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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경은 문익환 목사의 죽음을 왜곡 말라 [2012.07.16 제919호]

참된 2014. 12. 3. 03:14
하태경은 문익환 목사의 죽음을 왜곡 말라 [2012.07.16 제919호]   한겨레 21

[줌인]
범민련과 사이에 오간 편지를 왜곡해 “김일성이 프락치로 지목한 것에 충격받아 사망”이라 주장
문 목사의 꿈은 6·15 공동선언 바탕이 되어 현재진행 중





   싸이월드 공감  


김창수 통일맞이 정책실장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여기서 과거란 사실과 자료에 입각한 과거다. 흔히 말하는 ‘팩트’(fact)다.

북한이 문익환 목사를 프락치로 지목한 팩스를 보냈고, 이것이 문익환 목사 사망의 원인이라는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의 주장은 팩트에 충실한 것인가? 문익환 목사가 사망한 지 18년이 되었는데 하태경 의원 때문에 그의 사인이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하태경 의원의 주장은 팩트에 충실하지 않다. 많은 경우 팩트에 충실하지 않으면 왜곡이 된다.



» 1989년 3월 27일 평양 주석궁에서 문익환(오른쪽) 목사가 김일성 주석에게 서울에서 가져간 (한길사 펴냄)을 전하며 ‘남북한 통일 사전’ 편찬을 제안하고 있다. 왼쪽 뒤에 서 있는 유원호씨는 그 뜻을 이어 저자 박용수씨의 후원자로 나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한겨레 자료



책에서 밝히고 언론이 수차례 인용

하태경 의원은 지난해 9월 <민주주의는 국경이 없다>는 책을 냈다.

“하루는 범민련 북측본부에서 팩스가 왔다. 범민련 북측본부 백인준 의장 명의로 날아온 그 팩스에는 ‘문익환 목사는 안기부 프락치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사실상 김일성의 최종 승인이 없이는 날아올 수 없는 팩스였다.(…) 결국 문 목사는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94년 1월18일 돌아가시고 말았다.”


하태경 의원이 그의 저서에서 밝힌 이 내용은 그동안 수차례 언론에 인용되었다. 하태경 의원 스스로도 총선 출마를 전후해 <조선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를 비롯해 진보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터뷰를 하며 이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가 전향(?)한 것도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대문짝만하게 보도된 많은 언론 인터뷰 때문에 그의 말이 사실로 받아들여질까 염려스럽다. 하태경 의원의 발언이 사실 왜곡의 씨앗이지만 언론을 통해 잘못된 사실들이 확산되고 있다. 자칫 “99가지의 거짓과 1개의 진실을 섞으면 100%의 거짓보다 더 큰 효과를 낸다”는 나치의 선동 천재 괴벨스의 말이 통용되는 사회가 돼버릴 수 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당시 북한은 ‘문 목사의 노선을 거부하라’는 지령과 함께 범민련 남측본부 백인준 의장 명의로 ‘문익환 목사는 안기부의 프락치’라는 팩스를 보냈고, 주사파들은 이 팩스를 전국에 전파했다.”(‘NL 핵심서 전향한 운동권 출신 탈북자 만난 후 북한 고발자로’, <주간조선> 2202호, 2012년 4월16일)

“내 입장이 크게 바뀐 계기는 문익환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일 때문이다. 북한이 ‘범민련’(조국통일범민족연합)을 해체하려 한 문 목사를 안기부 프락치로 몰았다.”(<오마이뉴스> 당선자 인터뷰, 2012년 5월11일)

하태경 의원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백인준 의장 명의로 보내온 A4용지 한 장 분량의 팩스는 범민련 해외본부 임민식 사무총장이 남측본부로 보낸 형식으로, 범민련 남측준비위원회가 들어가 있던 재야단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일명 민자통) 서울 종로5가 사무실로 전달됐다고 한다. 하 의원은 “북한은 팩스에서 문 목사를 범민련 해체라는 반통일 행위를 주장하는 안기부 프락치로 모는 파렴치한 행위를 했다.”(‘죽음 몰고 간 북한의 팩스 주사파가 뿌려 NL 분파 계기로’, <주간조선> 2210호, 2012년 6월11일)

