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 <또 하나의 약속> 배우 박희정
“정말 개봉하냐는 말, 개봉 못했으면 좋겠나? 야속했어요.”
2014.02.08 11:07 | 이지영 기자 jylee@maxmovie.com 맥스무비
달걀로 바위치기. 제작 단계부터 개봉까지, 매 순간 높은 벽을 하나씩 넘어서 드디어 2월 6일(금) 관객과 만나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합한 표현이다. <또 하나의 약속>은 이번 주 개봉하는 영화 중에서 가장 높은 예매율을 기록하며 화제를 불러모았지만, 쉽사리 열리지 않는 극장 때문에 외압설이 불거지며 개봉 진통을 겪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개봉일 기준으로 전국 200개 상영관을 확보한 상황이지만, 개봉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기엔 제작진들의 마음 고생이 컸다.
<또 하나의 약속>은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던 스무 살 딸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가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거대 기업을 상대로 인생을 건 재판을 벌인 실화를 다룬 영화다. 박희정은 첫 주연작인 <또 하나의 약속>에서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윤미 역을 맡아 실제로 삭발도 마다 않는 열연을 펼쳤다.
인터뷰를 위해 배우 박희정을 만난 건 <또 하나의 약속> 개봉을 코 앞에 둔 지난 4일(화). 인터뷰를 돕기 위해 동행한 홍보 담당자의 휴대전화가 쉴새 없이 울어댔다. 개봉관 확보에 대한 문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희정은 “영화를 둘러싼 상황에 대해 물어보기가 미안할 정도다. 그래서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모든 상황이 그저 안타깝다”며 말문을 열었다.
“첫 주연 캐스팅에 좋아서 방방 뛰었어요”
고된 제작 과정을 거쳐 드디어 <또 하나의 약속>이 개봉하게 됐는데, 이제는 상영관 문제로 시끄럽네요. 마음이 편치 않으시겠어요. 촬영하는 것도 힘들어서 개봉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는데, 개봉을 앞둔 지금도 여러 가지 문제로 또 힘든 상황이라서 안타까워요. 예전에는 영화를 찍어 놓기만 하면 힘든 것도 끝날 거라 생각했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걱정이네요.
<또 하나의 약속> 오디션을 촬영 며칠 전에 급하게 봤다고 하던데요? 윤미 역할이 정해지지 않아서 급하게 찾다가 제작진 주변 사람들에게도 수소문을 했다고 들었어요. 학교 선배가 저 대신 프로필을 제출했는데, 그때 시나리오를 읽고 감동을 받아서 오디션을 보겠다고 했어요. 1차 오디션 때 쪽대본으로 리딩을 했는데 김태윤 감독님이 제게 전체 대본을 주시면서 윤미 출연 부분 전체를 다 읽게 하셨어요. 그리고 2차 오디션 때 기타로 연주하는 산울림의 ‘회상’을 듣고 싶다고 하셨죠. 저에게 딱 3일 간 연습 시간을 주셨고요. 기타를 전혀 칠 줄 모르는데 3일간 속성 레슨을 받아서 2차 오디션을 봤어요. |
윤미 역에 캐스팅 됐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느낌이 남달랐을 것 같아요. 그날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에 전화로 소식을 들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지하철이라 소리는 못 지르겠고.(웃음) 그래서 몸으로 막 방방 뛰면서 기쁨을 표현했어요.
출연 분량은 적지만 윤미의 존재감이 굉장히 커요. 게다가 첫 주연작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담감이 많았을 것 같아요. <써니>(2011) 이후로 오랜만에 상업영화를 찍었고, 첫 주연이라서 부담감이 정말 컸어요. 주조연을 막론하고 모든 선배님들이 정말 연기를 잘하시잖아요. ‘내가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그래서 제 목표는 ‘연기를 잘해서 돋보여야겠다’가 아니라 ‘진짜 방해만 되지 말자’였어요.
