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비정규직 철폐투쟁

비정규직 투쟁의 역사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참된 2012. 12. 30. 01:08

아래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http://cafe.daum.net/happylaborworld)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비정규직 투쟁의 역사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1. 시기별로 본 비정규투쟁의 역사

비정규직 투쟁 역사는 여러 방향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고용안정과 권리보장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2000년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전선에 나선 것이 오늘날 비정규직 문제를 널리 인식시켰다. 두 번째는 비정규직 확산과 제도화를 저지하고,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화하며, 노동기본권을 쟁취하는 투쟁이다. 이 투쟁은 지금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 번째는 정규직 안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정규직화 또는 일상의 차별을 철폐하는 투쟁을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차원의 운동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되면서 비정규직 투쟁을 발전시켜왔다. 투쟁의 역사를 서술할 때에는 이 세 가지 투쟁의 유기적 연관을 고려해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힘입어 비정규직 운동이 발전해왔던 만큼 여기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을 중심으로 서술하게 될 것이다.

 

(1) 1999년 비정규직 투쟁의 출발 -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재능교육교사노동조합

지금과 같은 폭발적 투쟁의 시초로 99년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투쟁과 재능교육교사노조의 건설을 꼽는다. 특수고용 노동자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재능교육교사 노동조합도 1999년에 만들어졌다. 그런데 재능교육교사 노동조합이 만들어질 때만 해도 ‘특수고용’에 대한 인식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투쟁의 핵심 요구로서 ‘위탁계약’과 관련한 문제들이 등장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서 이후 비정규직 투쟁의 중요한 부문으로서 ‘특수고용’ 문제에 대해 제기하는 기초적 문제의식을 갖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투쟁한 시기는 하청들이 이미 구조조정 때문에 모두 길거리로 내몰렸고, 정규직 노동자들이 힘겹게 구조조정 저지투쟁을 위한 파업을 진행할 때였다. 이 투쟁에 대해서 다음의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 첫째는 구조조정 투쟁과 비정규직 투쟁으로 전선이 이원화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 때만 해도 비정규직 투쟁이 결국 구조조정 저지 투쟁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셈이다. 두 번째는 정규직과 독립적으로 비정규직이 투쟁을 하는 것, 독자적인 조직화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관계가 구조조정 과정에서 분리되고 이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투쟁이 필요하며, 이들과 함께 할 것인가의 선택이 오히려 정규직 노동자들의 몫이라는 인식이 없었다. 그만큼 노동운동 전체에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2) 2000년 폭발적 투쟁의 시작 - 투쟁 과정에서 성과를 남기다.

비정규직 투쟁이 폭발한 것은 2000년이라고 볼 수 있다. 시설관리 용역노동자들의 설움을 딛고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에 나섰고, 대우 건물을 관리하는 시설관리 노동자들인 동우공영 노동조합도 파업을 시작했으며, 파견법에 명시된 “2년 이상 고용시 정규직으로 간주한다”는 조항 때문에 파견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쫓겨남에 따라 방송사 비정규노조의 투쟁이나, 길병원 제니엘 노동자들이 투쟁했다. 대상식품 사내하청 노동자들도 매우 질긴 천막농성투쟁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랜드와 롯데호텔 노동조합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힘차게 투쟁하며 성과를 남겼다. 이 투쟁들은 매우 힘들긴 했어도, 성과를 남겼다. 임단협 쟁취와 비정규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노동조건 개선등이 이루어진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사회화하려는 운동진영의 노력도 많이 있었다. 20여개의 노동사회단체로 구성된 ‘파견철폐 공대위’에서는 파견법과 간접고용의 문제를 폭로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원해왔으며,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비정규기본권 공대위’에서는 비정규직에 대한 법개정 시도를 하는 등 비정규직이 얼마나 기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지를 폭로했다. 그러나 이 투쟁 역시 폭발적으로 터져나오는 주체들의 힘에만 의지하고 있었고, 아직은 ‘비정규직들’의 문제로 좁혀졌다.

