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의 정치'를 걷고 다른 정치를 생각합니다
13일 활동가대회에서 또 다른 '김정우'를 만나고 싶다
12.10.12 18:43최종 업데이트 12.10.12 18:43
홍세화(news) 오마이뉴스
지난 9일, 파리에서 돌아오던 날 공항에서 처음 접한 소식은 박근혜·안철수 후보 등이 주고받는 시끄러운 대선 공방전이 아닌 또 하나의 '소리 없는 죽음'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이 펼치는 현란한 말의 성찬 덕에 쌍용자동차에서의 23번째 죽음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침묵 속에 지워지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김정우] 마주하지 말았어야 할 숫자 '23'
김정우 쌍용자동차 지부장은 그래서 결국 '만나지 말았어야 할 숫자, '스물셋'을 세고 있기보다는 스스로를 내던져 동료들의 생명을 살리는 길을 선택한 것일 테다. 김정우 지부장의 단식선언을 읽으며 다시 떠올린 이름은 '김소연'이다. 끝 모를 단식을 이어갔던 김소연과 기륭분회 조합원들, 5년 전 당시에는 차마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던 그 빈사의 고통을 우리는 열심히 지우며 살았다.
그것을 고스란히 떠올리며 망각과 싸우고 망자(亡子)와의 연대를 이어오는 것은 배제와 차별의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자들의 몫으로 남겨둔 채. 대한문 앞에 다가설 때마다 '우리, 끝내는 승리하자'는 다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늘 엄두가 나지 않던, 한없이 작아지던, 나를 고백한다.
[김소연] '단식'이라는 단어가 그녀를 불러냈다
'월급 64만 원, 과로로 쓰러져도 해고'.
2007년 여름, 뙤약볕에 검게 그을린 김소연을 기륭전자 공장 앞 조그만 천막에서 처음 만나고 난 뒤 <한겨레>에 썼던 연재기사 <세상 속으로>의 씁쓸한 부제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예가 아닌 인간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와 기륭분회의 전사들은 무심한 세상 속에서 1000일 전투를 수행했다.
미완의 승리라고 부르지만 저항과 연대가 인간을 어떻게 자존감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지, 얼마나 단련시킬 수 있는지를 일깨워줬기에 그들의 투쟁은 내게 그때도, 지금도 여전한 '전율'이다. 그 뒤로도 많은 이들의 극한의 투쟁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단식'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김소연을 불러낸다.
[유명자] 수십 명의 구사대를 마주한 그, 그리고 투쟁
영구 귀국하기 전부터 시작했던, 12년 반을 채워온 <한겨레> 칼럼의 마지막 제목은 '거대한 도가니 속 이 땅의 노동자들'이었다. 재능교육 학습지교사 노동자들이 길거리 농성을 시작한 이래 1400일을 넘게 싸워오던 2011년 가을, 그 무관심의 거리를 담아내기엔 신문지면의 한 구석이 너무 작았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가 되겠다던 이명박의 당선이 뉴스였던 시절, 교육회사란 허명을 지닌 재능교육에선 수십 명의 구사대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길바닥 천막 속의 학습지교사들을 짓밟을 때 사람들은 그 절규의 도가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그냥 지나쳐갔다.
'배제된 노동'의 최전선에 선 노동자 12명의 절규는 어느덧 5년이 지나 이명박 정권 다음 대통령을 찾는 뉴스들에 가려진다. "불쌍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라면 농성장에 오지 말라"는 유명자 지부장의 단호한 질책을 기억하는가. 이 지리한 싸움이, 이 가녀린 몸부림이 왜 이토록 완강한지, 왜 승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지, 그의 이 한마디 말이 대답해주고 있다.
[박점규] 현장의 서기, 또 다른 '25일'을 쓴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투쟁을 기록한 책 <25일>의 저자 박점규. 특유의 경쾌하고 거침없는 그의 행보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십여 년 전 대우자동차 노조의 프랑스 원정투쟁으로 맺은 인연 덕이다. 여간해서 적이 없어 보이는 소탈한 그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김진숙 지도위원을 '외부세력'이라고 공장에서 쫓아낸 어느 자동차회사 노동조합의 전 지부장이 아닐까.