“문 목사가 김일성에게 ‘범민련 해체하고 통일운동을 위해 더 크게 태어나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바로 다음날 답신이 왔다.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인 백인준 명의였다. ‘문익환은 안기부의 프락치, 안기부의 사주를 받아 범민련을 해체하려는 책동을 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최보식이 만난 사람 ‘임수경에게 변절자로 지목된,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 <조선일보> 인터넷판, 2012년 6월11일)

‘프락치’ 운운은 유럽 범민련에서 온 팩스

“문 목사의 편지에 대한 답신이 비록 백인준 명의로 왔지만 북 체제의 특성상 김일성에게 보고됐을 거라고 목사님은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후에 황장엽 선생을 통해 안 일은, 문 목사님이 편지를 보냈던 1994년 당시는 모든 보고가 김정일을 통했다고 하더군요.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불필요한 건 보고를 안 했다고 하고요. 그렇다면 문 목사님에게 온 답신은 김일성이 아니라 김정일의 뜻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문 목사님이 돌아가신 것은 김정일 때문이라고 봅니다.”(하태경 의원 인터뷰, <문화일보> 인터넷판 2012년 6월15일)



» 문익환 목사는 통일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1994년 1월18일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뒀다. 그해 1월22일 ‘겨레장’으로 치른 문 목사의 장례식 행렬이 서울 종로 대학로에서 노제를 마친 뒤 장지인 경기도 남양주군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하태경 의원은 몇 가지 사실을 섞어서 문익환 목사는 김정일 때문에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우선 몇 가지 사실관계만 순서대로 정렬해보자.

1993년 12월10일,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인 북한의 백인준 의장이 문익환 목사 앞으로 팩스를 이용한 장문의 편지를 보낸다(편지1). 백인준 의장이 문익환 목사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문익환 목사가 1993년 범민련 남측본부를 탈퇴했기 때문이다.

문익환 목사가 1989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이 편지에서 백인준 의장은 문익환 목사에 대한 그리움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진정의 고백”이라고 말한다.

백인준 의장은 편지를 통해 범민련 탈퇴를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다. 통일운동은 남북·해외가 공동 보조를 맞춰야 하는 것인데 남한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위해 범민련을 탈퇴하는 것은 남한의 지역운동이지 통일운동이 아니라는 게 백인준 의장이 편지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이 편지 어느 대목에도 ‘문익환은 안기부 프락치’라는 저급한 표현은 없다.

문익환 목사는 백인준 의장에게 보낸 답장에서 범민련 활동의 ‘합법성’을 얻으려고 “범민련 남측준비위원회는 출범과 함께 대결하는 관계에서 대화하는 관계”로 정부 당국과 관계를 설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고 이는 ‘범민련 한계’라고 지적했다(편지2).

백인준 의장과 문익환 목사가 주고받은 편지가 공개되자 문익환 목사가 제안한 ‘새로운 통일운동체’(이하 ‘새통체’) 결성에 대한 찬반 논란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문익환 목사가 김영삼 정부에 회유당했다는 음해까지 나돌기 시작했다. 새통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배후에 안기부 프락치가 있다는 소문이 나돈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프락치로 공공연하게 거론되었던 사람 가운데는 문익환 목사와 조성우(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공동의장)씨가 있었다.

범민련을 탈퇴한 문익환 목사는 1994년 1월17일 밤에 범민련 북측본부 백인준 의장, 범민련 해외본부 윤이상 의장, 범민련 남측본부 강희남 준비위원장을 공동 수신인으로 한 편지를 작성해 1월18일 아침에 발송한다(편지3).

문익환 목사는 이 편지에서 “7천만 겨레의 통일 의지를 담아낼 틀을 다시 짜고, (남북·해외) 세 지역의 통일운동이 한 흐름이 될 수 있는 길 또한 진지하게 모색”해야 한다며 이에 대한 답신을 요청했다.

문익환 목사가 이 편지를 보낼 즈음 유럽 범민련에서 ‘새로운 통일운동체 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프락치가 있다’고 매도하는 충격적인 팩스가 날아온다(편지4).

