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민중가수' 우창수는 20년 넘는 세월을 한결같이 노래한다. 세상을 더 살 만한 곳으로 바꾸기 위해. 지난 25일 해질녘, 부산 중구 중앙동 원도심 창작공간 '또따또가' 작업실 앞 골목에 선 그가 삶을 노래하고 있다. 정대현 기자 jhyun@
그는 가수다. 20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삶을 노래하는 가수'다. 그는 작곡가다. 세상의 흠결이 안타까워 노래를 쓴다. 아이들이 좋아 창작동요도 만든다. 둘을 합치면 시쳇말로 '싱어송라이터'인데, 그 흔한 노래방 책에 노래 한 곡 없다. 1967년생, 86학번 우창수(45). 그는 자유와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꾼이다. 부산이라는 척박한 무대를 묵묵히 지키고 있다. 가만히 그의 노래를 듣고 있자면 노래란, 진정한 가수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우창수의 노래는 고단한 삶에 지친 이들에게 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이다. 사람들은 그를 유일하게 남은 부산의 1세대 '민중 가수' 혹은 '노래운동가'라 한다. 뜨거웠던 동지들은 생활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갔다. 그는 말한다. "민중가수라니, 분에 넘치고 낯 뜨거운 얘기입니다. 그런 건 역사 속에서 평가를 받아야 하죠. 그저 삶을 노래하는 가수 정도면 좋겠어요." 푸근한 얼굴, 굵은 손가락. 기타 하나 둘러멘 그는 그 큰 몸통을 울려 노래를 한다. 세상이 그의 무대다.
■분노가 삶이 되다
우창수는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는 북한 함경도 출신으로 전쟁 때 피란을 왔다. 어릴 때 경남 창녕·밀양, 울산 언양까지 시골 학교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때 두번이나 전학한 다음 언양중학교, 울산 중앙고교를 거쳐 부산 내성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기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형한테 배웠다. 형은 브라스밴드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재능꾼이었다. 중학교 때 소풍 가면 기타를 치며 노래하니 인기를 끌었다. 사실 그림을 미치도록 좋아했던 우창수는 아버지 몰래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곤 했다. 고등학교 때도 미술대를 가고 싶었다.
형은 "그림에는 1등 2등이 없다. 네가 그리고 싶은 걸 그려라" 했다. 하지만 사생대회에 나갔더니 학원 선생님들이 복도 창문에서 코치를 하느라 난리였다. 상심한 그는 그림을 후딱 그리고 나왔다. 그런데 우수상을 받았다.
1986년 부산외대 독문과에 입학했다. 대학가요제 수상자를 배출한 통기타 동아리 '미네르바'에 들어갔다. 우연히 접한 광주항쟁의 처참한 현실에 충격을 받은 그는 학생운동에 몰입한다.
우창수는 2007년 1월 평생 처음 내놓은 독립 음반 '빵과 서커스'에 이렇게 썼다.
'오월의 햇살 아래에서 멋 모르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 남도의 땅에서 벌어진 항쟁과 주검의 칼라 사진을 보고 벗들과 한밤 중에 몇 병인지 모를 술을 먹어야 했다. 노래는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몸부림이었다. 노래가 내 삶이 될 줄은 스무 살, 그때는 정말 몰랐다.'
음반 발매를 위해 500명의 후원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냈다. 그의 노래는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공유재산이다. 이른바 '카피 레프트'다. 음반 2천 장이 나갔지만 손에 쥔 돈은 없다. 대부분 무료로 나눠 준 것이다.
학생 조직을 만들고 시위를 하느라 수업도 듣지 않고,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학교 당국이 골치 아픈 학생을 졸업시키려고 그냥 학점을 줘서 F학점을 달라고 교수님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우창수의 노래는 고단한 삶에 지친 이들에게 주는 따뜻한 차 한 잔이다. 사람들은 그를 유일하게 남은 부산의 1세대 '민중 가수' 혹은 '노래운동가'라 한다. 뜨거웠던 동지들은 생활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갔다. 그는 말한다. "민중가수라니, 분에 넘치고 낯 뜨거운 얘기입니다. 그런 건 역사 속에서 평가를 받아야 하죠. 그저 삶을 노래하는 가수 정도면 좋겠어요." 푸근한 얼굴, 굵은 손가락. 기타 하나 둘러멘 그는 그 큰 몸통을 울려 노래를 한다. 세상이 그의 무대다.