박점규는 유독 '친구'라는 단어를 즐겨 쓰는데, 그의 친구들인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친구는 박점규인가, 아니면 이 회사의 전 노동조합 지부장 OOO인가? 이 OOO이란 사람은 지난 총선에선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경선에 참여했고, 지금은 '새로운 진보정치'라는 명문을 내걸고 여의도 정치의 지분경쟁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박점규는 여전히, 그들이 모르거나 아직은 외면해도 되는 싸움의 현장 기록자이자 쫓겨나지 않는 외부세력이다. 아마 그는 이번 주말에도 전국에서 모이는 현장활동가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서기(書記)를 자처하며 말없이 자판을 두드릴 것이다. 그렇게 그는 또 다른 투쟁의 '25일'을 기록해갈 것이다.
10월 13일 활동가대회에 참가하며
10월 13일 토요일 오후 1시의 활동가대회장. 대한문에서 단식 4일째를 맞이할 김정우 지부장은 그곳에 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친구들이 준비한 그곳, 그 모임에 가려고 한다. 김소연과 유명자와 박점규 그리고 수백의 '김정우'들과 만나서 토론하고 묻고 답하기 위해.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계급정당' 건설 그리고 대선투쟁방침. 모두가 개인 자격으로 이 모임에 참여한다지만, 현직 정당의 대표가 부담 없이 토론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주제다.
그렇지만 회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무엇보다 나의 친구들이 만들고 있는 '다른 정치의 가능성'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배제된 노동에 속함으로써 다른 정치의 가능성 그 자체인 자들, 혹은 배제의 경계에 스스로를 위치 지움으로써 스스로 투쟁하는 주체가 돼온 자들이 만들어내는 토론의 장, 결의의 장소.
이곳은 싸움의 장소와 속함이 다른 이들이 갖고 있는 시차와 간극이 부딪히고 풀어지는 광장이다. 개인이 화자가 된다는 것과 조직의 정해진 방침이 갖는 긴장조차 수백의 열린 토론장에서 녹여내며 이 무거운 주제들의 합의를 성사시켜온 것은 그 자체로 극적이고 경이로운 일이다. 물론 외부자들에게 또는 참석을 마음먹은 나조차도 이러한 경험에 대한 기대와 설렘 한편으로 갈등과 혼란이 쉽게 숨겨지지 않는다. 이럴수록 애써 담담하게 대회장의 문을 두드리자고, 그래서 나의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며 또 다른 가능성에 도전해보자고 권하고 싶다.
나의 친구들에 대해 누군가는, 아니 나조차도 이들의 세련되지 못함과 거칠음에 대해 말하곤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세상의 야만과 폭력, 자본과 가진 자들의 집요함에 견준다면, 오히려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고 집요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진심으로, 농성장 바닥의 냉기를 자신들의 체온으로 녹여오면서, 지탱할 곳 없어 추락하려는 동료를 동지로 일으켜 세워왔던 이들이 간직한 따뜻함과 열정이 활동가대회의 기적을, 나아가 다른 정치의 기적을 만들어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자본의 정치와 자본에 포섭된 정치는 근원적으로 탐욕과 수탈의 경쟁이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억압하고 소멸시키는 배제의 정치다.
권력정치 속의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 조바심이 난 '새로운 진보정치' 또한 마찬가지이다. 제도 바깥으로 배제된 노동, 제도가 강요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정치가 아닌, 사회적 연대 속에 견고히 뿌리 내린 다른 정치. 모름지기 이것이 좌파 본연의 정치 아니었던가.
그래서 우리의 새로운 정치는 빼앗긴 자들의 연대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 가능성을 찾기 위해 나는 기꺼이 나의 친구들과 만나 머리를 맞댈 것이다. 이 가능성에 우리를 걸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12월의 대선은 대체 이 땅의 배제당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무엇일 것이며, 좌파인 우리에게는 또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그것이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라면 대체.
다른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다른 정치가 낡은 진보의 잔해를 딛고 새로이 탄생되는 무엇이라면, 이것의 시작은 관습적 사고와 실천에 대한 반란이어야 하며 이는 이것을 수행하는 자들의 자기 주체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미 낡은 것으로 판명됐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새로운 것의 숨통을 누르고 있는 빛바랜 진보정치의 망령과 싸우고, 다가오는 전면적 위기에 대응하는 사회적 연대와 이 연대에 기반을 둔 새로운 좌파 정치의 가능성을 이번 대선에서 구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본의 새로운 공세 앞에 속수무책이 될 것이다.