마지막 시 “나는 겨레의 허기꾼 역사에 묻혀야”

문익환 목사는 유럽 범민련에서 날아온 팩스를 받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점심때 자신을 프락치라고 매도하는 편에 서 있는 사람을 만나 “내가 스파이야, 스파이야?”라고 큰 노여움을 표출했다. 그날 저녁 문익환 목사는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하태경 의원은 이 4개의 편지를 뒤섞어 ‘문익환이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김정일의 뜻을 담아 범민련 북측본부의 백인준 이 ‘문익환은 안기부 프락치다’라는 답장을 보냈고 이에 충격을 받은 문익환이 사망했다’는 가공의 사실을 만들어냈다.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에게 편지를 보낸 적이 없고, 범민련 북측본부의 백인준 의장이 ‘문익환은 안기부 프락치다’라는 답장을 보낸 적이 없다.

문익환 목사가 제기한 새로운 통일운동에 대한 논의 과정에서 국내에서는 문 목사가 프락치라는 논란이 있었고, 이런 논란은 범민련 해외본부 활동이 활발했던 일본과 유럽에서도 벌어졌다. 그 소동 속에서 유럽 범민련의 강경 교조주의자들이 새통체를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 프락치가 있다는 팩스를 보낸 것이 이른바 프락치 파동의 절정이었다. ‘김정일의 뜻’에 따라 북한 ‘백인준’이 ‘문익환은 프락치다’라는 팩스를 보냈다는 하태경 의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팩트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유럽 범민련에서 팩스가 왔다는 것에 대해서는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정경모씨도 증언하고 있다. 평론가 김형수씨는 <문익환 평전>에서 ‘범민련 해외본부’에서 문제의 팩스가 왔다고 기술하고 있다. ‘문익환의 통일론과 통일운동에 대한 연구’(이유나, 성균관대 사학과)라는 박사 논문에서도 마찬가지로 팩스 발신지는 범민련 해외본부라고 기술하고 있다.

하태경 의원의 주장은 팩트가 아니다. 문익환 목사의 죽음은 그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새통체 준비위원장이던 박순경 교수는 문 목사 1주기 추모사에서 “운동권의 분열의 멍에를 짊어지고 목사님은 대속적인 죽음을 생각하였습니다”라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문익환 목사는 1977년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며 ‘마지막 시’를 썼다.

“나는 죽는다/ 나는 이 겨레의 허기꾼 역사에 묻혀야 한다/ 두 동강 난 이 땅에 묻히기 전에/ 나의 스승은 죽어서 산다고 그러셨지(후략).”

문익환 목사의 죽음을 왜곡하지 말고 그를 죽어서 살게 하라. 문익환 목사는 1993년 감옥에서 출감한 뒤 논쟁의 한복판에서 프락치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새로운 통일운동’을 제안했다. 문익환 목사를 죽어서 살게 하는 것은 그가 새로운 통일운동을 제안한 이유를 현재 시점에서 계승·발전시키는 것이다.

문익환 목사는 1989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에게 연방제를 점차적으로 하자고 제안해 동의를 받아낸다. 북한은 나중에 이를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고 불렀는데, 이는 연방제를 수정한 것으로 한국 정부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문 목사의 방북 이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통일 방안으로 ‘남북연합’을 발표했다(1989년 9월11일).

시대와 불화한 선구적 주장

문익환 목사는 1993년 출소 이후 범민련을 비롯한 재야단체들의 생각과 달리 국가연합을 주장했다. 문익환 목사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와 ‘국가연합’의 공통성을 간파했던 것이다. 아울러 문익환 목사는 반정부 투쟁이라는 시대적 분위기가 압도하던 당시에 남북 정부 당국의 역할을 인정하자는 주장을 하고 김영삼 대통령에게 범민족대회 초청장을 보내기도 했다. 이런 그의 선구적 주장이 시대와 불화해 그를 논쟁의 중심에 세웠다. 이 와중에 그를 프락치라고 비난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의 주장은 2000년 6·15 공동선언에서 남북 두 정상이 남북 통일 방안의 공통성을 인정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역사는 어떤 편리에 의해 끌어당겨져도 가볍게 움직이지 않는다. 역사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누적이다. 그래서 문익환 목사는 “역사는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문익환 목사가 주창한 대중적 통일운동, 남북연합, 통일 준비는 오늘날 백낙청 교수가 주장하는 ‘2013년 체제 만들기’의 핵심이다. 문익환 목사의 꿈은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