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 기사입력 2005-07-28 오후 3:20:28
프레시안은 돌베개 출판사와 공동으로 재일 조선인 도쿄 게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서경식(54) 교수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번역ㆍ연재한다. <디아스포라 기행-추방당한 자의 시선>(デイアスポラ紀行-追放された者のまなざし)은 서 교수가 일본의 진보적 월간지 <세까이(世界)>에 기고했던 인기 연재로 일본에서 곧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며 국내에서는 프레시안 연재 후 보완을 거쳐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된다.
'프롤로그 : 수레바퀴 자국 고인 물 속의 붕어(학철부어)'의 후반부를 지난 첫 연재에 이어 싣는다. 다음 주에는 제1장 '죽음을 생각하는 날-런던 2001년 12월'이 이어진다. <편집자>
일본 국적의 박탈
1948년, 38선의 남과 북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국가의 수립을 선언했다. 마침내 일본으로부터 독립했는데 서로 격렬하게 대립하는 분단 국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1950년에는 조선전쟁(한국전쟁)이 발발해 1953년의 휴전협정에 이르기까지 전투 상태가 계속됐다.
전쟁이 한창이던 일본 패전 후 7년째인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그 조약의 발효와 함께 재일 조선인들을 포함해 구식민지 출신자들은 일방적으로 일본 국적 상실 선언을 받게 된다. 강화조약 회담장에는 한국, 북한, 재일을 불문하고 조선인 대표는 일절 참가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당사자인 조선 사람들의 의향을 전혀 묻지 않은 채 국적 상실의 선언이 이뤄졌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한반도에서 일본에 건너온 사람, 강제 연행된 사람, 그 자손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 모든 재일 조선인이 한순간에 사실상 난민이 되었다. 그 후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재일 조선인 가운데 외국인 등록상의 국적란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고치는 사람들이 서서히 늘어갔다.
재일 한국인의 대부분은 조선(한반도) 남쪽 출신자들이다. 지금은 한국의 영토인 그 지역에 고향이 있고 친척과 연고자들이 살고 있으며 조상의 산소도 있다. 그런데 냉전 구조 속에서 한반도의 남북 분단 상태가 고착화된 탓에 조선 국적인 채로는 고향에 오고갈 수도 없었던 것이다.
또한 일본 정부는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대립을 강화하는 한편 1965년의 한일조약 체결로 한국만을 상대로 국교를 맺었다. 이 조약의 최대의 문제점은 일본 정부가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마지막까지 인정하지 않은 점이다. 그리고 이에 못지 않게 큰 문제는 재일 조선인의 거주권 부분에서 '한국 국적'과 '조선 국적'간에 부당한 차별을 두어 '조선 국적'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지극히 불안정한 법적 지위를 강요한 점이다.
'조선 국적'에서 '한국 국적'으로의 기재 변경은 그 전제 조건으로 대한민국에 국민 등록을 할 것이 요구되었다. 즉 남과 북이 성립된 분단 국가 중에서 남쪽의 국민으로 귀속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외국인 등록상의 '한국'이라는 기호가 사실상 한국 국적을 의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점을 달리해 보면 재일 조선인이라는 집단은,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가 연계한 압력에 의해 둘로 갈라져 한쪽은 난민상태를 강요당하고 다른 한편은 한국 국민이라는 틀 안에 가두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여전히 '조선 국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 중에는 자각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본시 조선은 하나'라는 생각을 소중히 하고자 하는 사람들, 재일 조선인이 형성된 역사의 기록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 자발적인 난민으로 기꺼이 불리한 지위를 택하고자 한 사람들, 또는 단지 기재 변경을 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등 다양한 입장이 뒤섞여 존재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 자신은 '한국 국적' 소지자다. 아버지가 일찍이 아마도 1960년대 전반에 '한국 국적'으로 기재 변경을 한 것이다. 국적이 한국인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 일본에 집과 직장이 있지만, 한국의 여권이 없으면 일본에서 국외로 나갈 수가 없다. 또한 일본 정부의 재입국 허가가 없으면 자택에 돌아갈 수도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경우 나를 외교상으로 보호할 의무가 있는 것은 일본 대사관이나 영사관이 아니라, 한국의 재외공관이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정말로 나를 보호해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한국이 군사 정권 하에 놓여 있던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에 있던 나의 두 형은 정치범으로 투옥되어 있었다. 한국 정부는 당시 여권 발급 업무를 재외국민통합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정부적이라고 간주된 사람에게는 여권을 쉽게 발급해주지 않았다. 내 경우 여권을 신청할 때마다 영사로부터 '면담'을 요구하는 호출이 있었다. 그 영사는 당시 KCIA(한국중앙정보부)라는 부서에서 파견된 정보 대책, 치안 대책의 전문 관리였다. 호출에 응해 면담하려 가면 옥중의 형들을 사상 전향시켜 협력하게 하라는 등의 요구를 했다. 호출에 응하지 않으면 1년이고 2년이고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이다.