더는 늦지 않게, 다른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 지를 우리는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는 온전히 배제돼 몫이 없는 자들, 굴복하지 않고 투쟁하는 자들의 자기 책무로 남겨져 있다. 지금 고통 받는, 지금 투쟁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누구와 더불어,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
우리는 어렵지 않게 기억할 수 있다. '저들의 정치'가 끼어든 자리마다 굴복당한 전투들, 그리고 사회적 연대로 쟁취한 승리의 기억들을. 이제는 이 기억들을 꺼내들고 다시 물어야 한다.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진보정치는 왜 오늘에 이르러 폐허가 되고 죽음에 이르렀는가. 저들이 올라가 망가뜨린 권력정치의 무대는 처참한 폐허가 됐지만, 무대 밑에서 온몸으로 저항하던 이들에 의해 새로운 정치가 준비되고 있음을 예감한다. 누가 먼저 이 새로운 정치의 무대에 오를지를 묻고 다투는 것은 '저들의 정치' 아니던가. 스스로 무대가 되고, 기둥이 되고, 주춧돌이 되면 안 되겠는가. 우리가 서슴없이 먼저 어깨를 내어주고, 새로운 연대의 정치의 밑거름이 되면 안 되겠는가?
김소연, 김일섭, 이호동. 13일 활동가대회의 공동소집권자인 이 세 분의 헌신에 감동의 마음을 전하며, 이 대회가 지금과는 다른 '진짜배기' 노동자 정치의 시작을 만방에 알리는 거대한 출발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김정우] 마주하지 말았어야 할 숫자 '23'
▲ 지난 10일 오전 김정우 쌍용자동차 지부장과 밥 킹 전미자동차 노조 지부장이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쌍용차 정리해고 국정조사 및 해고자 복직 촉구 국제 노동계 기자회견을 가졌다. | |
ⓒ 금속노조 |
김정우 쌍용자동차 지부장은 그래서 결국 '만나지 말았어야 할 숫자, '스물셋'을 세고 있기보다는 스스로를 내던져 동료들의 생명을 살리는 길을 선택한 것일 테다. 김정우 지부장의 단식선언을 읽으며 다시 떠올린 이름은 '김소연'이다. 끝 모를 단식을 이어갔던 김소연과 기륭분회 조합원들, 5년 전 당시에는 차마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던 그 빈사의 고통을 우리는 열심히 지우며 살았다.
그것을 고스란히 떠올리며 망각과 싸우고 망자(亡子)와의 연대를 이어오는 것은 배제와 차별의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자들의 몫으로 남겨둔 채. 대한문 앞에 다가설 때마다 '우리, 끝내는 승리하자'는 다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늘 엄두가 나지 않던, 한없이 작아지던, 나를 고백한다.
[김소연] '단식'이라는 단어가 그녀를 불러냈다
'월급 64만 원, 과로로 쓰러져도 해고'.
2007년 여름, 뙤약볕에 검게 그을린 김소연을 기륭전자 공장 앞 조그만 천막에서 처음 만나고 난 뒤 <한겨레>에 썼던 연재기사 <세상 속으로>의 씁쓸한 부제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예가 아닌 인간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와 기륭분회의 전사들은 무심한 세상 속에서 1000일 전투를 수행했다.
미완의 승리라고 부르지만 저항과 연대가 인간을 어떻게 자존감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지, 얼마나 단련시킬 수 있는지를 일깨워줬기에 그들의 투쟁은 내게 그때도, 지금도 여전한 '전율'이다. 그 뒤로도 많은 이들의 극한의 투쟁이 이어졌지만, 여전히 '단식'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김소연을 불러낸다.
[유명자] 수십 명의 구사대를 마주한 그, 그리고 투쟁
▲ 제122주년 세계 노동절인 지난 5월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1594일째 단체협상 원상 복귀와 복직을 요구하며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유명자 재능교육 지부장이 "자본에 굴하지 않고 떠나간 열사와 동지들의 정신을 이어나가겠다"고 다짐하며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있다. | |
ⓒ 유성호 |
영구 귀국하기 전부터 시작했던, 12년 반을 채워온 <한겨레> 칼럼의 마지막 제목은 '거대한 도가니 속 이 땅의 노동자들'이었다. 재능교육 학습지교사 노동자들이 길거리 농성을 시작한 이래 1400일을 넘게 싸워오던 2011년 가을, 그 무관심의 거리를 담아내기엔 신문지면의 한 구석이 너무 작았다.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가 되겠다던 이명박의 당선이 뉴스였던 시절, 교육회사란 허명을 지닌 재능교육에선 수십 명의 구사대가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길바닥 천막 속의 학습지교사들을 짓밟을 때 사람들은 그 절규의 도가니를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그냥 지나쳐갔다.
