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문학

치열한 노동의 흔적, 그게 곧 시였네

참된 2014. 11. 19. 02:09

치열한 노동의 흔적, 그게 곧 시였네

등록 : 2014.11.05 19:02 수정 : 2014.11.05 21:15    한겨레

 

 

노동자 시인동인 ‘일과시’

각자 생업 때문에 전국에 흩어져 사는 ‘일과시’ 동인 10명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이한주, 손상렬, 조태진, 송경동, 김명환, 김해화, 서정홍, 김용만, 문동만, 김해자 시인.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저녁 8시30분께 오산역 역무원으로 근무하는 이한주 시인이 도착하면서 10명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달 31일 서울 마포의 음식점 두리반에서 열린 ‘일과시’ 동인 시집 <못난 시인>(실천문학사) 출판기념회였다.

노동자 시인들로 이루어진 동인 ‘일과시’는 1993년 제1집 <햇살은 누구에게나 따스히 내리지 않았다>에서부터 2005년 제8집 <저 많은 꽃등들>에 이르기까지 짧게는 1년 간격으로, 길어야 3년 터울이 넘지 않게 꾸준히 동인집을 펴냈지만 8집 이후로는 쉽사리 뭉칠 염을 내지 못했다. “시보다 사는 게 더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조태진 시인은 설명했다. 동인으로서 활동을 하지 못하느니 아예 해산하자는 말이 나왔고, 해산 논의를 하자고 모인 자리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다시 시작하자’고 뜻을 모았다.

“시를 쓴다/ 종일 서서 나는 시를 쓴다/ 일 년 열두 달/ 목장갑 까뒤집어 땀을 닦고/ 손 비비며/ 망치 움켜쥐고 시를 쓴다// 책상도 없이/ 종이도 없이/ 종일 서서 시를 쓴다// 몸뚱이에 시를 쓴다”(김용만 <날마다 시를 쓴다> 전문)

부산 쪽에서 철제 간판과 광고물 제작 일을 하는 김용만 시인.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친동생이기도 한 그는 환갑을 2년 앞두고 있지만 아직 개인 시집이 없다. 이번 동인집 표제작이 된 <못난 시인>에서 그가 “시인들아/ 우리 집에 책 보내지 마라/ 부부 쌈 난다”고 쓴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날마다 시를 쓴다>에서 보듯 그가 시를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책상도 종이도 없이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지만 그에게는 목장갑과 망치와 땀이, 그러니까 노동이 곧 시가 되는 것.

“서로 사는 게 힘들어” 못 뭉치다
9년만에 결집 ‘못난 시인’ 발표
내 삶에서 길어올린 시라 친근”

“아름다운 적 없었으니/ 아름다운 세상에 쓸모없이 짧은 토막/ 짧게 쓰겠어// 날 선/칼/ 한 자루”(김해화 <철근살이> 부분)

1981년부터 노동을 시작했고 1984년 실천문학사의 14인 신인작품집 <시여 무기여>로 등단한 뒤 <인부수첩> <우리들의 사랑가> 등 시집 네권을 펴낸 김해화 시인. 그 역시 환갑을 세해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전남 영암 삼호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철근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지금 하는 일이 12월이면 끝나는데 그 다음엔 어디로 갈지 막막하지만, 세상이 뭐라 하든 철근만 바라보고 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은 있다”고 했다.

“한 살이 모자랐다/ 키로 나이를 먹는 거라면/ 까치발만 해도 거뜬할 텐데/ 서른이 안 됐다고/ 난 일과시 창립 동인이 되지 못했다/ 저들은 나이로 시를 쓰는가/ 일과시 재수를 하면서/ 결혼을 하고/ 철도노동자가 되어/ 스물아홉 시인의 투쟁보다/ 서른 노동자의 잔업이 아름답다고/ 철길 곳곳에 시를 뿌리고 다녔다”(이한주 <일과시> 부분)

1965년생으로 제2집 <아득한 밥의 쓰라림>(1995년)부터 동참한 이한주 시인은 이 동인에서는 ‘어린’ 축에 속한다. 50년대생이 넷이고 1969년생 ‘막내’ 문동만 시인까지 60년대생 여섯으로 이루어진 이 늙다리 동인에게 노동시의 유효성과 지속성 여부가 가장 큰 고민이 되는 까닭이다. 1989년 <노동해방문학> 창간호로 등단했으며 선원, 공사판 잡부, 플랜트 배관 조공, 프레스공 등을 거쳐 지금은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조태진 시인은 “시보다 일을 앞세운 동인 이름에서 보듯 그제나 이제나 문학보다는 사는 게 먼저”라고 했다. 반면 국내 굴지 엘리베이터 회사의 정비공인 문동만 시인은 “노동문학이라는 틀이 오히려 동인을 고립시킬 수 있다. 주장만 높일 게 아니라 문학적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싱사 출신 홍일점 김해자 시인이 두사람의 말을 받았다. “요즘 시가 너무 어렵고 자폐적이라는 느낌을 주는데,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읽는 이들로 하여금 ‘나도 내 삶에서 길어올린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친근감과 자신감을 줄 수 있을 거예요.”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동인은 아니지만 역시 노동과 시 쓰기를 병행하는 최종천·임성용 시인과 2년 전부터 공장 노동자 생활을 다시 시작한 소설가 이인휘 그리고 김남일·박철·정우영 등 노동문학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동료 문인들이 늦게까지 자리를 함께하며 ‘일과시’ 동인의 9년 만의 결집을 축하했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