갖은 불유쾌한 경험을 하고 어찌어찌 여권을 손에 넣어 해외에 나갈 수 있게 된 나는 설사 어떤 재난에 부닥치더라도 한국 대사관에만은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고, 항상 극도로 긴장해 있었다. 자기 형들을 투옥해 고문하고 있는 그 당사자인 정부가 나를 보호해주리라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믿어도 될까, 나는 아직도 안심하고 있지 않다.
무국적 상태
'조선 국적'의 재일 조선인은 현재도 사실상 무국적 상태다. 예외적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여권을 취득한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볼 때 여행, 유학, 상용 등의 목적으로 일본 국외에 나갈 때는 여권이 없는 채로 일본국이 발행하는 '재입국 허가증'만을 가지고 출국하게 된다. 만약 해외에서 불의의 사고나 사건을 당해도 외교상의 보호권을 행사해 줄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인인 K씨는 '조선 국적'을 가진 한 중견 기업의 기술직 사원이다. 집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섯 형제 남매 중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자식은 K뿐이었다. 인품은 좀 답답할 정도로 온건과묵하며,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도 좀처럼 없었다. 회사에서는 조선인이라는 것을 감추지 않고 본명을 쓰고 있지만, 좋은지 싫은지 동료들은 그 사실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K씨도 그런 담담한 직장의 분위기 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수년 전 어느 날 상사로부터 처음으로 독일의 견본시로 해외 출장 명령이 내렸을 때는 크게 당황했다. '조선 국적' 소지자인 자신에게 그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극도로 번거로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출장을 꺼려하는 것으로 상사의 오해를 살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선 국적'이라는 입장의 복잡한 사정을 설명해도 그것을 이해해줄 것인가. 어쩌면 상사는 '그럼 국적을 바꾸라'고 할 게 아닐까. 그것도 순전히 선의로.
애당초 그 자신도 자신의 입장의 복잡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하기 어려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뻐하는 딸이 '우리 반 아무개는 하와이로 가족여행 갔다 왔대. 우리 집은 안가?'라고 졸라도, 그는 '우리 집은 다른 집과는 다르단다'라고 애매하게 대답해 왔다. '왜?'라고 거듭 물어오면 언제나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곤 했다. 그러니까 그의 가족여행은 언제나 가까운 온천으로 떠나는 1박2일 여행뿐이어서 기념사진 속의 딸은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음력 설이나 추석 때 친척들이 모여 술자리가 벌어지면 택시 운전사를 하고 있는 손위의 사촌은 언제나 불만인지 허세인지 구분이 안가는 같은 말을 꺼내곤 한다. 차안에 의무적으로 명기하게 되어 있는 승무원 증에 본명을 쓰고 있는데, 그것 때문에 승객으로부터 싫은 경험을 하지 않는 날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밤의 유흥가의 승객은 심하다, 이것이 우리 서민이 경험하는 현실이다, '너 같은 엘리트는 모를 것이다'라는 것이다.
친척 중에는 벌이가 좋은 자영업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택시나 트럭의 운전수, 파칭코점이나 음식점의 종업원, 그렇지 않으면 재일 조선인이 경영하는 중소기업 근무자들이다. 그런 점에서 자신은 이공계 대학을 나와 일본 기업에 취직해 해가 갈수록 불만 없는 급료를 받고 있다. 기술 분야에서라면 관리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아버지 세대에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다.
실감은 잘 나지 않지만 역시 자신은 엘리트인가 보다고 K는 생각한다. 이 사촌처럼 노골적으로 싫은 경험을 하는 적도 별로 없으니까. 그렇지만 해외여행에서 돌아온 동료가 작은 선물을 돌리면서 '요즘은 너무 간단해서 국내 여행과 전혀 다를 게 없어'라고 쉽사리 얘기하는 걸 들으면, 납득할 수 없는 심정을 꿀꺽 삼키곤 한다. 동료들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조선인인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K씨는 그런 생각을 하지만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취한 사촌의 불평에 잠자코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결국 K씨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 '재입국 허가증'을 손에 쥐었다. 정식 여권이 없으므로 독일에 입국할 때 또 한 고비 겪을지도 모른다. 사고라도 일어나면 어느 나라 영사관에 상담하면 될까, 그것도 모르는 채로 어쨌든 출장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다수자에게는 당연한 것, 사소하기까지 한 것 때문에 K씨가 어떤 번거로운 심정을 경험해야 하는가. 어떤 불안에 처하는가. 그리고 그것에 일본은 어떤 책임이 있는가.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역시 복잡하군'이라고 한숨을 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복잡한 상태를 만들어 낸 1차적인 책임은 일본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복잡함을 풀어내고 이해하는 것은 당사자인 재일 조선인들에게 지극히 곤란한 일이다. 그래서 많은 재일 조선인들은 어떠한 연유에서 어떠한 구조에 의해 스스로의 아이덴티티(정체성)가 분열되어 있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항상 막연한 불안과 긴장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것은 재일 조선인뿐 아니라 현대의 디아스포라 일반에게 해당하는 부분일 것이다.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속의 붕어(학철부어)
1983년 내 나이 서른두 살 때 처음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당시는 어둠침침한 지하실에 던져진 것처럼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고, 내일의 자신조차 상상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랬던 것이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니 그동안 1년에 두세 번은 해외를 여행한 셈이다.
