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사람

신영복 선생의 너른 품 …선생과의 인연 글 줄이어

참된 2016. 1. 17. 13:01

신영복 선생의 너른 품 …선생과의 인연 글 줄이어



 

액자 글, 주례로 못 모신 사연 , 저작이 준 감동, '인간의 품격', 후대의 자세 등

고 신영복 선생이 써준 어린이재활병원 액자 글씨. 사진제공=백경학 푸르메재단
고 신영복 선생의 넓은 품은 넉넉했다. 페이스북에서 고인과 인연을 추억하며 올린 지인들의 글이 이를 말해준다. 고인이 살아 생전에 가까운 주변 사람, 그리고 함께 살아가던 청춘들,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했던 이들, 지식인 등 얼마나 많은 이들과 교감하며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를 실감케 해준다.

어린이 재활병원 액자글을 신 선생으로부터 받은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는 그 사연을 이렇게 소개했다.

"푸르메재단이 2005년 세워지고 이듬해 성공회대학교로 신영복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푸르메재단이 내가족처럼 장애어린이를 생각하는 어린이재활병원을 지으려 한다고 말씀드리니 글을 하나 써주셨습니다.

고 신영복 선생이 써준 어린이재활병원 액자 글씨. 사진제공=백경한 푸르메재단
<소중한 만남 푸르메재단
아름다운병원 푸르메병원>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글이었습니다. 마치 한 글자 한 글자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병원을 건립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당신께서 도와줄 수 있는 것은 글을 써주는 일 밖에 없다고 하시며 병원을 잘 지어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써주신 글이 푸르메재단 회의실 정면에 놓여져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정갈하게 합니다. 한국의 격동기를 한 몸으로 맞으셨고 당신이 감당해야 했던 그 고통을 사색을 통한 깊이 있는 글과 아름다운 글씨로 표현하셨던 신영복 선생님의 서거소식에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한국사회에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큰 어른을 잃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시사만화가였던 백무현씨는 신영복 선생과 작은 인연을 소개했다.

"제가 첫 시사만화를 연재한 신문은 창간한 평화신문(현 평화방송 평화신문)입니다. 198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과 같은 날 창간했는데 한겨레신문이 평화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전해지기도 했지요. 평화신문이 충격적인 기획연재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이었습니다. 당시 신영복 선생은 통혁당 사건으로 20년간 복역 중이었는데 거의 매일 깨알 같은 글씨를 엽서에 실어 밖의 가족에게 보낸 것이지요. 그걸 평화신문이 입수해서 매주마다 4개 면에 광고 없이 쫙 실었더랬습니다. 독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저도 신문 제작 전 엽서를 보고 전율했습니다.

'감옥은 여름보다 겨울이 좋습니다. 여름은 사람의 등을 돌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러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평화신문의 보도와 국민적 반응은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8.15 광복 때였던가요? 신영복 선생은 특사로 풀려나 마침내 20년 만에 지상의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생의 높은 지성과 평화신문의 노력 덕에 석방되니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곧 출판되어 순식간에 수 십만부가 팔리는 초대형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선생의 부고를 접하고 가슴이 무너져 내립니다. 박정희 정권이 조작해서 감옥에 가둔 우리 시대의 지성이자 양심인 선생이 그 딸의 체제를 넘지 못하시고서 영면하시니 억장이 무너집니다.
저에게 평생 가르침을 주셨던 신영복 선생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김형민씨는 신영복 선생을 주례로 모시려 했던 사연을 올렸다.

"결혼할 때 주례를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워낙 게으른 학생이었던 탓에 스승님으로 모실 분이 없었기 때문이죠. 한참을 고민하다가 오늘 돌아가신 신영복 선생님께 편지를 띄웠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전화를 주셨더군요. 그 날짜에 해외에 계시다고. 그래서 역시 돌아가신 향린 교회 홍근수 목사님의 주례를 청하게 됐었지요. 신영복 선생님께 밤새 쓴 편지를 먼지 털어 가져와 둡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교사 출신으로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이계삼씨는 우울한 대학 시절 신영복 선생의 글을 읽고 위안을 받았던 사연을 올렸다.

"대학에서 2년을 보내고 난 1993년 2월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나에게 우울증 비슷한 것이 찾아왔던 것 같다. 그 2년동안 나는 야학 학생회, 시위현장을 오가며 '다르게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스무살 그 나이대가, 그 시절 대학 분위기가 또한 그랬다. 그러나 그 2년 뒤, 나는 외로움과 열등감, 옹졸한 자기애로 뭉친 우울한 영혼이 되어 있었고, 이미 네 학기 학점은 완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나는 사는 일에 자신을 잃고 있었다.

