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m 굴뚝 위에서 손을 내밉니다, 부디 잡아주시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왼쪽)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지난 13일 경기 평택시 쌍용차 공장 70미터 높이의 굴뚝 위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평택/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
[토요판] 르포
이창근의 평택공장 굴뚝 일기
▶ 쌍용차 해고노동자 두명이 지난 12일 밤 자동차 공장의 70미터 굴뚝 위에 올랐습니다.
쌍용차는 15일 보도자료를 내어 “회사에 무단으로 침입해 주요 시설물을 불법점유하는 극단적이고 비상식적인 행위에 우려를 넘어
분노를 금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18일 경기도 평택 지역은 영하 10도를 찍었고, 대선 2주년이자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이 나온
19일엔 굴뚝에 오른 이창근씨가 생일을 맞았습니다. 그는 왜 굴뚝에서 생일을 맞은 걸까요. 그가 보내온 편지를 공개합니다.
쌍용차 정리해고 무효소송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있기 하루 전인 11월12일, 지금 70미터 굴뚝에 함께 올라와 있는 김정욱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사무국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 재판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현수막
맞추고 기자회견하면 되죠”라고 답했다. 그러고서 왠지 마음에 걸렸다. 고등법원 때처럼 대법원에서도 ‘정리해고 무효’ 판결이 나올
거라 기대했지만, 혹시나 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기대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준비한 현수막을 어떻게 해야 하나. 호들갑이 결과를
바꾸지 않지만, 결과에 대한 아픔은 배가시키는 법이다. 살아오면서 체득한 경험치다. 그래서 말을 바꿨다. “그냥 우리 동료들
이름 적은 종이만 준비하죠.” 그래서 A4 용지에 동료들의 이름 석자를 인쇄했다.
대법원 선고가 있는 날 아침, 바람은 차가웠다. 수능날이기도 했고, 전태일 열사의 기일이기도 했다. 쌍용차 정리해고 6년의
다툼이 법적으로 완결점을 향해 치닫는 순간이었다. 법정은 바늘 하나 세울 곳 없이 가득 찼다. 쌍용차뿐 아니라 이 시대 억울한
이들의 발걸음이었다. 심호흡을 여러 번 했으나,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옆에 나란히 앉은 기자들도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사건번호를 부르고 판결을 내렸다. 기각이 대부분이었다. 아니 모두 기각되고 있었다. 우리 사건은 맨 나중이었다. 제발 저 쓸려가듯
지나가는 기각 파도에 우리 사건도 기각되기를 초초하게 기도했다. 회사가 고등법원의 ‘해고무효’ 판결을 불복해 상고한 사건을
대법원이 기각하면 ‘정리해고 무효’가 확정된다. 마침내 우리 사건번호가 불렸다.
“파기환송!” 쌍용차 정리해고 고등법원 판결문이 찢어지는 순간이었다. 생각할 틈도 없이 아득했다. 일어서 나오는데 김득중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화장실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밖에선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간단하게 상황 설명을 하고 걸어
나왔다. 플래시가 터지고 질문이 날아들었다. 지부장은 평소답지 않게 둔해 보였다. 김정욱 사무국장은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고,
고스란히 카메라 렌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변인인 나는 어떤 이야기를 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우리는
어떤 다짐을 했고 어떤 종류의 결심을 전했다. 그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망치고 싶었고 시간을 그저 멈추고 싶었다.