그리고 비정규직 투쟁의 성과는 동시에 비정규직 노동자들 투쟁의 한계를 보여주는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 투쟁을 통해서 용역 재계약 문제나 원청의 사용자 책임 문제,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자성 문제, 파견법의 한계들이 발견되었고, 이것을 돌파할만한 법적인 장치들이 현실적으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남은 것은 투쟁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본과 정권은 1년 동안의 폭발적 투쟁경험을 통해서 대응논리와 탄압방식들을 세련되고 일관되게 구사하게 되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해관계의 분리 등을 시도했다. 또한 자본은 비정규직 확장을 제도화하고 비정규직에 관한 법률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200010월 노동부에서 발표한 「비정규근로자 보호대책」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3) 2001년 비정규직 전선형성 - 한국통신계약직노조, 전국건설운송노조, 캐리어 사내하청노조

이렇게 법 개악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본은 힘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양보하지 않았다. 2001년에 들어서서 결국 이러한 상황에 맞설 수 있는 것은 말 그대로 비정규직 전선을 설치하는 힘있는 투쟁뿐이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한국통신계약직 노조와 전국건설운송노조, 캐리어사내하청이 담당했다. 한국통신계약직노조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비정규직들이 어떻게 잘려나가는가, 이에 대한 공동투쟁이 왜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건설운송노조는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쟁취라는 중요한 요구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사측의 분할 책동에도 불구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투쟁하는 힘있는 선례를 남김으로써 사측의 기도를 분쇄해야 했는데, 이 역할은 캐리어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이 투쟁들은 단위사업장 투쟁으로 평가되어서도 안 되고 투쟁 요구의 쟁취 여부로 평가되어서도 안 된다. 이 투쟁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인정받고, 이후 조직화의 기틀을 마련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자본과 정권의 일사불란한 책동에 의해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이 근원적으로 말살될 것인가를 가름하는 중요한 대표투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투쟁 모두 2001년 정세가 갖는 의미가 부각되지 못한 채 2000년 폭발적인 비정규직 투쟁의 연장으로만 판단되었다. 개별 비정규직 투쟁으로만 이해되고, 이것이 전체 민주노조운동에 미칠 영향에 대한 고려가 없었다. 그러나 자본은 달랐다. 건설운송노조의 투쟁에 경총과 전경련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왔고,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조합과 캐리어 사내하청 노동조합의 투쟁에 대해서도 자본가 집단 전체가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이 투쟁이 가져올 파장에 대비해왔던 것이다. 또한 캐리어 사내하청에서도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강력하고 폭발적으로 조직하고, 특히 사내하청 노동자들만의 투쟁으로도 공장을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이 자본가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었기에, 그들은 도급계약해지를 꺼내들었다. 이 때 정규직 노동조합과의 공조가 제대로 이루어져서 위력적인 적인 파업투쟁을 만들 수 있었다면, 이후 사내하청 조직화의 의미는 민주노조운동 진영 전체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4) 2002년 침체기 - 노동기본권에 대한 의식의 확산

대표적인 투쟁사업장이 무너지면서 남은 것은 패배감과 무력감이다. 한진관광 면세점 노동자들, 하나로 테크놀로지, LG 화학 사내하청인 남성기업노동조합은 뚫고 나갈 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투쟁 주체들의 의지에 기대서 끈질기게 버텨야 했다. 자본은 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민주노조운동의 연대투쟁도 활발하지 못했다. 이 투쟁은 자그마한 노조의 작은 투쟁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러면서 투쟁했던 노동자들은 개인들의 결의와 분노만을 남긴 채 투쟁을 마무리해야 했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완전히 부정하는 판례가 속속 나오고, 애써 쟁취한 단협이 휴지조각이 되는가 하면,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서 원청은 배를 째는 것으로 일관하고, 불법파견 문제에 대해서도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그나마 작은 승리를 했던 2000년의 투쟁 주체들도 힘겨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롯데호텔이나 이랜드에서도 애써 쟁취한 정규직화 성과가 사측의 공세에 밀려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주체들이 힘들어졌다고 해서 비정규직 투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 의미만큼 주목받지는 못했지만, 여수지역건설노조의 투쟁은 비정규직투쟁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처음 900여명으로 시작되어 파업투쟁 과정속에 대오는 2000명을 넘어섰다. 사업장에 관계없이 여수산단 전체를 대상으로 사측의 공동교섭단 구성을 요구하고 지역투쟁을 전개했다. 여수건설노조의 80여일간의 총파업투쟁은 비정규직 투쟁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투쟁이었다. 그리고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내부를 추스르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단위사업장의 문제를 넘어서 ‘노동기본권’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했다. ‘특수고용 대책회의’ 차원에서 공동행동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정규직 노조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갖고 함께 투쟁하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각 노조에서는 단협에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철폐’ 조항이나, ‘정규직화’ 조항을 제출하기 시작했고, 기아자동차노조 광주지부에서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거나, 계약직으로 전환시켰고, 이후 계약직 노동자들을 정규직화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 민주노총에서도 비정규직 문제를 핵심적인 과제로 제출하고, 조직활동가를 만들어내고,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계획을 조금씩 세웠다.

