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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감옥살이, 당신들은 할 일을 다했습니다

참된 2012. 5. 14. 05:44

 

 

30여년 감옥살이, 당신들은 할 일을 다했습니다

등록 : 2012.04.27 19:52 수정 : 2012.04.29 17:06  한겨레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⑧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

 

 

박정희 정권의 사회안전법은
보안법·반공법 만기 출소자들이
전향서를 안 썼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다시 감옥에 보냈다
그들을 대리해 헌법소원을 냈다

36년간 옥살이를 한 정대철
평소 ‘씩씩했던’ 63살 총각
청주보안감호소에서 풀려났지만
아무데도 갈 곳이 없던 그는
한산도 소나무에 목을 맸다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로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에 소개된 스콧 니어링. 그는 아흔 넘어서까지도 돌 나르고 나무 심고 농장 일을 거뜬히 해낼 정도로 정정했다. 100살을 눈앞에 둔 어느 날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삶을 툭툭 털었다. 나는 더 이상 먹지 않으렵니다. 이렇게 친구들에게 말하고는 물과 음료만 조금씩 먹다가 이 세상 삶을 접었다.

 

엊그제 신현칠 선생이 꼭 그렇게 갔다는 소식을 신문 한 귀퉁이에서 보았다. 아흔여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지난 총선 때는 개표 방송을 보느라 새벽녘에야 눈을 붙였다 한다. 평생을 이어온 ‘보다 나은 세상’을 향한 그 열정. 며칠 뒤 그는 이제 세상에 더 이상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삶을 마무리했다. 그분답다.

 

법이 휴지쪼가리였던 청주보안감호소


나는 그를 1989년 봄 청주보안감호소에서 처음 만났다. 그곳에는 죄수 아닌 죄수들이 50여명이나 십수년째 감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1975년 새로 만들어진 사회안전법에 따라 붙들려와 재판절차도 없이 보안감호처분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으로 보통 20~30년씩 살고 만기출소한 사람들을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다시 시켰다. 헌법에 적혀 있는 죄형법정주의는 그저 휴지 쪼가리였다. 어떠어떠한 행위가 죄고, 그 형은 얼마로 한다는 것이 법으로 분명하게 정해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헌법이 정한 법관에 의한 적법한 재판절차가 있어야만 처벌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안전법은 검사들이 주가 되어 무슨 위원회란 걸 만들어 놓고는 새로운 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는데도 자신들 멋대로 재범을 저지를 위험이 있는지를 판단해 감옥에 보냈다. 기간은 2년으로 되어 있지만 2년마다 자동 갱신이 되다시피 해서 언제 이 감옥살이가 끝날 수 있을지를 전혀 알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세상에 이런 악법이 없었으니 나는 이 법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헌법소원을 내기 위해 청주보안감호소에 갔던 거였다. 50여명 전부로부터 위임장을 받으러 갔는데 시간이 모자라 십 수명만 만나고 나머지는 서류에 지장만 받았다.

 

“변호사 선생님, 간수 아닌 바깥사람을 보는 게 처음입니다.” 75년 무렵 잡혀 와서 89년까지, 14년 만에 바깥세상 ‘민간인’을 처음 본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북이 고향인 사람들이 많았고 남쪽에 집이 있는 이들도 가족들이 아예 남처럼 인연을 끊은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156명이 들어왔는데, 법 폐지를 주장하며 단식을 하자 호스로 소금물을 강제로 입을 통해 넣어 두 사람이 죽어 나가고, 전향공작 고문으로 셋이 죽고, 병으로 10명이 죽고 90명은 전향해서 51명이 남아 있었다. 본래 형기까지 합쳐서 30년 이상 된 이들도 여럿이었는데 장가도 들기 전 잡혀 와서 나이 예순이 넘도록 총각인 사람들도 꽤 되었다. 그들은 대개 아스라이 오래된 수십년 전 시절에서 삶이 멈추어 있었다. 6·25 때 인민군으로 내려왔다가 퇴로가 막혀 지리산 빨치산이 되거나 1950~60년대 북에서 남파되었다가 붙잡혔으니 그럴 수밖에.

 

나도 처음에는 크게 긴장했다. ‘독침 들고 다니며 무고한 사람들을 파리 목숨 취급하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사악한 냉혈한.’ 수십년간 학교에서,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수도 없이 보고 들었던 남파간첩 이야기, 빨치산 이야기들.