'배제된 노동'의 최전선에 선 노동자 12명의 절규는 어느덧 5년이 지나 이명박 정권 다음 대통령을 찾는 뉴스들에 가려진다. "불쌍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라면 농성장에 오지 말라"는 유명자 지부장의 단호한 질책을 기억하는가. 이 지리한 싸움이, 이 가녀린 몸부림이 왜 이토록 완강한지, 왜 승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지, 그의 이 한마디 말이 대답해주고 있다.
[박점규] 현장의 서기, 또 다른 '25일'을 쓴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파업투쟁을 기록한 책 <25일>의 저자 박점규. 특유의 경쾌하고 거침없는 그의 행보를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십여 년 전 대우자동차 노조의 프랑스 원정투쟁으로 맺은 인연 덕이다. 여간해서 적이 없어 보이는 소탈한 그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김진숙 지도위원을 '외부세력'이라고 공장에서 쫓아낸 어느 자동차회사 노동조합의 전 지부장이 아닐까.
박점규는 유독 '친구'라는 단어를 즐겨 쓰는데, 그의 친구들인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친구는 박점규인가, 아니면 이 회사의 전 노동조합 지부장 OOO인가? 이 OOO이란 사람은 지난 총선에선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경선에 참여했고, 지금은 '새로운 진보정치'라는 명문을 내걸고 여의도 정치의 지분경쟁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박점규는 여전히, 그들이 모르거나 아직은 외면해도 되는 싸움의 현장 기록자이자 쫓겨나지 않는 외부세력이다. 아마 그는 이번 주말에도 전국에서 모이는 현장활동가들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서기(書記)를 자처하며 말없이 자판을 두드릴 것이다. 그렇게 그는 또 다른 투쟁의 '25일'을 기록해갈 것이다.
10월 13일 활동가대회에 참가하며
10월 13일 토요일 오후 1시의 활동가대회장. 대한문에서 단식 4일째를 맞이할 김정우 지부장은 그곳에 오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나의 친구들이 준비한 그곳, 그 모임에 가려고 한다. 김소연과 유명자와 박점규 그리고 수백의 '김정우'들과 만나서 토론하고 묻고 답하기 위해.
'변혁적 현장실천'과 '노동자계급정당' 건설 그리고 대선투쟁방침. 모두가 개인 자격으로 이 모임에 참여한다지만, 현직 정당의 대표가 부담 없이 토론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주제다.
그렇지만 회피하지 않으려고 한다. 무엇보다 나의 친구들이 만들고 있는 '다른 정치의 가능성'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배제된 노동에 속함으로써 다른 정치의 가능성 그 자체인 자들, 혹은 배제의 경계에 스스로를 위치 지움으로써 스스로 투쟁하는 주체가 돼온 자들이 만들어내는 토론의 장, 결의의 장소.
이곳은 싸움의 장소와 속함이 다른 이들이 갖고 있는 시차와 간극이 부딪히고 풀어지는 광장이다. 개인이 화자가 된다는 것과 조직의 정해진 방침이 갖는 긴장조차 수백의 열린 토론장에서 녹여내며 이 무거운 주제들의 합의를 성사시켜온 것은 그 자체로 극적이고 경이로운 일이다. 물론 외부자들에게 또는 참석을 마음먹은 나조차도 이러한 경험에 대한 기대와 설렘 한편으로 갈등과 혼란이 쉽게 숨겨지지 않는다. 이럴수록 애써 담담하게 대회장의 문을 두드리자고, 그래서 나의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며 또 다른 가능성에 도전해보자고 권하고 싶다.
나의 친구들에 대해 누군가는, 아니 나조차도 이들의 세련되지 못함과 거칠음에 대해 말하곤 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세상의 야만과 폭력, 자본과 가진 자들의 집요함에 견준다면, 오히려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고 집요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진심으로, 농성장 바닥의 냉기를 자신들의 체온으로 녹여오면서, 지탱할 곳 없어 추락하려는 동료를 동지로 일으켜 세워왔던 이들이 간직한 따뜻함과 열정이 활동가대회의 기적을, 나아가 다른 정치의 기적을 만들어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자본의 정치와 자본에 포섭된 정치는 근원적으로 탐욕과 수탈의 경쟁이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억압하고 소멸시키는 배제의 정치다.