 

(5) 2003년 비정규운동의 성장기 - 사내하청노조 / 화물연대 /이용석열사투쟁/ 비정규직공동투쟁

투쟁에서 패배했다고 해도 새로운 투쟁은 예고되는 법이다. 의식적으로 대규모 조직화를 시도한 활동가들이나 또는 연맹 민주노총 등의 힘에 의거해서 대규모 비정규조직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현대자동차 아산공장에서부터 시작해서, SK 인사이트코리아 노동자들의 3년의 투쟁의 결실로 불법파견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통로가 열리면서, 불법파견의 형태로 일하고 있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불씨가 지펴졌다. 아산을 시작으로 2003년 한 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노조(울산), 금호타이어 사내하청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등 사내하청노조가 건설되었다.

또한 2003년 화물노동자들의 물류를 멈추는 투쟁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생존의 벼랑 끝에 서있는 화물노동자들은 5월 파업을 통해 노정합의를 이끌어냈다. 근로복지공단의 이용석열사 투쟁으로 촉발된 하반기 투쟁은 근로복지공단 노조에는 공단을 대상으로 한 단체협약을 성과있게 체결하는 성과를, 민주노조운동 진영에 비정규직 문제를 걸고 함께 투쟁하는 경험을, 그리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강제하는 성과를 가져왔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동투쟁도 힘차게 진행되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은 비정규노조대표자연대회의를 결성하고 공동의 투쟁을 결의했고, 하반기 비정규 노동자대회를 성사시켜냈다. 특수고용노동자들의 공동투쟁과 시설관리노동자들의 사회적 투쟁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국회앞에서 독자적인 천막농성을 진행하면서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인정(근기법 적용과 노동3권 보장)을 주장하는 투쟁을 벌여냈고, 시설관리 노동자들은 불법용역 철폐, 최저낙찰제 반대, 감시단속적 업무의 근기법완전적용문제 등 시설관리노동자들의 사회적 요구를 내거는 투쟁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의 전면에 나선 것을 우려한 혹독한 탄압이 진행되었다. 화물연대 지도부, 사내하청노조 지도부에 구속영장이 쏟아져 나왔다. 건설일용노조의 노조활동을 공갈, 협박, 금품갈취로 간주하고 노조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구속수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투쟁이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노동조합을 유지하고 조직력을 정비해갔다.

 

(6) 2004- 전체 노동자 총단결로 비정규노동법개악 저지, 노동기본권 쟁취!

현대중공업 사내하청노조 박일수열사의 분신투쟁으로 촉발된 2004년 투쟁은 또다시 맞이한 동지의 죽음 앞에서 처절하게 진행되었다. 정규직 어용노조의 방해와 민주노조운동의 무관심 속에 진행된 어려운 투쟁이었지만,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등 비정규직 문제를 쟁점화 할 수 있었다. 또한 04년 의미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의 성과도 찾아볼 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동투쟁의 성과로 금호타이어에서는 불법파견 시정조치를 받은 비정규직 282명 전원에 대한 정규직화를 쟁취해 냈다. 현대자동차에서는 04년 정규직 비정규직 공동임단투를 진행하면서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독자 파업투쟁을 결의할만큼 성장했다.  