13일 오전 굴뚝 위에서 직접 찍어 보낸 사진에서는 이 실장(왼쪽)과 김 사무국장이 두꺼운 점퍼를 입고 나란히 서 있다. 평택/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
고법 판결을 대법원이 뒤집자
다가올 시간이 무서웠다
또 동료들은 쓰러지고
상갓집을 드나들어야 하나 울타리 넘고 감시카메라 피해
5시간 만에 공장 굴뚝에 올랐다
차가운 날씨는 견디면 되고,
눈비는 바람에 말리면 된다
부디 내미는 이 손을 잡아주길 굴뚝 위에서 쓴 보도자료 공장 굴뚝은 70미터가 넘었다. 굴뚝 아래는 철문이 있는데 용접이 된 것 같았다. 아차 싶었다. 용접은 생각지도 못했다. 불안한 마음에 문을 흔들었더니 다행히 틈이 보였다. 용접된 곳이 떨어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갔다. 녹슨 계단이 보였다. 35미터 정도의 굴뚝 중간까지는 평범한 계단으로 되어 있었다. 새벽 시간이라 눈은 얼기 시작했고 가끔씩 미끄러지기도 했다. 시각은 새벽 2시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는 굴뚝 중간 지점까지 도착했다. 떨리고 흥분됐다. 드디어 성공을 예감했다. 그러나 손에는 힘이 없고 다리는 이미 풀려 있었다. 고개를 들어 공장 굴뚝을 쳐다봤다. 순간 저곳은 따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쉴 새 없이 올랐다. 김정욱 사무국장이 먼저 올랐다. 짐이 무거워 지고 올라가기에 여간 버거운 게 아니었다. 철계단은 중간중간에 볼트가 플려 있고, 바람에 흔들렸다. 먼저 오른 정욱 형이 다시 내려와 짐을 나눠 들었다. 그래도 무거웠다. 바닥엔 여전히 짐 하나를 남겨 놓은 채 우리 둘은 한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겨우 굴뚝에 올랐지만, 다시 짐을 가지러 내려가야 했다. 정욱 형이 선뜻 내려가겠다고 했다. 고마웠고 미안했다. 체력 하나는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6년간 체력 소모가 많았던 모양이다. 시간은 새벽 4시가 조금 넘었다. 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굴뚝에 도착했다는 말을 전했다. 드디어 정욱 형도 굴뚝에 올라섰다.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았다. 새벽 4시10분. 완전히 굴뚝에 안착했다. 오전 6시가 조금 넘자 쌍용차 굴뚝에 오른 사실이 이곳저곳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회사는 그제야 상황을 알았는지 굴뚝 아래로 경비대가 집결했다. 몇몇이 굴뚝 중간 지점까지 올라왔고, 몇몇은 우리가 있는 굴뚝 1미터 부근까지 올라왔다. 어떻게 올라왔는지 확인을 하겠다는 거였다. 긴장이 풀리지 않아 모든 것이 민감했고 올라오는 경비를 향해 올라오지 말라고 소리치고 욕도 했다. 아침 9시가 넘어가자 상황이 안정됐다. 이곳저곳에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오전 6시께, 몇몇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런데 전화기를 들자 설움이 북받쳤다. 굴뚝을 감싸고 도는 무겁고 차가운 바람이 서러웠다. 울기도 하고 하소연도 했다. 조금 더 강단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생각했다. 공장 굴뚝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고민하고 두려움에 떨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동료들이 픽픽 쓰러져 죽어나갈 때 우리는 또 얼마나 무력했는지 말하고 싶었다. 굴뚝에 오르는 순간 백척간두 진일보(높은 장대 위에서 한발짝 나아감)의 마음으로 올랐다는 얘길 하고 싶었고, 반드시 승리해서 내려가겠다는 말을 우선 하려고 했는데,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도와주십시오.’ 이 한마디였다. 이 말을 이곳에서 한다는 것이 서럽고 비참했다. 굴뚝에 올라 잠잘 시간도 없이 긴장하며 첫날 저녁을 맞았다. 간이 1인용 텐트를 치고 대충 바람과 비를 가렸다. 바람은 생각보다 강했고, 눈 또한 땅 위보다 거세게 내렸다. 첫날 저녁 8시를 넘기자 연락이 왔다. 26번째 쌍용차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난 긴장했다. 옆에 있는 정욱 형 얼굴을 보고 멀리 공장 지붕을 봤다.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무슨 말로 또 이 죽음을 설명해야 하나. 생각이 많아졌다. 혹시 모를 일이라며 챙겨온 키보드로 동료의 죽음을 알리는 보도자료 초안을 쓸 줄이야. 애써 담담하게 사실만 알렸다. 26번째 희생자 창원지회 박아무개 조합원에겐 우리가 굴뚝을 내려가면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곳으로 마음에 담아뒀다. 그동안의 고통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70미터 굴뚝 위에서 내려다 본 쌍용차 공장.
이창근 제공
|
'쌍용차 노동자들의 투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해고자의 6년, 렛잇비에서 사랑의 배터리로[인터뷰] 70미터 굴뚝 오른 쌍용차 해고자 이창근 노조기획실장 (0) | 2014.12.24 |
---|---|
[스크랩] 체감 온도 영하 20도, 흔들리는 굴뚝 위에 선 사람들-이창근 (0) | 2014.12.22 |
다시, 하늘에 사람…'허공'에 선 쌍용차 해고자들 [현장] "그토록 닿고 싶던 일터인데…15년 일한 공장, 이제 보입니다" (0) | 2014.12.17 |
쌍용차 해고자, 또 사망... 벌써 26번째 2009년 창원공장 해고자 박아무개씨, 병마와 싸우다 13일 숨 거둬 (0) | 2014.12.16 |
다시 굴뚝에 오른 날, 해고노동자가 또 숨졌다 (0) | 2014.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