특히 삭발하는 장면이 강렬했어요. 여배우로 살면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잖아요. 촬영할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궁금해요. 일단 삭발하는 장면에서는 연기 실수를 하면 끝이죠. 실제로 머리카락을 자르면서 연기하는데 NG를 내면 잘라낼 머리카락이 없잖아요.(웃음) 그래서 촬영장 분위기가 굉장히 진지하고 숙연했어요. 윤유선 선배님은 제가 다칠까 봐 걱정하셨고, 모든 스태프가 “여배우가 삭발하는 장면을 처음 찍는다”며 저보다 더 긴장하셨어요. 나중에 들었는데 감독님이 제 머리를 깎아놓고 ‘내가 뭐 하는 짓이지?’라고 생각하셨대요. 저는 삭발 장면을 찍으면서 ‘이 모든 게 진짜 상황이면 어땠을까? 아마 엄마 앞에서 울지 않았을 거야’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연기하려 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서 머리 자르는 기계에서 ‘윙’ 소리가 나고, 윤유선 선배님이 뒤에서 흐느끼는 게 느껴지니까 저도 같이 무너져버렸죠.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고요.
아버지의 택시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도 인상적인데 그 장면이 첫 촬영 장면이었다면서요? 택시 안이 비좁잖아요. 그래서 택시 안에 마이크를 놓고 감독님이 지시를 내리고, 택시 안에는 저와 박철민, 윤유선 선배님만 있었어요. 지금이야 너무 친하고 연락도 자주하는 사이지만, 그때는 첫 촬영이라서 옆에 있는 것도 어색했던 기억이 나요.(웃음) 그리고 죽음을 연기하는 건 난생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 지 정말 고민이었어요. 영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중요한 장면이기도 했죠. 선배님들 눈에 제가 엄청나게 부담스러워하는 게 보였나 봐요. 박철민 선배님이 “네가 신인이라 부담이 있는 것 같은데 연기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연기에는 정답이 없다. 마음대로 해라”라고 말해주셨어요. 윤유선 선배님도 제 손을 잡아 주시면서 “희정아 마음대로 해”라고 북돋워주셨고요. 그때부터 아무 생각 안하고 막 연기 했던 것 같아요. 그랬더니 OK 사인이 떨어졌어요.
“이젠 걱정 대신 작은 관심이 더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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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찍으면서 “또 다른 가족이 생긴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선배가 됐을 때 꼭 이렇게 되고 싶다’라고요. 제가 다른 분야에서 인지도를 얻은 ‘잘 나가는 신인’도 아니고 정말 이제 막 나온 신인이잖아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저를 이렇게까지 예뻐해 주실 줄 몰랐어요. 어디를 가서든 제 칭찬을 정말 많이 해주시거든요. 함께 촬영하면서 ‘이 분들의 마음은 진짜’라는 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제가 소속사가 없거든요. 하다못해 헤어샵도 다 챙겨주셨어요.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챙겨주시는 게 꼭 엄마 아빠 같아요. 정말 감사해요.
윤미 영정 사진도 기억에 남이 남아요. 그녀의 표정이 참 묘하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영정 사진을 찍는 게 정말 어렵더라고요. 감독님이 굉장히 복잡한 주문을 하셨어요. “영정 사진 속 윤미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 같으면서도, 안쓰럽게 보여야 한다. 또 연약하지만 한 편으로는 강해야 해. 무엇보다 “도와주세요” 라는 말이 들리는 눈빛이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계속 속으로 ‘우리 아빠 좀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되뇌면서 영정 사진을 찍었죠.
