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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 교사 아들로 태어나 4·19의 충격을 맛보고 무기수가 되기까지…올해 교수 정년을 맞는 그에게 한국 현대사와 통혁당 사건의 내막을 듣는다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은근과 끈기의 민족이 어느새 ‘빨리빨리’를 입에 달고 살게 될 정도로 숨가쁘게 달려온 세월, 사색이니 성찰이니 하는 것은 모두 사치스러운 장식물이었는지 모른다. 군사독재 정권이 앞을 내다보고 역할분담을 시켜놓은 것이라고나 해둘까? 밖에서 쫓기듯이 바쁘게 사는 동안 바깥사람들이 꿈꾸지 못할 차분한 사색과 깊은 성찰을 바깥사람 몫까지 대신해야 했던 분이 있다. 1988년 세상이 조금 좋아진 뒤, <평화신문>에 그의 사색의 편린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징역은 나오는 맛에 산다는 말을 위로로 건네기에는 너무 긴 20년 세월을 뒤로하고서. 20대의 청년 시절인 1968년 생일에 잡혀간 그는 꼭 20년 세월을 보내고 1988년 생일날 석방됐다. 그리고 20년 가까운 세월이 또 흘러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우리에게 친근한 신영복 교수가 올해 정년을 맞는다.
장래 희망은 조선인 총독?
선생님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나는 동료 교수들과 더불어 조그만 기념문집을 만들기로 했는데, 거기서 한국 현대사 속에서 선생님의 삶을 정리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서 자주 뵙는 사이에 정색하고 마주 앉아 인터뷰하는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자리를 마련했다. 선생님께서 기억하기 싫어하는 부분도 캐물어야 하는 곤란한 순간도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살아내신 한국 현대사를 가까이서 듣는 소중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최근 한명숙 총리의 지명을 계기로 그의 부군인 박성준 교수의 전력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신영복 교수는 통혁당 사건에서 박성준 교수의 ‘상부선’이기도 했다. 신영복은 1941년 경상남도에서 태어났다. 고향은 밀양이지만, 출생지는 의령이었다. 아버지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경상북도에서 교사로 근무했는데, 일본인 교장의 조선 학생 차별에 항의하다가 파면됐다. 몇 년 지난 뒤에 같은 경상북도는 안 되고 도를 달리해 경상남도에 정식 ‘훈도’가 아니라 ‘촉탁’으로 복직시켜주더란다. 아버지께서 교사 한 명뿐인 간이학교의 ‘교장’으로 의령에서 근무하실 때 신영복은 교장 사택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진학해 부산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어린 신영복은 교장 선생님의 아들로 밀양 등지의 사택에서 자라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유열, 이극로 등 저명한 한글학자들- 모두 월북했다- 도 드나드셨는데, 어느 분인지 모르지만, 아버지 친구들은 꼬마 신영복에게 장래희망을 물으셨다. 처음에야 이럴 때 아이들은 자기 희망을 솔직하게 얘기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른들이 바라는 ‘정답’을 말하게 되는 법. 일제 말기의 암울한 시절, 그가 가진 희망은 일본 총독이 되어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일본 총독이 뭐냐고? 조선이 독립되고 일본을 식민지로 삼게 된다면 일본을 다스리는 조선인 총독이 된다는 얘기다. 해직교사였던 아버지, 그리고 그의 민족주의자 친구들의 장난기 어린 조기 ‘의식화’ 교육을 받으며 신영복은 세상과 만나기 시작했다. 다섯 살 꼬마 신영복의 머리에도 해방의 그날은 기억이 또렷하다. 비가 엄청나게 온 그날, 동네 청년들은 어린 신영복을 집에서 조금 떨어진 교장 사택으로 데려가 그곳을 지키게 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 교장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집 안은 책상 서랍도 다 열려 있는 등 급히 떠난 흔적이 역력했다. 동네 청년들이 다섯 살 난 어린 신영복에게 왜 일본인 교장의 텅 빈 사택을 지키게 했는지는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아무튼 그는 적산의 접수와 보호라는 중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전쟁은 그가 열 살 때 터졌다. 그러나 밀양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지 않아 ‘인공’ 치하를 겪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전쟁의 기억은 끔찍했다. 어느 날 서북청년단원들은 좌익으로 몰린 청년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벤 뒤 철사로 귀를 꿰어 영남루 부근의 다리 양쪽으로 가로등마다 묶어놓았다는 것이다. 20여 개의 머리가 걸려 있다 보니, 여학생들은 겁에 질려 다리를 못 건너고 우는데, 어린 남학생들은 그래도 다리를 건너갔다고 한다. 신영복은 무서움 속에서도 머리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폈다. 실제로 자세히 바라보니, 피가 다 빠져 백지장처럼 하얘진 얼굴은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
