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문학

[백(白)형제의 문인보](15) 시인 송경동

참된 2014. 9. 24. 01:00

[백(白)형제의 문인보](15) 시인 송경동

글 백가흠 | 소설가·사진 백다흠 | 은행나무 편집자
입력 : 2014-07-04 21:02:01수정 : 2014-07-04 21:03:38     경향신문
ㆍ문학이라는 양심의 다른 이름

시인 송경동, 그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곳은 저 멀리에 있지 않다. 그는 항상 우리 주변에 서 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거대한 자본에 맞서 싸우는 곳, 직장에서, 살던 곳에서 거리로 내몰려 고통당하는 현장 어디에든 당사자와 함께 서 있다. 그는 도시의 한복판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옆에 있는 그를 만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있을까.

시인의 음성을 듣는 것은 쉬운 일이다. 작은 소리도 들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주변에서 간절하게 우리를 부르고 있다. 하늘과 맞닿은 빌딩에 가려 햇빛 간절한 그늘진 곳에서 그는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단 한번만이라도 힘없는 노동자 농민, 개발과 철거로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에게 고개 돌려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아니다, 그를 만날 수 있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우리 주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와 가까이 있지만 실제는 그에게서 멀어지고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우리의 일이 아니거나 상관없거나 그저 남의 일이므로 우주 밖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음이다. 그가 독특하고 특별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더 욕심이 크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내면의 고백에 함몰되어 있는 지금의 시나 소설적 풍경 안에서 노동, 현장을 옮겨놓은 그의 시는 울림이 크다. 문학이 땅에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 사회와 개인 사이에는 부조리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점점 하늘로 승천하는 가상의 세계에 몰입되어 있는 우리의 시나 소설과는 달리, 그는 저 멀리 달아나려 애쓰는 문학을 가장 낮은 곳에서 ‘타인의 고통’의 땅으로 끌어내린다. 그의 시는 상상력이나 갈망에 있지 않으며 실제이며 현재이다. 그리하여 드물고 귀하고 귀한 시이다. 그래서 그는 문학하는 후배들이나 동료에게 양심의 다른 이름이다. 그를 떠올리면 마음속에 부채감이 인다. 하지만 그가 더 이상 특별한 이름의 시인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가 송경동이면서 ‘왜 쓰는가?’하는 문학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는 날이 오긴 올는지.

그를 처음 본 곳은 용산참사 현장이다. 참혹하고 슬픈 현장에 그는 함께하고 있었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고 시키지도 않은 일이었다. 누구나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리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기껏해야 하루 손팻말을 들고 서 있거나, 저서 몇 권을 들고 나가 사인을 해서 나누어주는 나 같은 부류와는 달랐다. 그는 매번 전부를 바쳤다. 그것이 시이고 문학이라는 것을 그는 몸으로 증명했다.

그는 많이 아프다. 현장 여기저기에서 다치고 제때 치료하지 못해서 불편한 곳이 많다. 그를 몇 년 전 원주토지문화관에서 만난 적이 있다. 용산참사 이후 그는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다. 지인들이 조금이라도 쉬라고 그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그는 평생 처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본다고 했다. 어떻게 쉬어야 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는 밥을 먹고 근사한 작업실에서 지내는 것이 무엇엔가 죄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책만 보면서 밥만 얻어먹고 졸리면 자도 괜찮은지 모르겠어.”

그래도 된다고 말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시인이었지만 우리가 잘 아는 시인스러운(?) 한량의 지극한 삶을, 겨우 단 한 달 살아보는 것도 힘들어 했다.

“아무 일도 안 하고 밥 먹고 사니까 참 좋다. 가난한 노동자 농민들도 이렇게 한 달씩 살게 하면 참 좋을 텐데. 평생은 바라지도 않아. 한 달 동안 이렇게 근사한 곳에서 밥 먹여주고 책도 보게 하면서 인생에 휴가를 주면 얼마나 좋을까. 국가나 기업이 마음만 먹으면 그럴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평생 단 며칠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어본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근데 며칠을 이렇게 지내보니 참 좋아. 나만 좋으니 나는 또 왜 이렇게 미안하고 죄스럽냐.”

그는 온통 밖의 일에 대한 걱정밖에 없었다. ‘현장에 가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같이 지낸 한 달이 안되는 시간, 가끔 밥그릇에 소주를 부어 마시며 뜨거운 여름을 향해 영글어가는 옥수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가만히 숨 쉬고, 아무 일 하지 않고 누워 책을 보는 시간이 죄스러워 그는 가끔 울었다. 그는 자주 남이 불쌍해서 울었고, 남이 처한 일이 억울해서 울었고, 가난한 사람들을 탄압하는 국가와 자본에 분노하며 눈물을 삼켰다. 그저 나는 그의 밥그릇에 소주나 가득 따라주었다. 이렇게 맑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선배라는 게, 시인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하지만 언제나 잠깐, 그뿐이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리만치 그는 성한 몸이 아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는 공권력에 의해 혹은 자본이 동원한 용역에 의해 갈비뼈가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목을 다쳤지만 몸을 사리지 않았다. 자기 몸처럼 지키기 쉬운 것이 없건만 그는 몸뚱이가 전부니까 전부를 바쳤다.

그는 가끔 내게 동지라고 불렀는데, 때마다 나는 그게 또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어쩔 바를 몰랐다. 가끔씩 시간이 쌓여서 그런가, 최근 강남역 시위현장에서 만난 그는 내게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이름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동지라는 게 동지라고 불러서 동지가 되는 게 아닌 것을. 몸이 같은 뜻을 향해 같이 움직일 때, 동지도 되고 동생도 된다는 것, 그저 나는 말뿐인 다짐만 또 했다.

얼마 전 세월호 참사 촛불집회에서 방송버스 위에 올라서서 참가자들을 인도하던 그를 경찰이 연행했다. 그 과정에서 갈비뼈에 금이 갔고 아픈 다리는 더 안 좋아졌고 목도 다쳤다.

“허구한 날 이렇지 뭐. 안 다쳤으면 이번에 구속시켰을지도 몰라. 갈비뼈가 나를 구한 거지. 하나님이 왜 갈비뼈로 사람을 만들었는지, 그 중요함을 알게 됐다니까. 그나저나 다친 거보다도 아끼던 지팡이를 해먹어서, 그게 아까워.”

들었던 말이 생각나서 그에게 주려고 나무지팡이를 하나 샀다. 1만5000원 주고 산 중국산 나무지팡이를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닌 지 몇 주가 지났다. 그를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아니다, 그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나와 멀리 있지 않지만, 나는 그와 멀찍이 떨어져 있다. 부채감이 느는 까닭이다.

 

▲ 시인 송경동

1967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다. 2001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구로노동자문학회와 전국노동자문학연대에서 활동했다. 시집 <꿀잠>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를 냈으며, 제12회 천상병시문학상과 제6회 김진균상, 제29회 신동엽창작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