김태윤 감독의 주문이 그대로 사진에 묻어났네요. 그 감정이 잘 보인 것 같다고 말씀해주셔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김태윤 감독의 디렉션은 굉장히 섬세하고 세밀했을 것 같아요. 까다롭지 않으세요. “하고 싶은 데로 해”라고 자유롭게 해주시는 편이에요. 영화 초반에 윤미가 아빠가 주신 술잔을 돌려 마시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애드리브였어요. 신인인 제가 그런 애드리브를 제시하고, 실제로 연기할 수 있을 정도로 감독님이 편안하게 해주셨어요. 그런데 딱 하나. 감독님이 섭섭할 정도로 칭찬은 안 하세요. “좋았다” 가 아니라 “괜찮았다”라고 하시거든요. 한번은 “감독님은 너무 칭찬을 안 해주시는 거 같아요”라고 했더니 그게 마음에 남으셨는지 다음에 민망할 정도로 극찬을 해주신 적도 있어요.(웃음)
술잔을 돌려 마시는 장면이 나올 때 극장에선 큰 웃음이 터졌어요. 그 애드리브를 어떻게 생각한 거예요? 아빠가 20살이 된 딸에게 처음으로 술을 따라 주는 장면이 있어요. 시나리오에 ‘아빠, 엄마가 놀란다’라고 써 있었는데, 딸이 단순히 아빠가 주는 술을 한번에 ‘원 샷’ 했다고 놀라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감독님에게 “친구들과 술 마실 때처럼 하면 어떨까요?”라고 물었더니 “그럼 한번 능숙하게 마셔보라”고 풀어주셨어요. 그래서 술잔을 볼에서부터 돌려서 마셨는데 현장에서 스태프도 많이 웃어주셨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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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의 실제 인물인 황유미 씨를 생각하면, 감정이 남달랐을 것 같아요. 故 황유미 씨와 제가 실제로 3살 차이예요. 그래서 더 많이 안타깝고 생각할수록 가슴이 먹먹해요. 촬영하면서 일기 쓰는 장면을 찍을 때 가장 가슴이 아팠어요. 제가 <또 하나의 약속>을 촬영하면서 매일 숙소에 도착하면 배우 일지를 적었거든요. 그녀는 하루하루 일기장에 슬프고 아픈 내용만 썼을 텐데, 그녀를 연기하는 나는 숙소에서 배우로서 행복한 마음으로 일기를 쓰는 게 아이러니하고 정말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더 아팠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를 직접 만났을 때, 어떤 감정이었을지 궁금하네요. 영화에서 회사가 아빠에게 제시하는 돈이 처음엔 몇 백 만원에서 나중에는 10억 원까지 올라가요. 그런데 아빠는 그 돈을 받지 않아요. 황상기 아버님을 만났을 때 여쭤봤어요. 실제로 돈 앞에서 흔들리지 않았을까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아버님이 “내 딸과 절대 바꿀 수 없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 말을 듣는데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멋있고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황상기 아버님은 항상 웃고 계세요. 비록 세상에 딸은 없지만 딸과의 약속을 지켜냈기 때문에 아버지로서 떳떳하게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상영을 했을 때 황상기 씨가 무슨 말씀을 해주셨나요? 황상기 아버님도 그렇고, 저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처음 봤거든요. 눈물이 멈추지 않았어요. 뒤풀이 때도 계속 눈물이 나서 아버님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어요. 황상기 아버님은 영화를 보고 행복해 하시면서 “잘했다. 행복하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요즘은 저희 아빠보다 더 저를 자랑하고 다니세요. 손수 담근 젓갈도 챙겨 보내주시고요. 저도 자주 연락 드려요. 행사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찾아 뵙고 있어요. |
처음 영화를 찍을 때부터 본인은 괜찮은데 주위에서 이런 저런 걱정을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저를 소개해 준 선배도 “축하해, 그런데 내가 잘 한 건지 모르겠다”는 말을 했어요. 처음엔 이해를 못했죠. 저는 어떤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할 만큼 무지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한 명, 두 명 걱정하는 소리를 들으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걱정할 일을 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영화를 다 찍으면 개봉일이 잡히는 게 당연한데, 다들 마치 대단하다는 듯 “정말 개봉해?”하면서 놀라니까 솔직히 야속하기도 했어요. ‘왜 다들 저러지? 그럼 이 영화가 개봉을 못했으면 좋겠나?’ 이런 비뚤어진 생각도 하게 됐고요. 물론 다들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 이야기겠지만, 그런 걱정들이 오히려 조금 버겁기도 했죠.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면 답답할 것 같다, 보기 힘든 영화일 것이다’라고 미리 영화 보기를 두려워하는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을 것 같아요. <또 하나의 약속>은 ‘사회에 큰 목소리를 내고 무언가 해달라’고 주동하는 영화가 아니에요. 이런 선입견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저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정도로 작은 관심을 가져 주시는 게 중요한 영화에요. 개인이 거대기업과 싸우는 내용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딸과 약속을 끝까지 지켜낸 아빠의 따뜻한 이야기이니까요. 떳떳한 아빠와 가족들의 이야기에요. 따뜻하게 웃을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부담을 갖기 보다는 따스한 마음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글 이지영 기자 | 사진 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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