그 어느날 선생님의 옥중서한을 영인본으로 묶은 <엽서>라는 책을 만났다. <엽서>의 앞머리에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없었던, 남한산성 육군교도소 시절 선생님이 쓴 글과 그림들이 누런 갱지에 담겨 있었다. 나는 얼른 읽기 시작했고, 완전히 몰입했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빈 지게를 지고 하늘을 바라보는 깡마른 지게꾼, 성냥갑을 쌓아놓은 것 같은 산동네 비탈길, 머리통은 크고 배는 올챙이처럼 볼록한 아이, 아기를 업고 행상길에 나선 어머니의 고단한 맨발, 이 그림들을 보면서 나는 조금씩 눈가가 젖어왔다.

그리고 <청구회 추억>을 읽었다. 서오능 소풍길에서 우연히 만나 사귄 문화동 산동네 소년들, 그들이 선생님과 만나는 동안 스스로 만들고 지켰던 약속의 목록은 이러했다. 새벽에 일어나 마라톤하기, 동네 비탈길 쓸기, 책 돌려 읽기, 물지게 져다주기, 눈으로 미끄러운 골목길에 연탄재 깔기, …. 그들은 중학교 입학금이 없어 자전거포에 취직해야 하는 가난한 소년들이었지만, 영혼은 이슬처럼 맑았다.

선생님이 육군 수도병원에 잠시 입원했을 때 삶은 계란을 싸들고 병문안 왔다가 위병소에서 되돌려보내진 아이들, 언제나 선생님 손을 잡고 다녔던 어린 꼬마는 문화동에서 혼자 걸어서 병원까지 왔다가 신분증이 없어 되돌아갔다지…. 나는 그 글을 읽으며 결국 후두둑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아이들의 우정, 그들의 가난, 1960년대 세상을 남김없이 사랑하고 아파하던 청년은 결국 형극의 나날 속으로 그렇게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구나. 그 막막했던 겨울날, 내 인생에게 찾아온 따뜻한 위로를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김명인 인하대 교수는 신영복 선생의 부음을 들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분이 이제 그 '부끄러움'이라는 평생의 상처에서 놓여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나는 2003년인가 <황해문화>에서 그분과 함께 '관계론적 패러다임'을 화두 삼아서 대담을 나눈 적이 있고, 2006년에는 <신영복 함께 읽기>라는 책에 그의 첫 저작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대한 비평을 기고한 바 있으며, 작년 봄에는 그의 마지막 저작 <담론>에 대한 서평을 쓴 바 있으니 그분과의 인연이 얕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따로이 각별한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공적으로는 그리 멀지 않고 사적으로는 그리 가깝지 않은 그런 어정쩡한 관계이지만, 사실 그분과 나는 깊은 내면에서 남들은 잘 모르는 부분을 깊이 공유하고 있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난 권위주의 군부독재 시기에 각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세칭 '사상범'으로 영어의 시간을 살았던 사실에서 연유한다. 물런 그분은 20년, 나는 2년 반 남짓이므로 내가 감히 그분에 필적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 경험의 어떤 핵심에서 나는 그분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는 것이다.

그 핵심, 그것은 부끄러움이다. 당시에 체제에 저항해서 검거, 투옥된 적이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공히 겪은 것이긴 하지만 특히 '조직사건'과 연루된 '좌익사범'의 딱지가 붙었던 사람들의 경우엔 검거와 투옥의 전 과정에 걸쳐 고문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양심과 사상에 대한 심각한 굴욕과 좌절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지금도 다시 떠올리기 힘든 생애에 가장 끔찍한 체험이다) 그리고 그 굴욕과 좌절의 체험은 평생 동안 '부끄러움'의 형태로 남아 전 생애의 그늘이 된다. 감히 말하거니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자기를 향한 혐오와 타인을 향한 죄책감'으로 구성된 그 '부끄러움'의 깊이를 절대로 측량할 수 없다.

나는 일종의 '환우'의 감각으로 신영복 선생의 삶과 저작의 모든 면에서 그 '부끄러움'의 흔적을 읽을 수 있었다. 비록 그분이 비슷한 경험을 했으나 여전히 어두운 은신과 자폐의 삶을 살았던 다른 분들과 달리 대학교수로서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서예가로서 대중적인 애정과 관심을 크게 받으며 출옥후 30년 가까운 '여생'을 누린 것 같지만, 그분의 그런 '셀러브리티'에 가까운 명성과 발휘했으면 얼마든지 더 발휘할 수 있었던 영향력에 비한다면 확실히 두드러지게 느껴졌던, 그분의 삶과 저작을 가로지르는 어떤 '삼감'과 겸허의 태도는 바로 그 씻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라는 생애의 감각에서 오는 것이었다. 남들은 그것을 미덕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절대 아물지 않는 상처를 가진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아픈 표정인 셈이다.

