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약속

"삭발하며...백혈병 걸린 윤미 마음 이해했죠" [인터뷰] '또 하나의 약속'이 박희정에게 남긴 것들..."가족이 생겼어요"

참된 2014. 2. 9. 18:01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대기업 진성에 취직했다가 백혈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온 윤미 역의 배우 박희정이 24일 오후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스타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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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스타 ■취재/이선필, 박민영 기자·사진/이정민 기자|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지난해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또 하나의 가족>이란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숨진 고 황유미씨의 실화를 토대로 그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사건 전후 유가족을 다룬 이 영화는 투박하지만 따뜻했고, 관객들에게 큰 호응 또한 받았다.

<또 하나의 약속>의 포스터를 자세히 보면 작은 글씨로 여러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바로 십시일반으로 제작비를 보탠 '제작 두레' 참가자들의 이름이다. 약 8천 명의 시민들의 모금으로 제작된 영화인만큼 그 의미도 특별하다. 오는 2월 6일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 첫 주연을 맡은 신인배우 박희정은 설렘과 걱정을 동시에 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캐스팅 직전 고 황유미씨 추모제 찾아 기도했어요"

박희정은 첫 촬영부터 택시 안에서 사망하는 장면을 연기했다. 백혈병에 걸린 윤미를 연기하기 위해서 머리를 삭발해야만 했다. 가발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박희정은 머리를 현장에서 미는 '삭발'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는 "삭발도 배우의 특권"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사람들이 제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이상했어요. (웃음) 윤미를 과하지도 않게 덜하지도 않게 연기하고 싶었거든요. 긴 머리를 깎으면서 한창 꾸밀 나이에 육체적 병을 얻은 윤미의 마음을 더 이해할 수 있었어요.

사실 영화에선 편집돼서 잘 보이진 않지만 윤미가 쓰러지는 장면에서 원피스를 입고 있어요. 회사 동료들과 신화 콘서트를 보러가기 위해 입은 옷인데 그 옷을 입고 외출은 한 거죠. 어린 나이의 여자에겐 옷과 머리를 꾸미는 게 참 큰데 그걸 누리지 못하니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 생각에 감정이 이입됐죠."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중 한 장면. 진성전자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에 걸린 윤미(박희정 분)와 아버지 상구(박철민 분).
ⓒ O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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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부터 박희정이 윤미 역에 캐스팅 된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배우가 사정상 하차하면서 첫 촬영 일주일 전에 투입되었다. 박희정은 캐스팅이 결정되기 전 열린 고 황유미씨 추모제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박희정은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차 오디션이 끝나고 아직 영화에 합류 여부를 몰랐을 때였는데 추모제 소식을 듣고 갔어요. 가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너무 약하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안에서 '이분들은 강하다'고 느꼈거든요. 그때 유미씨에게 '배역을 욕심낸 내가 부끄럽고, 부디 유미씨 억울한 마음을 잘 알고 표현해 줄 사람을 선택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영화에 참여하게 되면서) 유미씨가 선택해줬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삭발이 아쉽지 않았죠. 올해 곧 7주기 추모제가 열리는데 참석해서 꼭 확인받고 싶어요. 제가 잘 해낸 건지, 그리고 유미씨를 표현하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리고 싶어요."

밝은 성격의 박희정, <또 하나의 약속>으로 울보가 되다

 "유미씨가 절 선택해줬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어요. 그래서 삭발이 아쉽지 않았죠. 올해 곧 7주기 추모제가 열리는데 참석해서 꼭 확인받고 싶어요. 제가 잘 해낸 건지, 그리고 유미씨를 표현하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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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정은 지난해 12월 15일 경희대에서 열린 시사회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많은 분들이 우리 영화를 응원해 준다는 것에 감동해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는 그는 "영화 <써니> 때는 제 모습이 창피해서 숨기도 했는데, <또 하나의 약속>은 제 연기보다 영화 자체가 보여 가슴이 먹먹했다"라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학창시절 오락부장을 도맡아 할 정도로 밝은 성격의 박희정은 어릴 때부터 연기자를 꿈꿨다고 한다. 영화 <써니>(영진 역)로 스크린에 데뷔했지만, <또 하나의 약속>이 주목 받으면서 얼떨떨하다고. 영화를 찍을 때보다 촬영이 끝난 후 더 많이 울었다는 박희정은 성격과 달리 최근까지 '울보'가 된 사연을 전했다.

"고 황유미씨 부모님에게 삭발한 제 모습을 보여드리기 싫었어요. 영화 촬영이 끝나고 쫑파티 때 일부러 가발을 쓰고 갔죠. 그 자리에서 사진을 함께 찍는데 부모님께서 '한 번 보여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가발을 벗었고 유미씨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는데 서로 말없이 보다가 눈물이 터졌어요. 유미씨 아버님은 끝까지 웃고 계셨어요. '좋은 날이라 울고 싶지 않았다'고 나중에서야 말씀하셨죠."

<또 하나의 약속>으로 박희정은 아버지가 세 명이 됐다.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인 황상기씨, 그리고 영화에서 아버지로 등장한 배우 박철민까지 말이다. 이들을 언급하며 박희정은 "앞으로도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을 다룬 영화가 많이 만들어 졌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받기 전까지 실제 삼성반도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자신을 회상하면서 "억울한 일에 관심을 갖는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람을 전했다. 

"이름 널리 알려지지 않아도 연기로 믿음 주고 싶어"

 "우리나라엔 여배우란 말은 있어도 남배우란 말은 잘 안쓰는 거 같아요. 여배우 하면 다가가기 힘든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이라고들 생각하는데, 전 그런 여배우보다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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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을 앞두고 현재 <또 하나의 약속>은 전국 시사회를 진행 중이다. 그만큼 일반 관객들을 만날 기회 또한 생긴 셈이다. 시사회장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시민들을 만나며 박희정은 "아직 배우이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알아본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고 소회를 전했다. "전부터 꿈꿔왔던 일이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며 박희정은 "촬영 때보다 요즘 행동이 더 조심스럽다"고 전했다.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은 저라는 사람을 안다는 얘기잖아요. 그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행동도 더욱 조심스럽고, 신경 쓸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전 평범한 사람인데 혹시 저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섭섭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죠."

또한 박희정은 "스타보다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약속>을 하며 이름은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출중한 연기력을 지닌 배우 또한 많다는 사실을 알았단다.

"우리나라엔 여배우란 말은 있어도 남배우란 말은 잘 안쓰는 거 같아요. '여배우' 하면 다가가기 힘든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이라고들 생각하는데, 전 그런 여배우보다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리고 오래 좋은 연기를 하고 싶어요. 사람들이 제 이름은 잘 몰라도 '저 배우 연기 잘하니까 믿고 보자'며 말하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