘홀로 된다는 것’, 소방차의 ‘그녀에게 전해주오’ ‘어젯밤 이야기’, 조용필의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박남정의 ‘아! 바람이여’, 이상우의 ‘슬픈 그림 같은 사랑’, 도시아이들의 ‘달빛 창가에서’ 등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변진섭은 당시 발라드계를 장악하고 있던 이문세 유열 김종찬 최호섭 등을 위협하는 수준을 넘어서 이듬해 완전히 발라드의 왕좌에 올라 신승훈이 등장하기 전까지 절대권력을 누린다. 소방차는 아이돌그룹의 탄생에 밑거름이 되고, 박남정은 댄스뮤직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힌다. 도시아이들은 이는 기존 가요계의 작법을 깨뜨리는 펑키 등을 도입한 독특한 구조의 변화로 향후 가요계의 장르와 음악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됐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때 언더그라운드에서는 김광석의 ‘거리에서’, 유재하의 ‘지난날’, 시인과촌장의 ‘가시나무’,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언제나 그대 내 곁에’, 이문세의 ‘시를 위한 시’, 전인권의 ‘사랑한 후에’, 이남이의 ‘울고 싶어라’, 신촌블루스의 ‘아쉬움’ 등이 크게 히트했다.
이문세는 정확히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라고 할 수 없는 위치에 서있긴 했지만 TV 출연을 거부하고 그 흔한 프로모션 없이 단순히 소규모 콘서트만으로 폭발적인 음반판매고를 창출해냈다는 점에서 언더그라운드의 범주에 포함돼 있었다. 더불어 이남이 역시 나중에 활발하게 방송출연을 하며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역시 밴드 신중현과엽전들 사랑과평화 출신으로 순수한 음악적 활동을 고집했다는 점에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분류된다. 
당시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의 이름은 정말 화려하다. 오늘날까지 그 음악성과 가요계에 끼친 지대한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대가’들이 당시에 음악의 정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는 의미다.
더욱더 아쉬운 점은 그 명단에서 김광석 유재하 김현식 등 실력파 중의 실력파들이 요절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가요의 수준을 단기간에 몇 단계 끌어올린 ‘천재’들이었다.


유재하는 클래식과 재즈 작곡법을 가요에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그것을 가장 품격 있고 아름답게 승화시킨 뮤지션이다. 유재하 전에 김수철이 최초로 원맨밴드를 도입한 바 있긴 하지만 그 점만 제외한다면 유재하는 국내 싱어 송라이터 중 음악의 진보성과 완성도 면에선 단연 정상급이다.
김광석이 상업과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대중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뮤지션이었다면 김현식은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 그리고 영적인 가치관을 현세에서 찾지 못해 갈등하고 자학하는 뮤지션의 음악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가장 비영리적이었음에도 가장 대중으로부터 신격화된 가수 겸 작곡가였다고 할 수 있다. 다수의 대중은 그의 유작 ‘내 사랑 내 곁에’를 기억하지만 그를 정말 좋아하는 마니아들은 하모니카 연주로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인스트러멘틀 ‘한국사람’을 최고로 친다. 그는 진정한 20세기의 마지막 한국 뮤지션이었다. 
사실 시인과촌장의 실체인 하덕규는 이 시대 몇 안 되는 전위적인 동화작가였다. ‘가시나무’는 아름답고 철학적인 가사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지만 비타협적 비대중적이었던 하덕규는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명예와 부를 버리고 잠적했다. 
가창의 기본은 복식호흡이다. 그러나 당시에 대표적으로 복식호흡보다 목으로 소리를 내는 걸출한 가수들이 있었으니 김현식 그리고 전인권이었다. 들국화라는 국내 최고의 록그룹의 한 축이었던 전인권은 알 스튜어트의 부드러운 이지리스닝 ‘The Palace of Versailles’를 ‘사랑한 후에’라는 처절한 록발라드로 재탄생시켰다. 구구절절한 미사여구도 필요 없이 이 곡 하나만으로도 전인권의 값어치는 드러난다.
왜 ‘응팔’이 인기가 있었는지, 드라마가 방송되는 동안 삽입곡들이 왜 20여년 만에 다시 차트에 올랐는지 그 이유는 확연했다./osenstar@osen.co.kr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