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득님

평범한 인생에 찾아온 열정 약자를 위해 청춘을 바치다

참된 2014. 8. 24. 22:40
사람들인터뷰

평범한 인생에 찾아온 열정 약자를 위해 청춘을 바치다

기사전송 2014-04-27, 21:11:31   대구신문 

 

 

<화제의인물>‘노래하는 사람’ 임정득
캠퍼스서 우연히 본 기타치는 사람들
노래패 동아리 가입 후 자유로움 깨달아
졸업 앞두고 교사 대신 무대 서기로 다짐
‘노래하는 사람’ 임정득(32)씨는 부당함을 외치는 노동자들이 있는 현장을 찾아 노래한다. 자신만을 향해 있던 노래가, 지금은 그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힘 없는 이들은 뭉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일하던 일터에서 잘려져 나간 이들, 약육강식의 논리 아래 내쳐져 버린 이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빛 바랜 명제 때문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뭉칠 수밖에 없기에 뭉치는 것이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나와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을 한 곳에서 마주하고 싶은 마음 탓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팽개쳐진 이들이 하나 둘씩 뭉치고 있다. 그리고 뭉친 이들 앞에서 노래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노래한 지도 벌써 10년이 흘렀다. 뭉쳐서 분노든 슬픔이든 무언가 토해내던 이들도 그녀가 노래하기 시작하면 눈을 돌려 한 곳을 바라본다. 임정득(32). 그녀는 스스로를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어떤 사람들은 임정득씨를 ‘민중가수’라고 부른다. 민중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혹은 민중가요를 주로 부르는 가수이기 때문에 ‘민중가수’라는 명찰을 붙였을 게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저 ‘노래하는 사람’으로 불리는 것이다. 임정득의 노래가 가장 먼저 닿는 곳은 민중도 세상도 아닌 바로 자신이다. 대학에 입학할 즈음만 해도 지금의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노래하는 사람’ 임정득의 이야기를 듣는다.

◇야자 한 번 빠진 적 없던 ‘시골소녀’

그녀는 경북 군위에서 나고 자란 이른바 ‘시골소녀’였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농사를 지었고 그녀 위에는 언니 3명과 오빠 1명이 있었다. 모두가 평범한 삶을 살았고 평범한 삶을 꿈꿨다.

임씨 역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어렴풋이 자신에게 정해진 길이 있는 줄로만 알았다. 야자 한 번 빠져본 적이 없었다. 야자를 빠지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던 까닭이다. 시키는 것을 했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았다. 대학교를 올라가면서 학과도 무난한 경영학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대학에서도 한동안 평범한 학생으로 살았다.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캠퍼스를 걷던 임씨는 갑자기 혼자서 노래패 동아리방에 걸어들어갔다. 정해진 ‘트랙’에서 벗어나 달려본 적 없는 그녀에게는 무척 낯선 행동이었다.

“수업 끝나고 건물 바깥으로 나왔는데, 사람들이 나무 밑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어요. 그 모습에 홀렸나 봐요. 동아리 모집 기간이 한참 전에 끝나버린 학기말이었어요. 당시 찾아들어간 노래패는 소위 말하는 ‘운동권’ 동아리였지만, 그땐 그런 것들을 알지 못했어요. 당연히 민중가요가 무엇인지도 몰랐죠. TV에 나오는 대중가요도 많이 들어본 적 없어서 민중가요를 듣고도 전혀 이질감을 못 느꼈어요. 다만 가사가 평소 듣던 노래보다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노래패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그녀는 선배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었다. 이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그제서야 임씨는 스스로도 자신을 ‘들러리’로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땐 열등감도 많았고 스스로도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뿐이죠. 한 번도 주인공이 된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노래패에 들어가 무대에 서면서부터 ‘주목받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내가 주인공인 느낌이 들었는데, 한 마디로 ‘무대 맛’을 본 거죠. 돈과 외모에 대한 것들은 물론 잘하는 것 하나 없다는 생각으로 알게 모르게 쌓인 열등감들이 많았는데, 노래를 부르면서 이런 것들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분통터지는 이들 앞에서 노래하다

대학 생활 내내 노래를 부르며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되는 느낌을 만끽했던 임씨. 하지만 그녀는 그때까지도 노래를 업으로 삼아 살아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평범한 삶 위에 노래를 부르는 생활을 살아가던 그녀에게도 어느덧 졸업이 다가왔다.

