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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박노해 문부식으로 이어진 시인들의 반성 계보학, 그 요란함에 대하여
최근 <조선일보>는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이자 시인인 문부식의 ‘치열한 자기 성찰’이 담긴 인터뷰를 크게 싣고, 사설을 통해서까지 문부식의 반성을 높이 평가했다. <조선일보>를 통해 행한 문부식의 반성은 진보적 지식인 사회에서 한동안 유쾌하지 않은 화제가 되었고, 몇몇 사람들은 지면을 통해 문부식을 비판했다. 필자도 온라인상에서 짧은 글을 통해 문부식을 비판한 바 있다. 필자는 운동 진영 내부의 논쟁에 대해서는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과 정력이 있으면 우리보다 강대한 힘을 갖고 있는 수구세력과의 싸움에 쏟아야 한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필자가 굳이 이 문제에 참견했고, 다시 본 난을 통해 재론하려는 것은 지난 10여년간 우리 현대사에 등장한 몇 차례의 소란스러운 반성 속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비수로!
너무나 무거운 짐을 졌던 김지하
이런 처지에서 지식인들이, 그것도 누구보다 치열하게 격동의 시대, 암흑의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이 반성을 했다. 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죄 많은 자들, 이를테면 민족 반역자들이, 학살의 원흉들이, 반란의 괴수들이, 부정축재의 돈다발 위에 올라앉은 자들이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큰소리칠 때 이들은 함께 질풍노도의 시대를 살아온 동료들, 후배들, 친구들을 향해 아픈 말문을 열었다. 김지하. 지금의 젊은 독자들 가운데는 김지하가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1970년대를 산 사람들에게 그의 이름은 아무런 설명도 수식도 필요없다. 많이도 아니고 아주 조금만 과장해서 말한다면 7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김지하는 절반을 차지한다. 그만큼 80년대보다 7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폭이 좁았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 이 땅의 양심세력을 쓸어버린 뒤, 4·19혁명을 통해 민주세력이 되살아나고,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70년대로 들어설 때 청년 김지하는 분명 그 대열의 선두에 서 있었다. “시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다”라며 시작하는 <오적>을 비롯해 <비어> <구리 이순신> <앵적가> 등 그의 담시와 희곡들은 예리한 독설과 풍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런 김지하를 그가 지목한 다섯 도둑의 무리들은 가만두지 않았다. 수배와 투옥이 이어졌고, 마침내 긴급조치가 내려진 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최종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될 때까지 몇달간 그는 사형수였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풀려났을 때 그도 풀려났다. 그러나 김지하는 당시에는 상당한 정도 비판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동아일보>에 옥중기를 실어 인혁당 사건에 대한 고문조작을 거침없이 폭로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투옥되어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처형소식을 감옥에서 들어야 했다. 중앙정보부의 밀실에서, 서대문형무소의 독방에서 그는 “못 돌아가리/ 한번 딛어 여기 잠들면 육신 깊이 내린 잠/ 저 잠의 저 하연 방 저 밑 모를 어지러움”에 빠져들며 시의 제목처럼 <불귀>의 나날을 보냈다. 우리의 민주화운동이 어린 탓이지만, 김지하의 두 어깨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었다. 그것은 김지하에게도, 우리 시대에게도 모두 불행한 일이었다. 80년 광주의 뜨거움이 지나고 김지하는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학살의 원흉 전두환은 70년대 저항의 상징이던 김지하를 풀어줌으로써 학살의 피묻은 손을 감추려 했던 것이다. 김지하가 나왔을 때 세상은 참 많이 변해 있었다. 광주를 경험한 후배들은 70년대의 선배들을 낭만적이라고 몰아붙였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이나 <새> 같은 절창은 학생들의 애창곡이 되었지만, 김지하는 과거의 시인일 뿐 새롭게 전개되는 민중운동의 상징일 수는 없었다. 김지하가 <애린>을 발표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김지하가 “맛이 갔다”며 수근대기도 했다. 잊히던 김지하는 1991년 5월 ‘젊은 벗들’ 앞에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요란하게 돌아왔다.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고 호령하면서. 강경대가 죽고, 김귀정이 죽고, 박승희가 죽고…. 정말 하룻밤 자고 나면 새로운 죽음이 우리를 기다렸다. 김지하는 말했다. “젊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게!” 좀스러운 시를 쓰지 않는 김지하답게 그는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그러나 당시의 분위기에서 경대 친구들에게 <조선일보>에 실린 김지하의 그 발언은 죽음의 행렬을 멈춰보려는 생명사상가의 말이 아니라 “차리리 우리보고 다 죽어버리라고 해”라는 저주의 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조선일보> 극우논객들의 말이었으면, 당시에 갑자기 스타로 떠오른 박홍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으면, 집어던지면 그뿐이지 경대 친구들이 상처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박노해만 몰랐다?