신영복이 베어진 머리를 유심히 살핀 까닭은 거기에 누군가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신영복 집에 모였던 수많은 청년들, 그중에 특히 기억나는 사람이 있었다. 동네 토박이는 아니고, 떠돌이로 다니다 동네로 흘러들어와 궂은일 해주고 밥 얻어먹던 청년이었다. 토끼도 잘 잡고 팽이도 잘 만들어주던 청년, 그러나 늘 천대받던 그가 기세등등해진 모습을 보고 세상이 바뀐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이 들어오고 사라졌던 친일파들이 다시 나타난 뒤로, 신영복은 그 청년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앞장서서 친일파 집을 때려부수고, 달아난 친일파가 미군을 앞세워 돌아오면서 사라졌던 청년, 어린 마음에 사라졌던 그가 꼭 거기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너무 어려 해방과 전쟁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기억만큼은 또렷이 그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돼버렸다. 밀양군 교육감이 되신 아버지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국회의원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그는 자형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부산상고로 진학하게 되었다. 시인으로 5·16 군사반란 뒤 교원노조 운동으로 구속된 살뫼 김태홍 선생이 당시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의 권유로 한국은행 면접시험 대신 서울상대에 시험을 쳐 합격한 것이 1959년이었다.
대학에 들어간 지 꼭 1년 만에 4·19가 일어났다. 그것은 엄청난 감동이자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부정선거 다시 해라’ ‘자유당 정권 물러가라’ 정도에 약간의 민족주의적 감정이 가미된 정도였지만, 세상이 바뀐 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큰 감동이었다. 4·19에서 5·16까지 비록 1년여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푸른 하늘을 보았다는 것은, 그것을 직접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은 지금까지 그를 지탱시켜준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4·19는 그야말로 “총탄이 이마를 뚫고 지나간 혁명”이었다. 비록 독일어 원어를 교재로 썼지만, <자본론> 강독이 정식 과목으로 개설되기도 했고, 학생들은 ‘공산당 선언’ 같은 문건을 번역해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초토화된 지식 사회에 새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5·16이 왔다. 처음에는 지주 아들 윤보선과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 박정희를 대비시키기도 하고,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이야기하며 기대감을 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른바 혁명재판소 만들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등을 사형시키는 등 사태 진전을 보니 박정희는 영락없이 “권총 찬 이승만”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배후에는 미국이라는 외세가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이 4·19를 누르고 있었다. 4·19의 감동 속에 총알은 우리의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고 진보적 청년들은 생각했지만, 5·16의 현실 속에서 그들은 다시 깨달았다. 총알은 모자만 뚫고 지나갔다고! 5·16이 무너뜨린 것은 무능한 장면 정권만이 아니었다. 5·16이 진정 짓밟은 것은 4·19 이후 돋아나기 시작한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의 새싹이었다. 해방 정국에서 변혁적 운동의 복원이라는 의미의 4·19가 군부세력에 의해 짓밟힌 것이 5·16이었던 것이다. 1·2학년 때까지 가정교사 하느라 학교 공부만 따라가기 바빴던 신영복은 5·16이 일어난 3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후배들의 세미나 지도를 시작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현실에서 장기적인 학생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서울 상대에 본격적인 독서 동아리를 만들게 된다. 마오쩌둥의 ‘모순론’이나 ‘신민주주의론’ 같은 논문도 번역해서 대학노트에 베껴적어 (복사기와 컴퓨터가 없었던 시절!) 돌려읽고,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도 영문판을 구해 대학노트 4권에 깨알같이 번역해서 돌려읽곤 했는데, 나중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면서 모두 중앙정보부에 압수됐다.