그분의 부음을 들으면서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분이 이제 그 '부끄러움'이라는 평생의 상처에서 놓여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편안히 가시기를, 다음 생에선 다시는 그런 상처가 없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나는 이렇게 그분의 명복을 빈다. "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와 김동춘 교수. 사진제공=김동춘 교수
옆방의 동료 교수인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이런 글을 올렸다.

"哭,
신영복선생님께서 다시못올 먼 길을 가셨습니다. 10일 전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강연과 책을 통해 그리고 연구실 바로 옆방 동료로서 지난 20여년 동안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교수는 교환 특강의 추억을 떠올렸다.

"신영복 선생님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주선하여 교원대에서 특강을 하신 적도 있었고, 선생님 덕분에 성공회대학교에서 제가 특강을 한 적도 있는데 언제나 큰 가르침을 주신 어르신의 부음을 갑자기 듣게 되니 안타깝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정대화 상지대 교수는 남은 사람들의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신영복 선생님이 떠나셨다. 누구나 가는 길이고 예외가 없는 길이지만 많이 서운하다. 세상을 향한 선생님의 가르침은 선명한데 세상은 길을 잃고 심하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떠나시는 선생님을 붙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남은 일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선생님 편히 쉬십시오."

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는 신영복 선생에게서 '인간의 품격'을 보았다고 했다.

"선생에게서 다음의 하나를 정확히 본 것 같습니다. '인간의 품격'. 인간의 품격이 사라지는 시대,선생은 인간이 그 극한 상황을 견뎌내면서도 어떻게 그 품격을 끌어올리는가하는 그 어떤 전형을 보여주엇습니다. 더불어 숲 ㅡ누군 노추의 향연을 연출하고 더불어 사람들은 소풍왔듯이 훌쩍 먼저돌아가네요. 선생이라 부르고싶은 그 선생 자체가 드믄 시대에... 쇠귀선생님,존재 자체가 힘이었음을 잘 기억합니다. 빈자리 쉽게 채워지지않을 겁니다.엄혹한 나라에서 인간의 품격,예의,존엄을 지켜내고 잘 보여주셨습다.........이제 영면하소서"

김호기 연세대교수는 신영복 선생을 '굳고 정한 갈매나무' 같은 분이 가셨다고 추모했다.

"10년 전에 나온 신영복선생님 정년퇴임 기념저작인 '신영복 다시 읽기'(2006)에 글을 하나 썼다. 내가 강조한 것은 선생님 사상을 일관하는 저류가 인간해방이었다는 점이다. 선생님 사유의 두 지반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과 관계론의 인간 철학이었다. 글 마지막에서 나는 백석 시에 나오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와 같은 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선생님의 안타까운 별세를 맞이하니, 이 땅에는 이제 정말 굳고 정한 지식인이 없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리영희선생님도 돌아가시고 신영복선생님도 돌아가시고, 다산과 매천, 그리고 단재가 지켜온 이 땅 위에 지적인 주인은 더 이상 없다는 참담한 마음 금하기 어렵다. 부디 영면하시길 다시 한 번 빈다."

김근수 카톨릭프레스 편집인 겸 발행인은 신영복 선생님 닮은 인물들이 계속  나오도록 우리 각자 애쓰자고 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가신 후에 김대중, 노무현 닮은 지도자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 떠나신 뒤 김수환 추기경 닮은 추기경은 한국에 아직 없다. 로메로 대주교 떠나신 후 엘살바도르에 로메로 대주교 닮은 대주교는 아직 없다.

신영복 선생님 떠나신 이후 신영복 선생님을 닮은 인물은 나오지 않고 말 것인가. 진정한 추모는 훌륭한 분들을 닮은 인물들이 계속 배출되는 것이리라. 신영복 선생님을 애도하는 한편으로 선생님 닮은 인물들이 계속 나오도록 우리 각자 애쓰고 서로 키우고 격려하자고 말하고 싶다. 성서에서 권위를 뜻하는 라틴어 동사 augere는 남을 키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남을 키우자. 남을 죽이지 말고 좀 키우자. 서로 죽이지 못해 환장들 하지 말고, 사람 좀 키워보자. 우리 사회에서 인물 좀 키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