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

70m 굴뚝 위에서 손을 내밉니다, 부디 잡아주시길…

참된 2014. 12. 20. 17:25




70m 굴뚝 위에서 손을 내밉니다, 부디 잡아주시길…

등록 : 2014.12.19 21:15 수정 : 2014.12.20 10:43     한겨레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왼쪽)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지난 13일 경기 평택시 쌍용차 공장 70미터 높이의 굴뚝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평택/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토요판] 르포
이창근의 평택공장 굴뚝 일기

▶ 쌍용차 해고노동자 두명이 지난 12일 밤 자동차 공장의 70미터 굴뚝 위에 올랐습니다. 쌍용차는 15일 보도자료를 내어 “회사에 무단으로 침입해 주요 시설물을 불법점유하는 극단적이고 비상식적인 행위에 우려를 넘어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18일 경기도 평택 지역은 영하 10도를 찍었고, 대선 2주년이자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이 나온 19일엔 굴뚝에 오른 이창근씨가 생일을 맞았습니다. 그는 왜 굴뚝에서 생일을 맞은 걸까요. 그가 보내온 편지를 공개합니다.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소송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있기 하루 전인 11월12일, 지금 70미터 굴뚝에 함께 올라와 있는 김정욱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재판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현수막 맞추고 기자회견하면 되죠”라고 답했다. 그러고서 왠지 마음에 걸렸다. 고등법원 때처럼 대법원에서도 ‘정리해고 무효’ 판결이 나올 거라 기대했지만, 혹시나 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준비한 현수막을 어떻게 해야 하나. 호들갑이 결과를 바꾸지 않지만, 결과에 대한 아픔은 배가시키는 법이다. 살아오면서 체득한 경험치다. 그래서 말을 바꿨다. “그냥 우리 동료들 이름 적은 종이만 준비하죠.” 그래서 A4 용지에 동료들의 이름 석자를 인쇄했다. 대법원 선고가 있는 날 아침, 바람은 차가웠다. 수능날이기도 했고, 전태일 열사의 기일이기도 했다. 쌍용차 정리해고 6년의 다툼이 법적으로 완결점을 향해 치닫는 순간이었다. 법정은 바늘 하나 세울 곳 없이 가득 찼다. 쌍용차뿐 아니라 이 시대 억울한 이들의 발걸음이었다. 심호흡을 여러 번 했으나,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옆에 나란히 앉은 기자들도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사건번호를 부르고 판결을 내렸다. 기각이 대부분이었다. 아니 모두 기각되고 있었다. 우리 사건은 맨 나중이었다. 제발 저 쓸려가듯 지나가는 기각 파도에 우리 사건도 기각되기를 초초하게 기도했다. 회사가 고등법원의 ‘해고무효’ 판결을 불복해 상고한 사건을 대법원이 기각하면 ‘정리해고 무효’가 확정된다. 마침내 우리 사건번호가 불렸다. “파기환송!” 쌍용차 정리해고 고등법원 판결문이 찢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아득했다. 일어서 나오는데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화장실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밖에선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간단하게 상황 설명을 하고 걸어 나왔다. 플래시가 터지고 질문이 날아들었다. 지부장은 평소답지 않게 둔해 보였다. 김정욱 사무국장은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고, 고스란히 카메라 렌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변인인 나는 어떤 이야기를 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우리는 어떤 다짐을 했고 어떤 종류의 결심을 전했다.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망치고 싶었고 시간을 그저 멈추고 싶었다.