통혁당 간부들은 만난 적도 없었는데…
3학년 이후, 거의 매일같이 세미나의 연속이었다. 상대 학생들로 조직된 경우회, CCC란 종교단체 산하의 경제복지회, 정읍 출신들이 모인 동학연구회 등 나중에 통혁당 사건 때 연루된 동아리들 외에도, 고려대·연세대의 학생 동아리 세미나에도 자주 가서 지도했는데, 이런 모임이 예닐곱 개가 되다 보니, 각각이 일주일에 한 번씩만 있어도 매일 불려다니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대학원에 진학한 뒤에는 주로 다른 대학이나 연합 동아리 지도에 주력했다. 당시 경제과는 150명이나 되었지만, 대학원에는 지금과 달라서 3명만이 진학했다. 그런데 같이 입학한 동기들 중 1명은 ROTC로, 다른 1명은 해군장교로 입대해버려 대학원에는 혼자만 남았다. 경제과 대학원의 한 해 위에는 안병직과 사회학과를 졸업한 신용하가 있어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 뉴라이트의 깃발을 내세운 안병직은 그때는 아주 좌파적인 입장이었다.
대학원을 마치고 숙명여대에 강사로 나가던 시절, 아마 1965년 2학기나 1966년 초에 <청맥>이라는 잡지의 예비 필자 모임인 새문화연구회 모임에 안병직 등 선배들을 따라나가게 되었는데, 여기서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의 김질락을 만나게 되었다. 김질락은 신영복보다는 67년 선배였다. <청맥>은 통혁당 핵심들이 당의 합법 기관지로 설정한 잡지인데, 반미적인 논설이 종종 실렸다. 당시 신영복은 대학원을 갓 졸업한 신출내기 강사이다 보니 잡지의 필자 풀(Pool) 성격인 새문화연구회에서는 막내인지라, 적극적인 역할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김질락과 그의 후배 이진영 등은 신영복이 학생운동에 깊이 간여하고 있는 것을 알고 그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접근했고, 어느 날 김질락이 정색하고 혁명을 지지하느냐고 물어왔고, 신영복이 그렇다고 하자 그날부터 김질락, 이진영과는 따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나중에 통혁당 산하의 민족해방전선으로 발표된 모임이다. 통혁당 사건으로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이 사형됐으니,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신영복은 살아 있는 사건 관련자 중에서 가장 핵심 인물이 된다. 그런데 나도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알았지만, 신영복은 최고 책임자로 발표된 김종태나 조국해방전선 책임자로 발표된 이문규 등 핵심 간부들은 사건이 날 때까지 만나본 적도 없다는 것이다. 이문규야 학생운동 선배라서 이름 정도는 들어보았지만, 김종태에 대해서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신영복이 김질락과 만난 횟수는 <청맥> 잡지사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모인 것까지 합쳐 전부 10번 안팎일 것이고, 김질락의 집에서 이진영과 함께 따로 만난 것은 5번 정도라 하니 참으로 비싼 징역을 산 셈이다.