04년 비정규직 투쟁에서 핵심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법 개악안에 대항하는 투쟁을 전개하면서 ‘전비연’이라는 상징적 투쟁의 구심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보호법안’이야말로 비정규직 양산법이며, 현재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을 가중시키는 안이라는 점을 깨닫고 즉각 열린우리당 농성에 돌입하였다. 그것을 통해서 전체 노동자 총파업 투쟁을 이끌어냈다. 이런 상징적 투쟁의 성과로 정부가 아무리 ‘보호’법안이라고 우겨도 결국 그것은 노동법 개악이며, 비정규직 양산법임을 투쟁으로 확인시켰고, 아무도 투쟁할 수 없으리라던 상식을 깨고 총파업을 조직할 수 있었다.

비정규직의 선도적 투쟁은 이후 국회 앞 타워크레인 점거농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대중투쟁으로 조직되지 않는 선도적인 문제제기는 그 자체로 수명을 다했고, 이제 전체 민주노조운동이 그 투쟁을 이어받을 수 있는가 아닌가가 관건이었다. 하지만 그 투쟁은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파업이 되었고, 그 이후 내내 민주노조운동의 발목을 붙잡은 채 비정규법안에 대한 국회 안 논의에 매달리는 상황이 되었다.

 

(7) 2005- 불법파견 투쟁의 한계, 지역 연대투쟁의 출발, 플랜트 노동자들의 투쟁

2005년은 노동법 개악 저지 문제가 여전히 중요한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것은 이미 전체 민주노조운동 진영의 취약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비정규 노동법 개악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더불어 진전해야 했지만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고 비정규노조들도 그 투쟁을 끌고가기 어려웠다. 다만 비정규노조 차원에서는 소수의 선도적 투쟁을 넘어서서, 기획된 투쟁이 많이 만들어졌다.

울산 플랜트 노동자들도 포항과 여수산단의 투쟁의 경험을 이어받아 투쟁을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이미 자본가들은 대응을 준비하고 있었다. 울산 플랜트 투쟁이 지역을 휩쓰는 엄청난 가두투쟁으로 발전했지만 원청의 탄압과 경찰의 탄압으로 투쟁은 큰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마무리되었다. 또한 금속연맹도 불법파견 릴레이 진정을 하면서 공동투쟁을 위한 시도를 하였다. 이로 인해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3, 그리고 하이닉스-매그나칩,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대우자동차 창원공장 등이 불법파견을 위한 공동투쟁을 시작하였다. 기아자동차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고, ‘정규직화’를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불법파견 투쟁은 실패했다. 노동운동진영은 금호타이어 투쟁의 성과를 쉽게 생각해서 안일하게 대응한 면이 있는 반면에 자본가들은 불법파견을 오히려 구조조정-진성도급화를 위한 계기로 활용했고 완강하게 버텼다. 정규직-비정규직의 공동투쟁도 쉽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내부에 의사소통의 갈등, 계급적 관점의 부족 등으로 쉽게 전선이 무너졌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공동투쟁도 현실화되지 못하고 개별 사업장의 투쟁으로 전락하면서 원청사용자 책임 인정 문제를 사회화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그렇지만 조금 더 고무적인 점이 있다면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노동자성 쟁취를 요구로 해서 공동의 기획투쟁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덤프연대의 투쟁을 계기로, 그리고 화물연대 동지의 분신을 계기로 전체가 공동투쟁을 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맞이하였다. 특수고용 노동조합 대표자들은 여의도에서 공동단식농성을 하면서 특수고용 노동자성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을 조직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투쟁은 단위사업장의 투쟁일정을 맞추는데 실패하면서 단식농성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지만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단위사업장의 문제를 넘어서 전체의 요구를 갖고 공동투쟁을 조직했다는 것은 이후 큰 의미로 남는다.