13일 오전 굴뚝 위에서 직접 찍어 보낸 사진에서는 이 실장(왼쪽)과 김 사무국장이 두꺼운 점퍼를 입고 나란히 서 있다. 평택/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트위터에 시 한편 올리고 굴뚝에 오르다 12월12일 쌍용차 공장이 있는 경기도 평택에는 눈이 내렸다. 오늘이 좋은 날인 것 같았다. 특별히 이유는 없다. 의지가 생기고 결심이 가닥을 잡는 날이 우리에겐 특정한 날이었다. 쌍용차 문제를 이대로 둘 순 없었다. 지난 시간이 아깝지 않았지만, 다가올 시간이 무서웠다. 동료들은 또 쓰러질 것이고, 우리들은 상갓집을 드나들어야 한다. 몸에서 나는 향냄새 때문에 지하철 옆자리 승객의 눈초리를 받아야 한다. 밥 한번 먹자는 말이 빈말이 된다. 이 지긋지긋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공전되는 것이 이제는 자신이 없다. 차를 몰아 평택으로 왔다. 며칠 전부터 봐둔 곳이 있었다. 쌍용차 평택공장 굴뚝이었다. 동료들 곁으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이 굴뚝보다 나은 곳이 없었다. 김정욱 사무국장과 의견을 나눴고 손을 맞잡았다. 동료들에겐 알릴 수 없었다. 최소한 몇몇하고만 준비를 했다. 우리가 예정한 시간은 새벽 두시였다. 일기예보를 보니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날이었다. 더도 없이 좋은 날이란 생각을 했다. 우선 1인용 텐트와 침낭을 챙겼다. 하나씩 짊어지니 짐이 제법 두툼해졌다. 나머지 짐은 최대한 줄여야 했다. 육포를 넣고 물 한병씩을 넣었다. 우리가 올라가야 할 곳은 70미터 굴뚝이었다. 짐을 더 넣고 싶어도 욕심내다간 올라갈 수도 없는 곳이었다. 오로지 공장 안 동료를 믿고 가자는 마음뿐이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트위터를 켰다. 이 마음 누가 알아줬으면 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말할 순 없었다. 밤 11시30분께, 시 한편을 올렸다. 고정희 시인의 ‘상한 영혼을 위하여’란 시였다.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시를 반복해 읽고 읽으며 다짐했다. 그러나 심장은 쉴 새 없이 뛰었고 호흡은 힘겨웠다. 시간이 밤 1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공장 외곽을 돌며 공장 안 상황을 살폈다. 우리는 공장 곁으로 다가갔다. 2009년 파업 당시 비해고자인 동료들이 공장 펜스를 넘어뜨리고 공장으로 진입할 때가 생각났다. 당시엔 무서웠고 서운했다. 그 펜스를 이번엔 내가 끊고 있다. 펜스를 끊는 손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공장 안으로 들어서자 사방에 조명이 켜져 있었다. 우리가 지금 공장 안으로 침입했다는 생각보다 동료들 곁으로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명을 피하고 폐회로텔레비전(CCTV)을 피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가 이곳에 들어온 것을 알리고도 싶었다. ‘우리 여기 이렇게 들어왔어요’란 말을 하고 싶었다. 펜스에서 공장 안 굴뚝까진 그리 멀지 않았는데 그 거리를 1시간 넘게 조심조심 걸어 들어왔다. 이 짧은 거리를 오기까지 6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굴뚝 밑까지 접근했다. 두꺼운 자물쇠가 우리를 바라봤다. 가슴은 뛰었고 오금이 저렸다. 도둑질하는 것도 아닌데 두려웠다. 자물쇠를 풀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장 기계음이 가까이 들려왔고 굴뚝에서 허연 연기는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굴뚝에 오를 것이란 얘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에는 알려야 했다. 실패하면 무슨 이유로 올라가려고 했는지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언론담당을 맡은 터라 기자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얘기를 할 수 있는 기자는 많지 않았다. 새벽 상황을 속보로 알려줄 수 있는 기자가 필요했다. 2009년 파업 이후 구속된 적이 있다. 6개월을 복역하고 나오니 세상은 쌍용차를 잊은 듯 보였고, 그렇게 쏟아지던 질문도 항의도 덕담까지도 말라 있었다. 그때 우연한 기회로 만난 기자가 있다. 굉장히 예를 갖춰 내게 말을 걸었고, 그는 쌍용차 얘기를 글과 기사로 썼다. 그 기자를 떠올렸던 건 그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는 마침 속보를 다루는 부서와 가까이 있기도 했다. 공장에 들어오기 몇 시간 전, 상황을 설명했고 그는 별말 없이 준비하겠다고 했다. 쌍용차 정리해고가 무효라는