■분노가 삶이 되다
우창수는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3남 2녀 가운데 둘째 아들이다. 아버지는 북한 함경도 출신으로 전쟁 때 피란을 왔다. 어릴 때 경남 창녕·밀양, 울산 언양까지 시골 학교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때 두번이나 전학한 다음 언양중학교, 울산 중앙고교를 거쳐 부산 내성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기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형한테 배웠다. 형은 브라스밴드도 하고, 그림도 그리는 재능꾼이었다. 중학교 때 소풍 가면 기타를 치며 노래하니 인기를 끌었다. 사실 그림을 미치도록 좋아했던 우창수는 아버지 몰래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곤 했다. 고등학교 때도 미술대를 가고 싶었다.
형은 "그림에는 1등 2등이 없다. 네가 그리고 싶은 걸 그려라" 했다. 하지만 사생대회에 나갔더니 학원 선생님들이 복도 창문에서 코치를 하느라 난리였다. 상심한 그는 그림을 후딱 그리고 나왔다. 그런데 우수상을 받았다.
1986년 부산외대 독문과에 입학했다. 대학가요제 수상자를 배출한 통기타 동아리 '미네르바'에 들어갔다. 우연히 접한 광주항쟁의 처참한 현실에 충격을 받은 그는 학생운동에 몰입한다.
우창수는 2007년 1월 평생 처음 내놓은 독립 음반 '빵과 서커스'에 이렇게 썼다.
'오월의 햇살 아래에서 멋 모르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 남도의 땅에서 벌어진 항쟁과 주검의 칼라 사진을 보고 벗들과 한밤 중에 몇 병인지 모를 술을 먹어야 했다. 노래는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몸부림이었다. 노래가 내 삶이 될 줄은 스무 살, 그때는 정말 몰랐다.'
음반 발매를 위해 500명의 후원자들이 십시일반 돈을 냈다. 그의 노래는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공유재산이다. 이른바 '카피 레프트'다. 음반 2천 장이 나갔지만 손에 쥔 돈은 없다. 대부분 무료로 나눠 준 것이다.
학생 조직을 만들고 시위를 하느라 수업도 듣지 않고,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학교 당국이 골치 아픈 학생을 졸업시키려고 그냥 학점을 줘서 F학점을 달라고 교수님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학생운동 하다 '일터' 입단 인생 전환점
노동자 아픔에 눈물, 민중가요 작곡 시작
솔로 독립 후에도 현장 찾아다니며 공연
"삶은 고달팠지만 노래할 수 있어 행복"
■현장으로 간 '일터'
1990년 선배의 소개로 노동문화예술단 '일터'에 들어간다. 꿈에 그리던 문예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공장 안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며 마당극 형식의 노동극을 했다. 한달 활동비가 12만 원이었고, 몇 달씩 못 받을 때도 있었다. 문화 활동가로서의 삶은 고달팠지만 행복함은 그보다 컸다.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현장에 있는 노동자를 만나면서 책에 있는 위대한 노동자가 위대하지 않은 짓을 하는 것도 봤고요. 책 속의 노동자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노동자를 보게 된 겁니다."
백발의 나이 든 노동자가 '평생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 사람은 처음'이라면서 손을 꽉 잡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즈음,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 작곡을 시작했다.
1991년 조용히 입대했다. 하지만 군에서도 그는 '관리 대상'이었다. '운동권이라 그렇다'는 얘기를 듣지 않으려고 이를 꽉 물고 일을 했다. 군대를 마치고 '일터'로 돌아왔더니 생활로 돌아간 선후배가 많았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우창수의 생각과 음악은 변해갔다. 노동자 사이의 권력과 욕망을 보게 되면서 예술가로서 문화 활동가로서 자신을 찾아 한단계 더 뛰어오르고 싶었다.
■'사람이 그립지 않소'
1998년. '일터'를 나와 세상에 홀로 선 그는 소극장 공연을 하며 현장을 찾아다녔다.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다. 위기가 왔다. 공연을 하면 할수록 적자만 늘어갔다. 한달에 10만 원도 못 벌 때가 있었다. 죽어도 집에서 돈을 받기 싫었다. 형편이 나은 서울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창수 공연은 부산 가야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더 할 수 있을까.' 하루에 열두 번도 고민을 한다. 아는 선배들이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고도 했다. "그때는 계속 이 길을 가야 할까 고민했어요. 오직 '노동자의 세상을 위해서 한길만을 간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현장 노동자들에게 술 밥을 얻어 먹었다. 술을 한번 사 보는 게 소원이었다. 세상은 상처가 됐다. 그가 노래를 한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거리에서 나는 왜 자꾸 외로움을 느끼나/아무도 없소 나 말고 여기에 당신은 나처럼 외롭지 않소…정말 여기 나 말고 누구 없소 지친 삶 나누는 우리가 될 사람/때론 내가 아닌 우리가 되어줄 사람 없소.' ('사람이 그립지 않소' /글 이성민·곡 우창수)
"그때 이 곡이 힘이 됐어요. 좀 가난하지만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일까 생각했어요. 그건 곡을 쓰고 노래하는 일이더라구요. 그걸 제일 잘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렇게 살자고 결론지었더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어요."