 

(8) 2006- 치열한 고공농성들, 그리고 외주화 반대투쟁의 힘

2006년이 노동자들에게 패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비정규법 개악안을 실질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2006년은 몇 번에 걸쳐서 처리와 유보를 반복하고 국회 일정에 매달렸다. 이 투쟁을 막기 위해서 현장투쟁단이나 공동투쟁본부등이 만들어졌으나 2004년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국회 안의 논의, 수정안에 대한 논의로 좁혀졌기 때문이다. 결국 동원형 투쟁으로 투쟁이 전락하면서 비정규법안 통과를 모두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획투쟁에 실패하면서, 그리고 정규직의 엄호를 받지 못해서 길거리로 쫓겨난 노동자들은 최후의 수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특수고용 노동자들도 노동조합이 인정되지 못하면서 노동자들도 극단의 투쟁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고공농성이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광주 삼성전자에 대항하여 고공농성을 했고, 대우자동차 창원공장 동지들이 굴뚝에 올라가서 농성을 했다. 화물연대 아세아시멘트 동지들, 하이스코 동지들이 모두 고공농성을 했고, 현재 베스킨라빈스 동지들과 타워크레인 동지들이 고공농성이다. 한뼘 땅도 허용되지 않고 길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문제를 환기시키고 투쟁의 돌파구를 열려고 했다.

그런데 이 투쟁들은 실질적으로 교섭으로 타결되고 있다. 하지만 자본과 정권도 이제는 무작정 탄압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노동자들의 강한 저항이 있을 때에는 일정하게 양보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이제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 여전히 살아남는 노조들은 대규모 노조들이고, 사회적으로 쟁점화된 곳들이다. 이런 사업장에서는 자본이 안주하도록 만들고, 이 투쟁이 확산되지 못하도록 한다. 이 투쟁이 ‘원청의 사용자 책임 인정’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노동자성 쟁취’ 투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단위사업장 문제가 되는 이상 타결의 성과는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투쟁사업장은 똑같은 어려움을 또다시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2006년에 와서야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공동투쟁의 사례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KTX 투쟁은 비록 힘든 과정 끝에 투쟁을 정리하고 있으나, 외주화로 인해서 간접고용이 된 노동자들의 경우, 외주화를 다시 되돌리는 투쟁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또한 전통적인 비정규직인 건설노조에서도 꾸준한 조직사업과 투쟁의 성과로 대구지역에서 총파업을 해냈다. 이 결과로 지역건설노조의 단일노조화를 이루고 건설업종에서의 단일 조직을 만들 수 있었다. 투쟁을 통한 조직건설의 의미를 보여준 것이다.

 

(9) 2007- 새로운 투쟁, 그러나 힘에 부친 투쟁

2007년에는 아무도 폭발적인 투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물론 비정규법안이 통과된 이후 무수히 많은 계약직 노동자들이 해고될 것임을 예견했고 이에 맞선 투쟁을 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해오기는 했다. 하지만 노동운동진영은 너무나 무기력했다. 정권과 자본은 연일 무기근로계약 등을 발표하면서 노동자 대중들의 시야를 흐리고, 학교비정규직 등 현장에서 개별로 해고되는 노동자들은 집단화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외롭게 싸웠다. 민주노총은 비정규법 개악안에 대해 ‘시행령’에 개입해야 한다면서 오히려 전선을 흐리고 노동부와의 논의를 중심으로 배치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투쟁은 바로 ‘유통부문’에서 벌어졌다. 뉴코아와 이랜드에서 정부의 비정규법으로 인해서 계약해지되거나 외주화되는 것에 맞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이 파업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하는 것이었고 강도 높은 점거파업을 통해 자본의 허를 찌르고 대규모 투쟁으로 많은 이들의 지지와 지원을 이끌어냈다. 민주노조운동은 이 투쟁을 중심으로 다시 활력을 찾아가고 천인선봉대, 몇 차례의 집중적인 매장봉쇄 투쟁 등을 벌이며 다시 비정규법안에 맞서는 투쟁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무금융에서도 코스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조직되어서 집단적 로비점검을 하여 기본협약을 체결하고 이후 긴 투쟁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진영이 이렇게 열린 전선에 집중하면서 이것에서 승리하기 위한 집중투쟁을 했지만 이 투쟁이 갖는 정치적 의미들이 제대로 확인되고 노동권 쟁취와 비정규법안 폐기로 나아가는 힘을 창출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결국 이 싸움이 지지부진해졌다. 전선을 설치하지 못한 채 주체들의 투쟁에 의거해서 이 투쟁을 지원하는 것만으로는 싸움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10) 2008년 비정규투쟁의 개별화