자술서 자체가 고문이었다
그런데도 공안당국의 기록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에서 나온 통혁당 관련 일부 서적에는 신영복이 김종태, 이문규, 김질락 등과 함께 통혁당의 강령을 정하는 등 당의 핵심 성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신영복은 민족해방전선이 조직한 산하단체라 발표된 경제복지회나 경우회, 동학혁명회 등은 각각 역사가 오랜 자생적인 단체로서 자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을 뿐이고, 김질락 등과의 모임에서 학생운동 동향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야기했을 뿐인데, 사건에 연루돼 고생하게 되었다면서 미안해했다. 중앙정보부가 엄청나게 부풀린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측면도 분명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김질락 등이 북에 산하단체라 보고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남과 북 관료집단의 성과주의와 자기 활동을 과장해서 보고한 통혁당 지도부의 합작으로 사건이 확대됐다고나 할까? 북과의 관련성을 부풀리려는 공안당국이나, 통혁당을 북의 지도성이 관철된 조직으로 그리려는 진보 진영 일각이 각각 다른 입장에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통혁당 사건에서 핵심은 북과의 관련 문제이다. 신영복은 통혁당에 대해서는 자신은 전혀 알지 못했고 중앙정보부에 가서야 들었다고 했다. 또 민족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의 명칭은 명시적으로 합의한 적은 없지만, 분단된 베트남을 보면서 그런 성격의 조직이어야 한다는 논의는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라고 발표된 김질락, 이진영과의 논의 과정에서 이미 남과 북이 질적으로 다른 단계에 있기 때문에 일국일당주의를 취해 북이 중앙이 되고 남에 지역당을 건설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남쪽에 자생적인 운동의 구심이 서야 한다고 합의했다고 말했다. 김질락이 김종태나 이문규 등과는, 또는 북에 가서는 어떤 식으로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민족해방전선 모임에서는 북의 직·간접적인 지도를 받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한 바도 없으며, 북과의 관계는 대등한 혁명의 구심 정도로 이야기됐다는 것이다. 중앙정보부에서의 수사는 혹독했다. 이미 김질락이 다 불은 터라, 저들은 신영복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 현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신영복이 북에 갔다올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들은 북에 갔다온 날짜를 대라고 구타와 전기고문을 하여 까무러치기도 했다. 고문도 힘들었지만, 조사 자체가 고문이기도 했다. 청년기의 고민과 방황이 어린 수많은 만남과 토론, 그리고 서로 빌려주고 빌려 보았던 수많은 책들은 몇십 장의 자술서와 몇십 장의 조서와 몇 줄의 법률용어에 의해 온통 조직적인 관계로 규정됐다. 지난 수년간 자신이 행한 활동을 담은 것이건만 수사 기록은 외국어보다도 낯설었다. ‘이런 방식으로 한 사람의 복잡한 사상과 의식이 규정되고 단죄되는구나’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원숭이 똥구멍’ 노래가 생각났다고 한다. 신영복이 수사를 받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도 친구들과 많이 외우며 놀았던 노래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빨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수사기관의 논리학을 지배하는 것은 흑백논리도 삼단논법도 아니었다. 무엇이든 갖다붙이면 척 붙어버리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수사기관의 연상법 놀이여!
사형 구형하면서도 “걱정 하지 말라”
당시 육사교관으로 현역 장교 신분이었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는 이문규를 구출하러 북이 파견한 공작선의 암호를 해독해 격침시키면서 2명을 생포했는데, 이들도 통혁당 관련자로 사형을 언도하는 등 이 사건의 크기를 부풀리는 데 주력했다. 그러다 보니 직접 북에 내왕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해방전선의 지도부 격으로 위치지은 신영복에게도 사형을 선고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사 당시에는 주로 불고지죄, 즉 김질락이 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죄가 중심이었던 것이 기소 단계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가 중심이 되었고, 1심과 2심에서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사형이 선고됐다. 재미있는 것은 최고형이 징역 2년 이상의 유기징역형인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로 기소된 사람에게 군사재판에서 기소 죄목이 아닌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하고 선고했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의 기본원칙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기에 대법원에서는 당연히 파기환송. 군 법무사들이 사형을 구형하면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사형을 구형하며 걱정하지 말라는 놀라운 인도주의와 여유!- 이유를 알 것 같다고 했다. 파기환송심에서 군검찰은 죄목을 구성죄로 바꾸는 공소장 변경 조치를 취했고. 재판부는 정상을 참작해 최고형 대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학생 동아리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나쁜 대법원 판례를 남기는 것이 좋지 않다는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상고는 포기했다. 통혁당에 가입한 적도 없고- 실제 통혁당은 그가 투옥된 이후에 조직된 것으로 북에서 발표됐다- 김질락 이외에는 통혁당 지도부인 김종태나 이문규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대표적인 통혁당 지도간부로 인식되는 무기수 신영복은 이렇게 탄생했다. 상고포기를 하여 무기징역이 확정된 것은 1970년 5월5일 어린이날이었다. 재판을 죽 지켜본 호송 헌병의 호의로 남산에 들러 아이스크림을 사먹고 무기징역의 기나긴 터널로 들어가게 된다. 사형수일 때는 무기만 되어도 원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무기징역은 어떤 의미에서 사형보다 더 암담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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