뚜벅뚜벅 갔더니 '노래나무 심기' 후원회도 생겼다. 15명이 한 달에 1만 원씩 내주는 식이다. 이제 그는 공연을 멈추지 않는다.

개똥이 어린이 예술단 선생님으로…
5인조 장난감밴드 음악 감독으로…
노래에 웃고 노래에 사는 '진짜 가수'
"소외된 이웃 위해 어디든 달려갑니다"
■ 부르지 않아도 오는 가수
우창수는 소외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부르지 않아도 오는 가수'다.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로 올라간 김진숙 지도위원이 책에 쓴 표현이다.
그는 원도심 창작공간 '또따또가'에 입주한 예술가다. 지난해 9월 부산 중구 중앙동 뒷골목에 있는 낡은 상가 건물 1층에 자리를 잡았다. 지인들과 방음 스튜디오도 만들고, 아기자기한 디자인을 한 작업 공간을 만들었다. 비용은 '미소금융' 담당 은행 직원을 30분 넘게 설득한 끝에 500만 원을 대출해 마련했다.
그전까지 그는 부산대 앞 지하에서 5년간 생활했다. 그에게는 '지하 술집'과 '김밥'이 가장 질리는 단어다.
가수 우창수가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다. 몇 년 전 부산 서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도 집회 참가자들도 어느새 하나가 됐다. 행인들도 길을 멈췄다. 우창수의 노래에 세상이 멈춘 듯했다. 가수로서 평생 경험하기 힘든 희열을 느낀 순간이었다.
바로 그 노래 '아들에게'는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을 그린 노래다. 아들은 옛 대우정밀에서 일하다가 병역특례 해고자로 투쟁을 하면서 5년을 수배자로 숨어 살다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어머니와 아들은 5년간 끝내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아들의 장례식 때 이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간밤엔 낯설은 바람에 놀라 맨발로 대문 나서고/식어버린 미역국이 너의 빈자릴 채우는구나/차라리 감옥이라면 얼굴이라도 마주 볼 것을/기어이 갈 길이라면 손이라도 잡아 줄 것을….' ('아들에게'/ 글·곡 우창수)
장가도 가지 않고 뭘 하는지도 모르는 우창수는 집안의 천덕꾸러기였다. '괜히 남 힘들게 하지 말고 혼자 살자'고 생각하던 그는 현장에서 '우렁각시'를 만난다. 2005년 일이다. 아내 김은희(43) 씨는 학습지 교사로 노조를 만들어 싸우고 있었다. "아, 세상에 이런 데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있구나 생각했어요. 문화제를 도와주던 이 사람이 슬쩍 고백을 했고,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은희 씨가 버스에서 '보고싶네요'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더니 버스 정류장으로 단숨에 달려나왔다고 한다.
두 사람은 2008년 10월 결혼했다. 결혼식은 다섯 시간에 걸친 잔치였다. 주례는 없었지만 지인들이 나와서 춤도 추고 노래했다. 한 어르신이 '너는 각시한테 절을 하면서 살아라'고 해서, 신혼 초 3일간 아침마다 절을 했다.
부부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제도라는 틀에 갇히는 게 싫었고, 도장을 찍어야 인정받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내도 "그게 뭐 중요한가?"라며 단박에 동의했다. 불편한 건 '통신요금 가족 할인'을 못 받을 때밖에 없었다. 이제 아내는 매니저이자 사무국장, 장난감밴드 리더, 무대미술 의상 담당까지 뭐든 척척 뒷받침해 주는 반려자다.
암 투병을 하던 장인어른을 수발하기 위해 처갓집에 들어가 살 때, 우창수는 한 달에 30곡이 넘는 노래를 쏟아냈다. 절박한 마음이 한순간 터져버린 것이다.