여행을 떠나면 미술작품을 감상하거나 음악이나 연극 등의 예술에 접하는 것이 즐거움이라도 할 수 있는데 그 견문을 가지고 기행문이나 에세이를 써 왔다. 그러나 새삼 생각해보면 확실한 여행의 목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일부러 여행을 떠난 이상,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미술관이나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감도 없지 않다. 아무런 목적도 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은 기분상 찝찝하니까 무리해서 목적 비슷한 걸 갖다 붙이는 것이다. 여행지에서는 즐거움보다 우울과 고통을 느끼는 적이 많은데 그건 젊을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대체 무엇 때문에 여행을 떠나는가?
구태여 말한다면 일본 바깥의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다. 일본이라는 공간은 내게 있어서 조금씩 공기가 희박해지는 지하실과 같다. 아니면 염천에 달구어져 지글지글 수분이 증발해 가는 작은 물웅덩이와 같다. 노신이 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장자가 말하기를 "말라가는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속의 붕어는 침으로 서로의 몸을 적신다. "그리고 그는 또 말하기를 "흐르는 물과 넓은 호수에서 서로 잊어버리는 게 낫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는 서로를 잊을 수가 없다.
장자가 만년에 쓴 '나는 사람을 속이고 싶다'의 한 귀절이다. 일본어로 쓴 이 글은 잡지 『개조(改造)』1936년 4월호에 게재되었다. (竹内好編訳, <魯迅評論集>, 岩波文庫)
마지막으로 앞두고 피로 개인의 예감을 덧붙여 써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노신은 이 글을 발표한 해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인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 일본과 중국 사이에 전면 전쟁이 시작되었다. 글 속의 우리란 중국인과 일본 사람을 뜻하는 것이리라. 일본인에게 보낸 유서라고도 할 수 있는 글이다. 그야말로 피로 쓴 것 같은 이 글은 언제부터인지 내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물웅덩이의 비유도 여기서 나온 연상이다.
앞에 나온 기술직 사원 K씨는, 고생 끝에 처음으로 일본 밖으로 여행을 떠나 시베리아 상공에서 비행기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대지를 내려다보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뻔했다고 한다.
유럽은커녕 친척이 사는 한국에도 간 적이 없었던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죽 본이라는 비좁은 물웅덩이의 한 구석에서 살아 왔으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다. 얼마나 답답한 곳에 갇혀 있었던 것인지. 그런 생각이 시베리아 상공에서 그를 강렬하게 덮쳐 왔던 것이다.
노신의 글 속에 나오는 '우리들'은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으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슬프게도 조선 사람과 일본 사람은 서로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옛날 강과 호수에 있던 우리들의 조상은 식민지 지배라는 홍수의 시대에 일본이라고 하는 수레바퀴 속에 끌려들어간 것이다. 큰물이 빠진 후 강호로부터 떨어져 나온 수레바퀴 속에 우리들은 남았다. 지글지글 물은 말라간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붕어가 산소 부족에 허덕이며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미는 것과 같다.
그렇게 일본이 살기 힘들다면 왜 일본에 돌아오는가? 왜 일본을 영영 떠나지 않는가? 이렇게 묻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천진하게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싫으면 나가라는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 재일 조선인들 중에는, 일본이 정말로 싫어져서 해외 이주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경제력이나 특별한 능력을 지닌 소수일 뿐이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게 된다.
재일 조선인의 대다수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 의도하지 않은 채 이 나라에서 생명으로 태어났다. 그 때문에 이 나라의 언어밖에 모르고 , 여기밖에는 집에 없으며, 여기밖에 직장이 없고, 여기밖에는 친구도 아는 사람도 없다. 다시 말하면, 삶의 기반이 여기 외에는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말을 돌려서 어떤 때는 거친 목소리로 싫으면 나가라고 하는 말을 들어가면서, 그래도 여기밖에는 살 곳이 없는 것이다. (계속)
번역 : 김혜신 가큐슈가쿠학 강사(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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