고법 판결을 대법원이 뒤집자
다가올 시간이 무서웠다
또 동료들은 쓰러지고
상갓집을 드나들어야 하나 울타리 넘고 감시카메라 피해
5시간 만에 공장 굴뚝에 올랐다
차가운 날씨는 견디면 되고,
눈비는 바람에 말리면 된다
부디 내미는 이 손을 잡아주길
굴뚝 위에서 쓴 보도자료 공장 굴뚝은 70미터가 넘었다. 굴뚝 아래는 철문이 있는데 용접이 된 것 같았다. 아차 싶었다. 용접은 생각지도 못했다. 불안한 마음에 문을 흔들었더니 다행히 틈이 보였다. 용접된 곳이 떨어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녹슨 계단이 보였다. 35미터 정도의 굴뚝 중간까지는 평범한 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새벽 시간이라 눈은 얼기 시작했고 가끔씩 미끄러지기도 했다. 시각은 새벽 2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굴뚝 중간 지점까지 도착했다. 떨리고 흥분됐다. 드디어 성공을 예감했다. 그러나 손에는 힘이 없고 다리는 이미 풀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 공장 굴뚝을 쳐다봤다. 순간 저곳은 따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쉴 새 없이 올랐다. 김정욱 사무국장이 먼저 올랐다. 짐이 무거워 지고 올라가기에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다. 철계단은 중간중간에 볼트가 플려 있고, 바람에 흔들렸다. 먼저 오른 정욱 형이 다시 내려와 짐을 나눠 들었다. 그래도 무거웠다. 바닥엔 여전히 짐 하나를 남겨 놓은 채 우리 둘은 한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겨우 굴뚝에 올랐지만, 다시 짐을 가지러 내려가야 했다. 정욱 형이 선뜻 내려가겠다고 했다. 고마웠고 미안했다. 체력 하나는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6년간 체력 소모가 많았던 모양이다. 시간은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굴뚝에 도착했다는 말을 전했다. 드디어 정욱 형도 굴뚝에 올라섰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았다. 새벽 4시10분. 완전히 굴뚝에 안착했다. 오전 6시가 조금 넘자 쌍용차 굴뚝에 오른 사실이 이곳저곳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회사는 그제야 상황을 알았는지 굴뚝 아래로 경비대가 집결했다. 몇몇이 굴뚝 중간 지점까지 올라왔고, 몇몇은 우리가 있는 굴뚝 1미터 부근까지 올라왔다. 어떻게 올라왔는지 확인을 하겠다는 거였다. 긴장이 풀리지 않아 모든 것이 민감했고 올라오는 경비를 향해 올라오지 말라고 소리치고 욕도 했다. 아침 9시가 넘어가자 상황이 안정됐다. 이곳저곳에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오전 6시께, 몇몇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전화기를 들자 설움이 북받쳤다. 굴뚝을 감싸고 도는 무겁고 차가운 바람이 서러웠다. 울기도 하고 하소연도 했다. 조금 더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생각했다. 공장 굴뚝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두려움에 떨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동료들이 픽픽 쓰러져 죽어나갈 때 우리는 또 얼마나 무력했는지 말하고 싶었다. 굴뚝에 오르는 순간 백척간두 진일보(높은 장대 위에서 한발짝 나아감)의 마음으로 올랐다는 얘길 하고 싶었고, 반드시 승리해서 내려가겠다는 말을 우선 하려고 했는데,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도와주십시오.’ 