■ '얘들아 숲으로 가자'
지난 22일 오후에 만난 우창수는 원망스럽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1년 동안 아이들과 보살핀 범어사 인근 텃밭에 노래를 불러주려 했지만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텃밭음악회'는 결국 인근 풍물패 연습공간에서 진행됐다. 아이들은 아내 김은희 씨가 만든 한지옷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꾀꼬리같이 노래를 했다.
세상에 상처받은 우창수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배우면 세상을 바꿔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을 모아 '개똥이 어린이예술단'을 만들었다. 지난해 5월의 일이다.
예술단 아이들 8명은 토요일마다 우창수와 한바탕 논다. 아이들은 '두꺼비 선생님'이라 부르며 친구처럼 대한다. 지난 2월에는 아이들과 글 쓰고 노래한 것들을 모아 창작동요집 '우리 개똥이 하는 말'을 내고,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공연도 했다.
지난해이던가. 초등학교 1학년 하늘이가 우창수를 조른다. "선생님, 노래 만들어 주세요. 네?" '보리밥'이란 글을 보니 기가 막힌다. 때 묻지 않은 아이의 생각 그대로다.
'보리밥을 먹고 산다/보리밥은 정말 맛있다/보리밥은 최고다/빵구도 잘 나온다'(보리밥/글 조하늘·곡 우창수)
'얘들아 숲으로 가자 반가운 인사를 나눠보자/가만히 숲속에 누워 바람의 소리를 들어보자/먼 옛날 잃어버린 이야기따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향기를 찾아/처음처럼 인사하며 얘들아 숲으로 가자' ('얘들아 숲으로 가자'/글·곡 우창수)
그렇게 아이들과 '시험 빵점 맞은 날'(10살 차연주) '우리 언니'(11살 하연) '금정산 산골엔'(10살 박채연) 같은 노래들을 만들었다.
우창수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어느 축제에 갔더니 백일장, 그리기 대회에 나선 엄마들이 이렇게 써라 저렇게 그려라 옆에 앉아 간섭을 해요. 아이들 생각과 창의성은 말살되고 마는 거예요."
그는 한 번도 음악을 한 적 없는 어른들이 만든 5인조 'DDA³(따따따) 장난감 밴드'에도 참여해 음악감독을 한다. 아이들 장난감과 악기로 연주하며 세상을 풍자하는 밴드다. 다음 달 19일과 20일
부산 동구 일터 소극장에서 이들과 '우창수의 우리 동네 이야기' 공연을 한다.
"누가 '아직도 그거 하냐?'고 퉁을 놓으면 그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아직도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않냐고. 전 아직도 그분들을 찾아 현장에 가는 겁니다." 오늘도 그는 기타를 둘러메고 길을 나선다.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노동자 아픔에 눈물, 민중가요 작곡 시작
솔로 독립 후에도 현장 찾아다니며 공연
"삶은 고달팠지만 노래할 수 있어 행복"
■현장으로 간 '일터'
1990년 선배의 소개로 노동문화예술단 '일터'에 들어간다. 꿈에 그리던 문예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공장 안 시위 현장을 찾아다니며 마당극 형식의 노동극을 했다. 한달 활동비가 12만 원이었고, 몇 달씩 못 받을 때도 있었다. 문화 활동가로서의 삶은 고달팠지만 행복함은 그보다 컸다.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학생운동을 하다가 현장에 있는 노동자를 만나면서 책에 있는 위대한 노동자가 위대하지 않은 짓을 하는 것도 봤고요. 책 속의 노동자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노동자를 보게 된 겁니다."
백발의 나이 든 노동자가 '평생 나를 위해 노래를 불러준 사람은 처음'이라면서 손을 꽉 잡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즈음,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 작곡을 시작했다.
1991년 조용히 입대했다. 하지만 군에서도 그는 '관리 대상'이었다. '운동권이라 그렇다'는 얘기를 듣지 않으려고 이를 꽉 물고 일을 했다. 군대를 마치고 '일터'로 돌아왔더니 생활로 돌아간 선후배가 많았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우창수의 생각과 음악은 변해갔다. 노동자 사이의 권력과 욕망을 보게 되면서 예술가로서 문화 활동가로서 자신을 찾아 한단계 더 뛰어오르고 싶었다.