노동운동진영 전체의 힘을 모은 집중투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항상 주체들의 결의에 의한 강도 높은 투쟁이 진행되고 그 투쟁이 패배하게 되면 전체 노동자들의 위축으로 다가온다. 2008년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그러한 것이었다. 뉴코아-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이 마무리된 이후 KTX도 투쟁을 마무리했다. 투쟁에서 승리하지 못한 채 깊은 상흔을 많이 남겼다. 그렇지만 사회적으로는 촛불투쟁으로 반이명박 전선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리고 함께 사회화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면서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100일 가까운 단식투쟁이 벌어졌고 이 투쟁은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알리면서 비정규직 투쟁을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인식시켰다.

하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이제 개별화되고 있다. 더 이상 하나의 투쟁이 갖는 의미들이 전체 운동 속에서 의미를 갖지 못하고, 이 투쟁들을 지원하는 단위들도 그 투쟁을 묶어서 전선으로 만드는 시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 강남성모병원 투쟁도 파견법에 대항하는 끈질긴 투쟁이고, 명지대 노동자들의 투쟁도 비정규법과 대학 구조조정으로 인한 투쟁이지만 이 투쟁들은 마치 하나의 해고사업장으로만 다뤄지고 있고 이것을 투쟁의 전선으로 만들려는 흐름도 없어지고 있다. 이것은 투쟁을 선도하는 큰 투쟁이 없는 것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투쟁의 전선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또한 민주노조운동이 산별노조로 재편되면서 비정규투쟁이 개별 사업장의 문제로 환원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2. 비정규투쟁의 역사에서 본 비정규 운동의 성과와 한계

 

이러한 비정규직 운동의 성과와 한계는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에서 평가 자체가 한계를 갖고 있다. 비정규직 철폐운동이 단지 비정규노동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사회적인 과제이며, 전체 민주노조운동의 과제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확장되지 못하고 지금까지의 투쟁은 비정규노조들의 투쟁에 의존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비정규노조를 힘들게 하고, 투쟁의 성과가 사회적으로 확장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지금 나타나는 한계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 비정규직운동이 이루어져왔던 것에 기인하는 것이다.

(1) 비정규직 문제의 사회화

비록 비정규직은 56%로서 이미 일반화되고 있으나, 비정규직을 정상적 고용형태로 간주하게 만들고자 했던 정권과 자본의 의도는 온전하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것은 너무나 힘들게, 치열하게 투쟁해왔던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회적으로는 비정규직이 문제가 있는 고용형태이며 비정규법안은 악법이라는 사실은 이미 사회화되어 있다. 그리고 비정규노동자들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흐름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비정규운동의 의제들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비정규직 문제’라는 추상적인 문제가 사회화되었을 뿐,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고용불안’과 ‘저임금’ 문제만이 집중적으로 부각된다. 비정규직이라고 했을 때 차별 등으로 인한 인권의 문제, 정치적 권리의 문제, 그리고 건강과 생존의 문제 등 다양한 방안의 의제들이 부각되고, 이러한 내용들이 사회화될 때 온전하게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화될 수 있다.

또한 모든 투쟁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으로만 좁혀지면서 이 투쟁에 성과가 남아도 개별의 성과가 되고 패배하기라도 하면 투쟁 자체의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이 단지 개별 사업장 노동자들의 고용문제나 노동조건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고 구조적인 문제인데도 투쟁 자체가 비정규노조만의 투쟁으로 좁혀지게 되면 이 투쟁의 결과가 확산되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노동권을 확장하는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쉽지 않게 된다. 그리고 광범위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것을 자기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노조의 투쟁을 통한 사회화의 성과를 정치적인 과제로 제기하고 투쟁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2) 개별사업장에서 노동권의 진전과 사회적인 후퇴

대공장이나 공공부문에서는 어느 정도 비정규노동자들의 고용이나 생활이 일정하게 보장되는 성과도 있었다. 노동조합의 일부 인정이라는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이 성과는 이미 조직되어 있는 일부 노동자들의 성과로만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내하청 비정규노동조합의 인정이 하청노동자의 노동권 인정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대공장이라는 존재 조건에서의 특수한 성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개별 사업장에서 노동권의 일부 진전은 있으나, 여전히 사회적인 의미에서 ‘노동권’ 자체는 전혀 진전하지 못한 상황이다.