임씨는 그렇게 졸업을 하겠거니 생각했다. 교사를 하면 좋겠다는 마음에 교생 실습까지 나갔다. 노래패에서 노래를 부르며 주인공이 됐던 경험들도 대학 생활과 함께 묻어버리고, 남들이 ‘좋은 직업’이라고 말하는 교사를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녀의 노래 실력을 전해듣던 사회의 ‘프로 노래패’가 찾아왔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대뜸 ‘작업’을 걸었다. 함께 노래를 부르자는 제안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 그리 쉽게 결정했나 싶어요. 큰 고민 없이 함께 하기로 결정했어요. 졸업과 동시에 전문 노래패인 ‘좋은 친구들’에 들어갔던 것이죠. 물론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도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마음 한 구석에 쌓아뒀던 마음이 그제서야 터져나온 것 같아요.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요. 부모님은 이런 제 결정을 무척이나 싫어하셨고, 반대하셨어요. 저는 그때 부모님께 태어나 처음으로 반항다운 반항을 했어요.”
전국 파업현장을 찾아 노동자들 앞에서 노래하고 있는 임정득씨.
임씨는 졸업 직후부터 노래패 좋은 친구들에 들어가 2009년까지 활동했다. 주로 노동자들의 집회 현장이었다. 대학 노래패에서도 비슷한 현장들을 돌았지만, 사회로 발을 내딛고 찾아간 현장은 말 그대로 치열하고도 분통터지는 곳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노래했다.

“중학교, 고등학교의 임정득은 절대로 생각하지 못했을 모습이죠.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도 깜짝 놀라요. 옛날 그 임정득이 맞냐고. 하지만 내가 그들을 이해할 수 있고, 내가 그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어서 현장을 찾았습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노동자로 살아본 적 없지만, 시골에서 나고 자란 탓인지 노동자들을 쉬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일이든 ‘기본적인 것’이 중요한데, 그것조차 지켜지지 않는 곳이 많아요. 그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도 많고요.”

◇홀로 선 임정득…“또 다시 현장으로”

임씨는 2009년 좋은 친구들과 작별하고 홀로서기에 나섰다. 팀의 한 멤버로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 싶었다.

자신이 직접 선택하고, 직접 결정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직접 지은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솔로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팀을 나와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지금까지 노래만 해왔지 진정으로 사람을 보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어떤 현장을 찾아 어떤 노래를 부를지에 대한 것도 막상 혼자서 고민해야 하니 당황스러웠다.

결국 임씨는 한진중공업 파업 현장을 불쑥 찾아갔다. 한진중공업 파업 현장은 희망버스가 다녀간 이후로는 전 국민의 관심이 쏠렸지만, 그녀가 그곳을 찾을 때만 해도 한진중공업 파업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던 때였다.

“무작정 찾은 현장에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모닥불을 쬐며 추위를 쫓고 있는 건장한 사내들 사이로 끼어들어가 ‘노래하는 사람이다. 내가 할 일은 없느냐’라고 물었죠. 다들 이상한 눈빛으로 절 쳐다봤어요. 어쨌든 현장에서 노래를 하게 됐는데, 그러고 나니 현장의 노동자들도 절 ‘같은 편’으로 대하는 게 느껴졌어요. 몇 번 그곳을 찾은 뒤부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임정득’이라는 말씀을 하는 분도 생겼고요.”

그렇게 임씨는 부당함을 외치는 노동자들이 있는 전국의 현장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노래했다. 그녀는 매년 크리스마스에 죽어간 노동자들을 추모하는 자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매년 다른 현장의 다른 노동자들이 추모식에 이름을 올리지만, 그렇게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변함없이 추모식이 열린다는 이야기하며 그녀는 눈물을 훔쳤다.

◇“생명력 있는 노래로 그들과 소통할래”

그녀에게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명곡’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자 꿈이다. 현장을 찾아 그들을 위해 노래하고, 무대에 올라 나를 위해 노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수이자 작곡가로서 좋은 노래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좋은 곡은 생명력이 있어요. 먹고 살기 쉽지 않아 힘들 때, 반복되는 일상에 지칠 때, 내가 하는 노래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좋은 노래를 지어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힘이 나죠. 그래서 좋은 노래를 짓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해요. 일상적인 삶과 분리되는 노래가 아니라 일상 속에 녹아들 수 있는 좋은 노래를 만들고 싶어요.”
최근 임씨는 콘서트를 통해 ‘현장에 있던 이들을 일상으로 끌고 오고 싶었던’ 그녀의 작은 소망을 이뤘다. 일상과 분리되는 노래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콘서트를 통해서도 나타난 셈이다.

콘서트에는 지금까지 현장에서 만났던 전국의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임씨는 현장을 떠나기 힘든 이들이 자신의 공연을 보기 위해 콘서트를 찾았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했다.

밝았던 하늘은 어느덧 어스름이 졌다.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 그녀에게 물었다. 내일도 현장을 찾느냐. 임씨는 내일도 모레도 현장을 찾는다고 답했다.

“누군가가 저를 두고 ‘참 좋은 일 하시네요’라고 말하면 썩 마음에 들진 않았어요. 누가 뭐래도 저는 오로지 저를 위해 노래하고 있었거든요. 오히려 그런 시선을 극복하고 싶었어요. 노래를 지을 때도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 날 위해 쓴 것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쩌면 내 노래가 누군가에게 큰 힘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노래하는 이유가 누군가를 위해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죠. 그 때문일까요. 저는 요즘 좀 더 나은 노래를 만들고 부르고 싶다는 열망이 커졌어요.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편하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김정석기자 kjs@idaeg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