■'사람이 그립지 않소'
1998년. '일터'를 나와 세상에 홀로 선 그는 소극장 공연을 하며 현장을 찾아다녔다.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했다. 위기가 왔다. 공연을 하면 할수록 적자만 늘어갔다. 한달에 10만 원도 못 벌 때가 있었다. 죽어도 집에서 돈을 받기 싫었다. 형편이 나은 서울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우창수 공연은 부산 가야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더 할 수 있을까.' 하루에 열두 번도 고민을 한다. 아는 선배들이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고도 했다. "그때는 계속 이 길을 가야 할까 고민했어요. 오직 '노동자의 세상을 위해서 한길만을 간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요."
현장 노동자들에게 술 밥을 얻어 먹었다. 술을 한번 사 보는 게 소원이었다. 세상은 상처가 됐다. 그가 노래를 한다.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거리에서 나는 왜 자꾸 외로움을 느끼나/아무도 없소 나 말고 여기에 당신은 나처럼 외롭지 않소…정말 여기 나 말고 누구 없소 지친 삶 나누는 우리가 될 사람/때론 내가 아닌 우리가 되어줄 사람 없소.' ('사람이 그립지 않소' /글 이성민·곡 우창수)
"그때 이 곡이 힘이 됐어요. 좀 가난하지만 내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일까 생각했어요. 그건 곡을 쓰고 노래하는 일이더라구요. 그걸 제일 잘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렇게 살자고 결론지었더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어요."
뚜벅뚜벅 갔더니 '노래나무 심기' 후원회도 생겼다. 15명이 한 달에 1만 원씩 내주는 식이다. 이제 그는 공연을 멈추지 않는다.

개똥이 어린이 예술단 선생님으로…
5인조 장난감밴드 음악 감독으로…
노래에 웃고 노래에 사는 '진짜 가수'
"소외된 이웃 위해 어디든 달려갑니다"
■ 부르지 않아도 오는 가수
우창수는 소외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어김없이 나타나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생긴 별명이 '부르지 않아도 오는 가수'다.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로 올라간 김진숙 지도위원이 책에 쓴 표현이다.
그는 원도심 창작공간 '또따또가'에 입주한 예술가다. 지난해 9월 부산 중구 중앙동 뒷골목에 있는 낡은 상가 건물 1층에 자리를 잡았다. 지인들과 방음 스튜디오도 만들고, 아기자기한 디자인을 한 작업 공간을 만들었다. 비용은 '미소금융' 담당 은행 직원을 30분 넘게 설득한 끝에 500만 원을 대출해 마련했다.
그전까지 그는 부산대 앞 지하에서 5년간 생활했다. 그에게는 '지하 술집'과 '김밥'이 가장 질리는 단어다.
가수 우창수가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있다. 몇 년 전 부산 서면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도 집회 참가자들도 어느새 하나가 됐다. 행인들도 길을 멈췄다. 우창수의 노래에 세상이 멈춘 듯했다. 가수로서 평생 경험하기 힘든 희열을 느낀 순간이었다.
바로 그 노래 '아들에게'는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을 그린 노래다. 아들은 옛 대우정밀에서 일하다가 병역특례 해고자로 투쟁을 하면서 5년을 수배자로 숨어 살다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어머니와 아들은 5년간 끝내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아들의 장례식 때 이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장가도 가지 않고 뭘 하는지도 모르는 우창수는 집안의 천덕꾸러기였다. '괜히 남 힘들게 하지 말고 혼자 살자'고 생각하던 그는 현장에서 '우렁각시'를 만난다. 2005년 일이다. 아내 김은희(43) 씨는 학습지 교사로 노조를 만들어 싸우고 있었다. "아, 세상에 이런 데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도 있구나 생각했어요. 문화제를 도와주던 이 사람이 슬쩍 고백을 했고,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났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은희 씨가 버스에서 '보고싶네요'라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더니 버스 정류장으로 단숨에 달려나왔다고 한다.
두 사람은 2008년 10월 결혼했다. 결혼식은 다섯 시간에 걸친 잔치였다. 주례는 없었지만 지인들이 나와서 춤도 추고 노래했다. 한 어르신이 '너는 각시한테 절을 하면서 살아라'고 해서, 신혼 초 3일간 아침마다 절을 했다.
부부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제도라는 틀에 갇히는 게 싫었고, 도장을 찍어야 인정받는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내도 "그게 뭐 중요한가?"라며 단박에 동의했다. 불편한 건 '통신요금 가족 할인'을 못 받을 때밖에 없었다. 이제 아내는 매니저이자 사무국장, 장난감밴드 리더, 무대미술 의상 담당까지 뭐든 척척 뒷받침해 주는 반려자다.