상처받기는 경대 친구들뿐이 아니었다. 필자를 포함해 김지하의 고통으로부터 지적 자양분을 받으며 자란 모두에게 김지하의 말은 우리의 등에 꽂힌 비수였다. 어쨌든 김지하가 바란 대로 죽음의 행렬은 멈춰섰다. 김기설의 분신 이후 유서대필사건이라는 희대의 조작사건으로 세상은 시끄러워졌고, 우리들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패배했다. 그로부터 10년여가 흘러 김지하는 99년 <말> 9월호나 2001년 <실천문학> 여름호를 통해 “그 당시 말썽 많은 <조선일보>에 발표하게 되어 매체 선택을 잘한 것 같지 않다”면서 자신도 귀신 소리가 밤마다 들릴 정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너무 날카롭게 말이 나갔고, “그때의 상처가 젊은이들의 가슴에 생각보다 아프게 새겨진 것 같아 유구무언”일 뿐이라며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 10년은 김지하에게도 고통스러운 10년이었다. 70년대 세대들은 그의 반성을 대체로 반갑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반성을 ‘그때 상처받은 젊은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어려운 여건 속에서 묵묵히 일하는 시민단체의 활동가들 가운데는 유독 그 뜨거운 분신정국을 살아낸 경대 친구들이 많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몇몇에게 김지하의 반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나요?” 하는 짧은 대답 속에 하던 일을 계속한다. 얼굴 없는 시인이라 불리던 박노해. 그의 등장은 문학사적인 사건이었다. 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노동의 새벽>을 읽으며 느꼈던 전율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얼굴 없는 시인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도 기억할 것이다. 체포될 때의 이글거리던 눈빛, 성난 호랑이처럼 포효하던 혁명가의 얼굴을. 김지하와는 달리 박노해는 여러 매체를 통해 옥살이의 고통을 많이 표현했다. 사실 옥살이에 대해서는 일부 낭만적 관념이 있다. 필자와 아주 가까운 선배도 힘든 옥살이를 했지만 어떤 글에서 “징역이 독재정권이 가하는 유형이라면 징집은 삼년간에 걸친 태형”이라고 표현했다. 감옥에서는 책이라도 볼 수 있기에 사람들은 감옥을 대학원으로 부르기도 했다. 감옥 구경은 못해본 채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어느 정도 갖고 있던 필자는 “20대의 길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프게 헤어지며 수배의 길에 들어가 40이 넘어야 세상 밖으로 돌아온” 박노해가 출옥 뒤에 쓴 글을 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막막한 혼돈 속에 손잡아 줄 사람 아무도 없다는 절망적인 고독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감옥생활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하루가 무섭게 인간의 몸과 정신과 감성을 망가뜨린다. 무기징역이란 평생을 감옥에 가둬둔다는 말이다.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최종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은 김지하나 사형을 구형받았다가 무기징역을 받은 박노해는 평생을 감옥에 가둔다는 무기징역형을 받고도 축하인사를 받아야 했던 슬픈 시대의 상징이다. 죽음의 언저리까지 갔다가 “무덤 속 같은 독방 벽에 갇혀서 뼈아픈 패배에 절망하며 침묵과 성찰의 시간을 살아내야 했던” 김지하나 박노해. 더구나 김지하는 독방도 옆방을 비워놓아 사람 냄새조차 맡을 수 없는 그런 호된 징역살이를 해야 했다. 너무나 사람이 그리웠을 것이다. 출옥 뒤의 박노해는 어떤 친구의 표현에 따르면 도사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출옥 인사에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을 했을 때, 그 말을 반기면서도 어느 장난기 많은 친구는 “박노해만 몰랐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언제 우리 운동이 다른 무엇을 가진 적이 있었는가? 자본주의 사회의 신이라는 돈은 애초 없었고, 단단한 이념도, 철의 규율에 따른다는 조직도 한갓 신기루였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부비고 기댈 언덕이라고는 사람밖에 없었다. 수배, 투옥, 단절, 그 오랜 세월 속에서 박노해가 사람만이 희망이란 것을 발견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문부식과 <조선일보>의 아이러니
박노해가 얘기한 짐승의 시대, 그 시절 우리는 모두 독수리 오형제가 되어야 했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안고 이 땅에 태어나” 그렇게 교육 받고 자란 우리는 독재자들의 바람과는 정반대편에 섰지만, 민족과 민중을 위해 한몸을 바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자기의 시대에 김지하나 박노해는 그 누구와도 비교하기 힘든 무거운 짐을 졌으며, 충실하게 그 역할을 수행했다.