 

그런데 ‘단체로 만난 빨갱이들’은 꼭 무슨 수도승들 같았다. 얼굴이 그리 맑을 수가 없었다. 무슨 부흥회니 불사니 열어서 부지런히 돈 걷어가는 속세의 성직자들에 어찌 그들을 비교할까. 이게 무슨 조홧속인고.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그리 이상스런 일도 아니다. 어찌됐든 감옥살이나마, 이 험한 세상에서 처자식 벌어먹이려고 돈과 잇속을 좇아 뒹굴지 않으니 수도승 비슷하고,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자들은 이타(利他)를 꿈으로 삼고 있으니 그러하다. 누가 뭐래도 자본주의는 돈이 주인이고, 사회주의는 돈과 권력에 핍박받지 않는 ‘평등 세상’을 꿈꾼다. 이것도 자기중심적 (self-centered)으로 살지 않으려 애쓰는 수도승과 비슷하다.

 

물론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결국은 자기중심적 인간들이 힘을 얻어 이타적인 사회주의자들을 밀어내곤 하지만 말이다.

 

배동준씨는 왜 30분간 화장실에 있었나


신현칠은 훗날 당신의 시집을 나에게 보내왔다. 그는 <그 무진장 참을성-임동지의 자당 묘전에>라는 시에서, 어떤 이타적 삶을 이렇게 그렸다.

 

“일찍이 어느 산골짜기 포위된 아지트에서/ 투항을 거부하고 불길 속에 죽은/ 유격투사의 아내로서/ 15년 만의 출옥을 기다리는 날/ 그 아들의 옥사통지를 받은 어미로서/ 사형선고를 살아남은/ 둘째아들의 30년 옥바라지와/ 남은 아들딸을 등에 업고/ 핍박과 가난과 노역의 날들// 자그마한 몸 어디에/ 그 무진장 참을성/ 그 무진장 굳셈을 지니셨습니까.// 이제 당신은 이 붉은 흙 밑에 누우셨습니다.”

 

사회안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준비하기 전해인 1988년 겨울. 나는 2년마다 갱신되는 보안감호처분이 부당하다며 행정소송을 냈었다. 사회에 나가 이런저런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감옥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사람한테 무얼 기준으로 재범 위험성을 판단한다는 것인지.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그것 자체로 재범의 위험성이 있다고 보고 2년마다 기간을 연장하는 게 관행이었다. 경북 봉화가 고향인 비전향 장기수 배동준에 대한 갱신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재판을 했다. 재판의 쟁점은 역시 재범의 위험성이었는데 법무부가 그 근거로 든 것은 옛날에 받은 판결 내용이었다. 아니, 그 행위는 이미 만기 징역형을 다 살지 않았나. 이런 공방을 하다 보면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내려지기도 전에 2년이 후딱 지나가 버려 새로운 갱신 처분이 내려진다. 그러면 기왕에 하던 재판은 무의미하게 되어 각하되고 만다. 다시 새로운 처분을 다투면 최종 판결이 나기 전에 또다시 2년이 지나간다. 그러면 또 각하. 이건 법도 아니고 재판도 아니었다.

 

배동준 재판은 이런 태생적 불가능의 굴레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때는 법원이 서소문에 있었는데 재판을 마치고 호송 차에 타기 전에 용변을 보러 간다며 화장실에 간 그는 거반 20~30분이 지나도 나오질 않았다. 나중에 그 연유를 듣고는 가슴이 짠하게 아파 왔다. 십 수년 만에 처음 나온 바깥세상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어서 용변 핑계를 대고 냄새 나는 화장실에 하릴없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더란다. 그분은 감옥에서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그리고 마지막 소망은 일이 잘되어 풀려나는 날이나 혹은 후일에 옛날 무수히 오간 그곳 정동이라, 낯익은 곳이지요. 선생님의 집무실을 찾아보고 싶고 ‘口’자로 연결된 덕수궁 돌담이 뜨겁도록 애무해 보고 싶고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일 때까지 대한문 기둥을 어루만지고 싶습니다.”

 

청주보안감호소에 있던 51명 비전향 장기수들을 대리해서 사회안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낼 무렵 사회 전반에 걸쳐 이 법을 폐지하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1989년 6월 이 법은 보안관찰법으로 대치되었고 짧게는 20년에서 길게는 40년 옥살이는 끝이 났다.