오히려 노동권은 후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우선 비정규직법이 시행되면서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제도화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로 인해서 이미 자신은 ‘원래부터 비정규직’이라면서 이러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비정규직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면서 노동운동진영 일부에서는 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를 인정하면서 차별 개선을 위한 활동에 주목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오는 정도이다.

그렇지만 건설 등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 특수고용 대책회의를 구성하고 8년동안 싸워온 특수고용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원청사용자 책임 인정’이나 ‘특수고용 노동자성 인정’ 등의 요구는 구체화되었다. 그렇지만 아직 이것을 승리로 만들기 위한 힘있는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직 이러한 노동권 요구는 당사자들만의 몫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것을 어떻게 전체의 과제로 만드는가가 중요하다.

(3) 비정규 주체의 형성

정권과 자본은 비정규직을 시혜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시도를 계속해왔다. 그렇지만 비정규노동자들은 사회적 약자이거나 시혜의 대상이 아니며 권리의 주체로서 권리를 빼앗기고 있을 뿐임을 자신의 투쟁으로 분명하게 하였다. 그리고 노동법 개악 국면에서도 선도적으로 투쟁하고, 연대체를 건설하면서 각 산별노조 안에서도 비정규직의 권리와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하지만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한국노총을 포함해도 3%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3%의 조직률도 대공장 사내하청이나 화물연대, 건설기계 등 업종 중심 노조의 조직률이다. 이곳을 제외하고 어느 정도 조직된 곳은 시설업종이며, 그 외의 조직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조직되어서 스스로 목소리를 드러내야만 할텐데 지금의 조직률로는 절대로 자신을 주체로 세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가장 고통을 당하고 있고 자본의 착취가 집약되는 영세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전략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비정규직을 주체로 세우는 데 꼭 ‘노조의 형식’만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그럴 때 비정규직의 주체 형성이 가능하다.

그런데 노조로 조직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비정규직 철폐운동의 주체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지금 비정규노조들은 그 노조를 유지하기 위한 생존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기본권도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고군분투하다보니 약간의 성과만 주어져도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아직 간부들이나 활동가를 양성하기 위한 프로그램도 갖춰져있지 못하다. 그리고 노동조합운동의 관성을 쉽게 따라가기도 한다. 정규직 노조나 상급단체에 대한 의존도도 강하다. 비정규직 주체형성을 위해서는 비정규노조의 활동을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4) 계급적 단결의 가능성 확보

비정규운동의 과정에서 계급적 단결의 가능성은 여전히 어렵다. 일부 사업장에서는 꾸준한 활동과 정규직-비정규직 연대를 통해서 계급적 단결에 대한 인식은 높아져가고 있고, 그것이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거나, 비정규직 조직을 확대하는 등의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것이 운동의 혁신을 가능하게 할 정도의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개별 사업장에서의 활동으로 국한된다. 이것은 단지 ‘모범사례’일 뿐이지, 모두가 지향해야 할 운동으로 이야기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설령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관계가 좋고 사업이 진행된다고 할지라도 정규직노조의 대리주의적 경향과 비정규직노조의 정규직 활용론이 맞부딪치면서 계급적 단결로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일부 개별사업장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오히려 더 후퇴하고 있다. 이것은 비정규직운동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정규직이 확산됨으로써 오히려 고용에 대한 공포감이 더욱 커지고, 그렇게 되면 일부가 살아남기 위해서 애를 쓸 수밖에 없는데, 정치운동이나 노동조합운동이 희망을 제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상태가 유지되고 계급적 단결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비정규직 안에서도 분할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 현재까지 조직된 단위들이 사내하청이나 공공부문이나 업종별 형태가 대부분이라서 사내하청도 내부에 분할이 가능하고, 간접고용인가 직접고용인가에 따라서도 여러 분할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 비정규직 노조들도 이러한 분할을 넘어서고 있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 운동 자체가 계급적 단결을 저절로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며 언제라도 자본의 분할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기에 계급적 단결은 말 그대로 ‘운동적 고민’을 갖고 해야 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마치며 - 몇가지 과제