그가 홀로 일으킨 사건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주범만을 기억한다. 그 엄청난 사건의 무게는 어린 문부식에게 평생을 짊어져야 할 멍에가 되었다. 그런 그가 역시 많은 인명피해를 낸 동의대 사건의 민주화운동 인정에 대해 남다른 느낌을 갖고서 비판을 했다는 것은 그의 평가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조선일보>가 어떤 매체이고, 그가 일하는 <당대비평>의 작업에 대해 어떤 이유로 극진한 관심을 기울여왔는지 충분히 알 만한 그가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면서 ‘자기성찰’을 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더구나 문부식은 아무 탈 없이 거리를 활보하는 간첩 김영환을 도운 이유로 ‘간첩방조죄’라는 죄명을 쓰고 옥에 갇혀 있는 김경환의 옥중서간집의 발문을 쓴 바 있다. 김영환 사건에 대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거기 다 들어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생각이 비슷했다. 그런 그가, 국정원에서 반성문을 써 <조선일보>에 게재한 김영환을 비판한 문부식이 <조선일보>를 통해 자기 성찰을 발표한 사실은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김지하, 박노해, 문부식. 그들은 우리의 현대사에서 어느 한 순간의 주역이었다. 단 그들이 주역이 되었던 사건과 시간은 그들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이미 역사의 것이다. 일부에서는 그들이 “맛이 갔다”고 하지만 그런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런 말을 즐겨 하던 사람들이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누구보다도 먼저 맛이 간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누구보다도 힘들게 역사의 무거운 짐을 져야했고, 그리고는 독방의 고독 속에 갇혀야 했던 그들에게 우리 모두는 빚을 지고 있다. 이제 그들이 고된 몸과 마음을 쉬려 한다면 누가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박노해는 <해거리>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감나무도 산목숨이어서 / 작년에 뿌리가 너무 힘을 많이 써부러서 / 올해는 꽃도 열매도 피우지 않고 / 시방 뿌리 힘을 키우는 중이란다.”
훌쩍 가버린 김남주가 그립다
문부식이 김경환을 평한 것처럼 지나간 과거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아름다운 고투의 흔적이 있다. 온 몸을 내던졌던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고뇌의 흔적, 더구나 그들은 무딘 사람들도 아니고 시인으로서의 여리고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이들이다. 다만 바라고 싶은 것은 반성을 독방에서 혼자 하지 말되 자기성찰을 하려면 조용히 하자는 것이다. 휴식과 자기성찰을 하나의 운동인양 큰 소리로 외치면 너무나 소란스럽게 되고, 성찰의 귀한 내용도 전해질 수 없다. 한 시대의 독수리 오형제의 맏형으로 자기 시대의 짐을 홀로 져야했던 불행한 시대의 주역이었던 이들의 조용한 성찰이 아름다운 울림으로 와 다았으면 한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투사로, 그리고 뛰어난 시인으로, 오랜 세월을 독방에서 보낸 고독한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이들을 보면서 나는 똑같은 공통점을 가졌던 김남주가 그립다. 그가 속한 남민전은 김남주의 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강도행각이 단서가 되어 발각되지 않았던가? 그도 쓰라린 패배에서 반성할 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남주의 반성은 달랐다. 그는 요란한 반성을 하지는 않았고, 한 때 자기를 믿고 따르던 후배들에게 절망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사람만이 희망인 것처럼 때로, 아니 언제는 절망은 사람에게서 온다. 그 혹독한 세월을 투사로, 시인으로, 고독한 인간으로 살면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훌쩍 가버린 김남주가 그립다. 몹시 그립다.
한홍구 ㅣ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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