이 한마디였다. 이 말을 이곳에서 한다는 것이 서럽고 비참했다. 굴뚝에 올라 잠잘 시간도 없이 긴장하며 첫날 저녁을 맞았다. 간이 1인용 텐트를 치고 대충 바람과 비를 가렸다. 바람은 생각보다 강했고, 눈 또한 땅 위보다 거세게 내렸다. 첫날 저녁 8시를 넘기자 연락이 왔다. 26번째 쌍용차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난 긴장했다. 옆에 있는 정욱 형 얼굴을 보고 멀리 공장 지붕을 봤다.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무슨 말로 또 이 죽음을 설명해야 하나. 생각이 많아졌다. 혹시 모를 일이라며 챙겨온 키보드로 동료의 죽음을 알리는 보도자료 초안을 쓸 줄이야. 애써 담담하게 사실만 알렸다. 26번째 희생자 창원지회 박아무개 조합원에겐 우리가 굴뚝을 내려가면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곳으로 마음에 담아뒀다. 그동안의 고통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70미터 굴뚝 위에서 내려다 본 쌍용차 공장. 이창근 제공
10시간 만에 1만4천장 모은 탄원서 굴뚝에 오른 첫날, 굴뚝이 바라보이는 맞은편에 천막을 설치하려던 우리 간부 둘을 경찰이 연행했다. 기어코 구속 영장까지 청구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사람의 온기와 연대라는 구체적 힘이 있었다. 10시간 정도 받은 탄원서는 1만4천장이나 되었고 재판장 앞엔 커다란 캐리어에 실려 전달될 정도였다. 뜨겁게 화답하고 강하게 밀어주는 든든한 벽이 우리에겐, 여전히 있었던 것이다. 굴뚝의 일상은 생각보다 단조롭지 않다. 시간이 끊겨 지날 때가 있으며 굴뚝이 요란하게 요동칠 때도 있다. 바람은 생각에 부채질을 하고 눈은 외로움을 감싼다. 겨울비는 우리를 생쥐 꼴로 만들기도 하고 우리보다 먼저 얼고 있는 보온병은 야속하기만 했다. 1분1초가 싸움이며 전쟁이다. 굴뚝 아래서 손 흔들어주는 동료가 있을 땐 뛸 듯이 기쁘고, 싸늘하게 지나가는 숙인 고개를 보면 또 한번 무너지기도 한다. 동료들 곁에 번듯하게 서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고 우리 정말 잘 싸워서 이겼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용납하지 않았다. 6년 동안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우리는 동료 곁에 섰다. 높이 70미터의 굴뚝은 달리 보면 동료 곁 70미터이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서고 싶었겠는가. 더 반듯하고 번듯하게 여봐란듯이 당당하게 서고 싶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쌍용차라는 고향에 왔을까. 성한 곳 하나 없는 몸뚱어리로 왜 우리는 굳이 고향을 찾았을까. 기댈 곳이 이곳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존심은 이미 버렸다. 자존심이 죽어나가는 동료를 살릴 수 없었다. 그 참혹함을 알량한 자존심과 감히 견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몰골로 이 처참한 옷가지로 이 차가운 굴뚝에 올라 우리를 봐달라는, 우리 손을 잡아달라는 호소를 하고 있다. 굴뚝에 오른 지 6일째를 맞고 있다. 차가운 날씨는 견디면 되고, 내리는 비는 부는 바람에 맡겨 말리면 되고, 쏟아지는 눈은 눈사람을 만들어 벗삼으면 된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바라는 건 공장 안 동료들의 따뜻한 시선이며 악수다. 이젠 이 지긋지긋한 쌍용차 문제를 풀자고 공장 안 동료들이 나서줬으면 좋겠다. 정리해고로 인해 공장 안팎이 무간지옥의 6년이었다. 이제 새 길을 쌍용차 구성원이 함께 만들자는 말을 이제 우리 스스로가 했으면 좋겠다. 마음이 동한다면, 결코 어려운 일 아니다. 이 바람이 꼭 실현되길 바란다. 굴뚝은 우리들의 고향이다. 기대고 싶고 응석 부리고 싶고 하소연하고 싶다. 공장 안 동료들에게 손을 내민다. 쌍용차 문제의 매듭을 함께 풀어보자고. 이창근 쌍용차 해고노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