 

어리둥절 출소…‘쇼생크탈출’의 흑인 영감처럼


“김 변호사님, 그날 ‘소지품을 갖고 출소준비’라는 관계직원의 말을 듣는 순간에는 잘못 듣지 않았나 하고 어리둥절했답니다. 좀 바보스런 동작을 비친 까닭으로 ‘빨리’라는 직원의 다그치는 독촉을 받고서야 출소준비가 틀림없는 사실임을 확인한 연후에야 소지품을 꾸리기 시작했지요. 그래도 제 동작은 여전히 어리둥절했어요. 이윽고 몇 사람의 일손을 데리고 와서 감방에 흩어진 소지품을 주섬주섬 챙기는 것을 목격하고 출소가 확실함을 거듭 확인했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흑인 영감이 감옥을 나설 때 기분이 이랬을까.

 

그래도 배 선생은 다른 이들에 비해 기다리는 이들이 있어 행복했다. 함경도며 평안도에서 대학 선생으로, 당 간부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당의 부름’을 받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남에 내려왔던 이들은 30~40년 감옥살이 끝에 돌아갈 곳이 없었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머나먼 남녘 땅 대구며 부산까지 밀려가, 양로원에서 감옥살이 아닌 감옥살이를 하다가 세상을 뜬 이들이 여럿이다.

 

평북 용천 출신 정대철은 스물네살 나던 해, 인민군 소위로 참전해 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퇴로가 막히자 지리산에 들어갔고 얼마 후 붙잡혀 36년간 옥살이를 했다. 1989년 청주보안감호소에서 풀려날 때는 양로원 갈 나이가 안 되어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다. 평소 아주 ‘씩씩했던’ 예순세살짜리 총각 정대철은 통영 앞바다 한산도에서 소나무에 목을 맸다. 유서엔 이리 써 있었다. “본인은 1990년 11월21일 4시10분을 기하여 세상을 하직합니다…. 당과 조국 앞에 무수한 과오를 범했고 앞으로도 씻을 길 없어 부득이 이 길을 택합니다. 일편단심 자기 사상을 고수했을 뿐 이 세상에 왔다가 아무런 한 것도 없이 흐린 자취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배 선생은 그래도 고향 경북 봉화에서 아흔 노모와 칠순 처가 30년 세월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었다. 몇 년 뒤 그분은 산골에서 직접 지은 콩이며 깨, 참기름을 보자기에 싸들고 서울 나들이를 왔다. 빨갱이들 고장 평양에서 내려온 우리 아버지가 남쪽 봉화에서 올라온 빨갱이 배 선생을 맞아 같이 냉면을 먹었다.

 

신현칠 선생은 보안감호소 출소 몇 년 뒤 그 아들이 대학에서 조직사건에 걸려 보안법으로 재판을 받으면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동경 유학생 출신 남파간첩 신 선생은 10년 징역살이 뒤 잠시 세상에 나와 살 때 새로이 가정을 가져 아들을 두었다. 선생은 당신 아들을 변론해 준 나에게 노촌 이구영 선생이 써 주신 글씨를 얻어왔다. 지금도 내 방에 걸려 있는 편액에는 ‘신 아무개의 청을 받아 김형태 선생에게’라는 설명 옆에 이런 글이 써 있다.

“임중도원”(任重道遠)이라. 논어의 한 구절이다. ‘할 일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 아, 이렇게 무서운 글을 어이 나에게 주시는가. 이건 바로 신 선생 당신 자신에게 평생 되뇌고 또 되뇌던 다짐 아니던가.

 

신현칠, 배동준, 정대철…. 다들 기나긴 고난의 삶을 마쳤다. 스물 몇에서 시작해서 육칠십까지 30여년 세월을 감옥에서 한 일 없이 보냈어도, 수도승 같은 맑은 얼굴로 남은 그네들은 그네들의 ‘할 일’을 다했고 이제 길은 끝이 났다.

 

아니, 신 선생이 못 끝낸 일 딱 하나. 북에 있는 처에게 돌아가지 못한 미안함을 이렇게 시로 썼다. “여자여/ 생각하니 나는 평생/ 나의 소망을 당신의 소망으로 하여 주기를/ 마치 어린아이가 어미에게 하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되풀이하고 있구려./ 어미에게 호소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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