권력정치 속의 지분을 차지하기 위해 조바심이 난 '새로운 진보정치' 또한 마찬가지이다. 제도 바깥으로 배제된 노동, 제도가 강요한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정치가 아닌, 사회적 연대 속에 견고히 뿌리 내린 다른 정치. 모름지기 이것이 좌파 본연의 정치 아니었던가.
그래서 우리의 새로운 정치는 빼앗긴 자들의 연대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이 가능성을 찾기 위해 나는 기꺼이 나의 친구들과 만나 머리를 맞댈 것이다. 이 가능성에 우리를 걸지 않는다면, 다가오는 12월의 대선은 대체 이 땅의 배제당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무엇일 것이며, 좌파인 우리에게는 또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그것이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라면 대체.
다른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 제122주년 세계 노동절인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비정규직과 정리해고 노동자들이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계승하며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해결과 비정규직 철폐 등을 요구하고 있다. | |
ⓒ 유성호 |
다른 정치가 낡은 진보의 잔해를 딛고 새로이 탄생되는 무엇이라면, 이것의 시작은 관습적 사고와 실천에 대한 반란이어야 하며 이는 이것을 수행하는 자들의 자기 주체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미 낡은 것으로 판명됐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새로운 것의 숨통을 누르고 있는 빛바랜 진보정치의 망령과 싸우고, 다가오는 전면적 위기에 대응하는 사회적 연대와 이 연대에 기반을 둔 새로운 좌파 정치의 가능성을 이번 대선에서 구축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본의 새로운 공세 앞에 속수무책이 될 것이다.
더는 늦지 않게, 다른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 지를 우리는 스스로 묻고 답해야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는 온전히 배제돼 몫이 없는 자들, 굴복하지 않고 투쟁하는 자들의 자기 책무로 남겨져 있다. 지금 고통 받는, 지금 투쟁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을 말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누구와 더불어, 무엇을 위해 싸울 것인가.
우리는 어렵지 않게 기억할 수 있다. '저들의 정치'가 끼어든 자리마다 굴복당한 전투들, 그리고 사회적 연대로 쟁취한 승리의 기억들을. 이제는 이 기억들을 꺼내들고 다시 물어야 한다.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
진보정치는 왜 오늘에 이르러 폐허가 되고 죽음에 이르렀는가. 저들이 올라가 망가뜨린 권력정치의 무대는 처참한 폐허가 됐지만, 무대 밑에서 온몸으로 저항하던 이들에 의해 새로운 정치가 준비되고 있음을 예감한다. 누가 먼저 이 새로운 정치의 무대에 오를지를 묻고 다투는 것은 '저들의 정치' 아니던가. 스스로 무대가 되고, 기둥이 되고, 주춧돌이 되면 안 되겠는가. 우리가 서슴없이 먼저 어깨를 내어주고, 새로운 연대의 정치의 밑거름이 되면 안 되겠는가?
김소연, 김일섭, 이호동. 13일 활동가대회의 공동소집권자인 이 세 분의 헌신에 감동의 마음을 전하며, 이 대회가 지금과는 다른 '진짜배기' 노동자 정치의 시작을 만방에 알리는 거대한 출발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 전국활동가대회 웹자보 | |
ⓒ 전국활동가대회 조직위 |
덧붙이는 글 | 홍세화씨는 진보신당연대회의 상임대표입니다. 이 글은 <프레시안>, <레디앙>, <참세상>에도 송고하였습니다.
'진보정당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보좌파의 인지적 지도 대선 뿐 아니라 그 이후를 준비해야 (0) | 2012.10.27 |
---|---|
변혁모임, ‘노동자 대통령 공동선거투쟁본부’ 구성 제안 (0) | 2012.10.16 |
변혁모임, 본격적인 공동선거투쟁본부 구성에 나서(2012.10.15) (0) | 2012.10.16 |
진보좌파·민중진영 대선 공동기구, 마지막 고비 넘는 중(2012.10.9) (0) | 2012.10.11 |
성남시장 후보단일화 대가, 경기동부연합 민간위탁 특혜 의혹 (0) | 2012.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