지금이 비정규운동이 가장 어렵고 힘들 때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지금까지 비정규운동을 평가하면서 과연 전망이 있는지 묻기도 한다. 그렇지만 비정규투쟁 주체들로 우리가 역사적 한 획을 그어왔다면 이제는 광범위한 불안정노동자들의 조직화와 계급적 연대의 가능성을 만들어냄으로써 이제 새로운 비정규운동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오늘의 주제는 비정규투쟁에 대한 평가이므로 여기에서 모든 과제를 이야기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몇가지 우리가 새로운 비정규운동의 가능성을 열기 위해서 몇가지 검토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고 본다.

첫 번째는 중요한 것은 주체의 취약함을 넘어서기 위해서 얼마나 대중적인 조직화를 위해서 애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의 취약함으로 인해서 개별 사업장의 고립분산적인 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대중적이고 공공연한 조직화를 위해서 힘을 쏟아야 할 때이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노동조합으로의 조직화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주체를 호명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다양한 조직화의 방식과 경로를 고민하면서 각자가 속한 공간에서 비정규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실험을 해야 한다.

두 번째는 비정규투쟁사업장 조차도 이제는 비정규운동의 운동적 의미보다는 자기 생존에 너무나 많은 힘을 쏟고 있기에 비정규노조들이 주체화될 수 있도록 많은 이들이 함께 지원해야 한다는 점이다. 비정규직 투쟁을 사회적 권리의 쟁취로 진전시키지 않는 이상 개별 사업장의 투쟁으로서는 더 이상 비정규운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지금처럼 자기만 살아남기 위해서 고군분투하지 않도록, 스스로의 투쟁 의미를 사회화하고 연대하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이 투쟁에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고민하고 조직해나가야 한다.

세 번째로는 경제위기 시기에 광범위한 불안정노동자들의 불만과 고통을 조직해야 한다는 점이다. 비정규노동자들에 대한 해고 문제와 고통이 더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으나 지치고 개별화된 비정규직들의 폭발적 투쟁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2008년에서 2009년으로 이어지는 투쟁들을 집중하고, 경제위기에 맞서는 불안정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제는 특히 비정규직 노동조합들이 정규직과 대당하는 지위에서 자신의 약함과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되지 않고 더 고통받는 불안정노동자들의 선두에 서서 투쟁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네 번째로는 생활권과 노동권의 요구를 확장해야 한다는 점이다. 노동권이라는 것이 특정한 제도적 권리로만 국한되면 안 된다. 지금의 노동권이라는 것은 안정된 고용을 전제로 하여 형성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러한 노동권에 비정규직을 끼워맞추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 불안정노동이 일상화된 시기에서 노동권에 대한 인식을 확대해나가야 한다. 그것은 ‘권리’의 개념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안정되고 떳떳한 일자리의 권리, 노동조건에 대한 권리, 사회보험의 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권리, 자주적 단결을 위한 노동조건`생활조건의 결정권,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권리 등이 제출되어야 하고, 이러한 권리의식을 확대하는 기획이 필요하다. 그리고 경제위기에 해고당하고 고용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정부가 지도록 요구하는 투쟁이 필요하다. “우리의 생존 정부가 책임져라 - 해고되거나 취업이 되지 않았을 때 실업급여를 취업 혹은 재취업 시기까지 완전하게 보장할 것”을 우리의 요구로 만들어볼 수 있다. 또한 최저임금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를 통해서 노동자들의 생활권을 쟁취하기 위한 새로운 투쟁을 시작할 수도 있다. 생활권이 우리의 권리임을 알리고 공세적으로 제기하는 실천이 필요하다. 그럴 때 고용과 생존을 분리시켜서 정권과 자본의 책임을 묻고 광범위하게 산개한 불안정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그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첫발을 디딜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