암 투병을 하던 장인어른을 수발하기 위해 처갓집에 들어가 살 때, 우창수는 한 달에 30곡이 넘는 노래를 쏟아냈다. 절박한 마음이 한순간 터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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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위부터 웅변대회에 참가한 어린이 우창수, 노동문화예술단 '일터'에서 공연하는 모습. 솔로가수로 독립해 열창하고, '개똥이 어린이예술단' 아이들과 함께 텃밭을 가꾸는 모습. 우창수 제공 |
■ '얘들아 숲으로 가자'
지난 22일 오후에 만난 우창수는 원망스럽게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1년 동안 아이들과 보살핀 범어사 인근 텃밭에 노래를 불러주려 했지만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텃밭음악회'는 결국 인근 풍물패 연습공간에서 진행됐다. 아이들은 아내 김은희 씨가 만든 한지옷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꾀꼬리같이 노래를 했다.
세상에 상처받은 우창수는 아이들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배우면 세상을 바꿔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을 모아 '개똥이 어린이예술단'을 만들었다. 지난해 5월의 일이다.
예술단 아이들 8명은 토요일마다 우창수와 한바탕 논다. 아이들은 '두꺼비 선생님'이라 부르며 친구처럼 대한다. 지난 2월에는 아이들과 글 쓰고 노래한 것들을 모아 창작동요집 '우리 개똥이 하는 말'을 내고, 민주공원 소극장에서 공연도 했다.
지난해이던가. 초등학교 1학년 하늘이가 우창수를 조른다. "선생님, 노래 만들어 주세요. 네?" '보리밥'이란 글을 보니 기가 막힌다. 때 묻지 않은 아이의 생각 그대로다.

'얘들아 숲으로 가자 반가운 인사를 나눠보자/가만히 숲속에 누워 바람의 소리를 들어보자/먼 옛날 잃어버린 이야기따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향기를 찾아/처음처럼 인사하며 얘들아 숲으로 가자' ('얘들아 숲으로 가자'/글·곡 우창수)
그렇게 아이들과 '시험 빵점 맞은 날'(10살 차연주) '우리 언니'(11살 하연) '금정산 산골엔'(10살 박채연) 같은 노래들을 만들었다.
우창수는 요즘 아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어느 축제에 갔더니 백일장, 그리기 대회에 나선 엄마들이 이렇게 써라 저렇게 그려라 옆에 앉아 간섭을 해요. 아이들 생각과 창의성은 말살되고 마는 거예요."
그는 한 번도 음악을 한 적 없는 어른들이 만든 5인조 'DDA³(따따따) 장난감 밴드'에도 참여해 음악감독을 한다. 아이들 장난감과 악기로 연주하며 세상을 풍자하는 밴드다. 다음 달 19일과 20일

"누가 '아직도 그거 하냐?'고 퉁을 놓으면 그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아직도 세상에는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지 않냐고. 전 아직도 그분들을 찾아 현장에 가는 겁니다." 오늘도 그는 기타를 둘러메고 길을 나선다.
박세익 기자 run@busan.com
약력
1967년 경기도 여주 출생.
1986년 부산외대 입학. 통기타 동아리 '미네르바' 가입.
1987년 6월 항쟁·노동자 대투쟁. 민중가요 부르기 시작.
1990년 부산 노동문화예술단'일터' 입단.
1998년 '솔로 가수'로 독립. '노래야 나오너라' 창작이야기 공연.
2000년 노래창작모임 '개똥이(현재 소금꽃)' 발족.
2007년 독립앨범 '빵과 서커스' 발표. 노동자 500명 후원.
2010년 개똥이 어린이예술단 창단, DDA³장난감 밴드 참여
1967년 경기도 여주 출생.
1986년 부산외대 입학. 통기타 동아리 '미네르바' 가입.
1987년 6월 항쟁·노동자 대투쟁. 민중가요 부르기 시작.
1990년 부산 노동문화예술단'일터' 입단.
1998년 '솔로 가수'로 독립. '노래야 나오너라' 창작이야기 공연.
2000년 노래창작모임 '개똥이(현재 소금꽃)' 발족.
2007년 독립앨범 '빵과 서커스' 발표. 노동자 500명 후원.
2010년 개똥이 어린이예술단 창단, DDA³장난감 밴드 참여
| 12면 | 입력시간: 2011-10-29 [16:37:00]
출처 : 부산 문화 읽어주는 女子-Marie
글쓴이 : Mari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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