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
오도엽
내가 옮겨 온 곳은
어느 농사꾼이 살다
한해 전 삶을 마감한
함안군 여항면 별천골짝 아래
촌집인데
뒷간 옆에는 지게가 세 개 있다
하나는 아직 멜빵도 매달아 보지 못한 채
매끈하게 다듬어져 농부를 기다리고
나머지 두 개는 거름도 져 나르고
볏짚도 옮기고 때론 산에 올라
땔감도 함께 짊어졌다는 걸 말하듯
낡은 새끼줄은 땀내에 절어있다
마당 한 구석엔 무쇠 가마솥이 걸려 있다
묵직한 뚜껑을 잡아 올리니
할배가 옻닭을 고아 먹은 일이며
잔칫날 동네 사람들과 지짐을 부치던
고소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이젠 녹물 배인 가마솥에게
내 삶도 함께 고아 달라고
내 뿌리도 함께 지져 달라고
아궁이에 가슴을 지펴
풀풀 연기 날리는
첫날밤은 저문다
[시작 노트]
지난 해 이맘때이다. 새벽에 눈을 뜨는데 가슴이 콱 짓눌려 왔다. 숨이 콱 막힌다. 가슴이 바위덩이에 깔린 것처럼 아프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병원에 갔다. 검사만 이것저것 하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스트레스 때문이란다. 몸무게는 십 킬로그램이나 빠졌는데.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이 울렁거리고 아픈데. 쉬라고만 한다. 아직은 더 일을 해야 하는데 쉬라고 하니 답답하다. 내년에 딸아이는 학교에 가야하고, 아파트 융자금도 잔득 남았는데. 약은 지어주지 않고, 병도 고쳐주지 않고 쉬라고 하니 더욱 가슴이 답답해진다.
징역을 살고 나왔다. 징역을 살 때만 해도 다부진 꿈이 가득했다. 하지만 철문을 나오는 순간 내 다짐은 세상과 멀리 떨어진 꿈이 되었다. 아내는 징역 사는 내 영치금이며 책값을 벌려고 자신과 맞지 않은 학습지 교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나오자 이젠 아내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을 한다. 함께 있던 벗들도 떠났다. 학교로, 서울로, 직장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공장에 들어가면 석 달도 되지 않아 뒷조사가 따라왔다. 먹고살아야 하는데.
그때 내 위험성(?)을 알고도 해고하지 않은 공장이 있었다. 난 일만 했다. 열나흘 밤샘 작업도 하고, 잔업 특근 조출 작업을 일 년 삼백예순 날을 했다. 모든 것을 잊으려고 일을 했다. 전사가 되지 못할 것이라면 노동자로 살아남자. 그래서 죽어라 공장에서 일만 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됐다. 현장에서 책임 있는 자리로 끝없이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조선소에서 협력업체 가장 나이 어린 현장소장이 되었다. 현장에서 일하는 시간보다 높은 사람들 만나고 술을 마시는 일이 많아졌다. 자리가 높아지니 버는 돈도 늘어났다. 돈을 뿌리는 법도 알게 됐다.
돈을 더 주겠다는 손길도 뻗히고, 아예 사업을 하라는 달콤한 말도 들린다. 차도 중대형 승용차로 바뀌고, 아파트도 널찍한 것을 샀다. 돈 더 주는 자리로 일터를 옮기고, 따로 돈벌이도 했다. 도장(페인트)업체에서는 내 이름 석 자가 이름값도 한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잘나서 그런 것이다. 바로 이 생각이 나를 병들게 한 것이다. 끝없이 욕심만 채워진 거다. 의사들도 모른 내 병은 욕심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내 병을 깨닫고 나서 먼 길을 떠나기로 했다. 아내도 일터를 버렸다. 함께 먼 길을 가려고. 먼 길,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아낌없이 버렸다. 얼마나 짐이 많았던지 버려도 버려도 끝이 없다.
찾아 온 곳이 경남 함안군 여항면 감재마을 산골이다. 빈집을 얻어 왔다. 낮에는 가까운 농공단지에서 백만 원 남짓 받으며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아내와 논·밭일을 한다. 버려둔 땅을 손바닥 멍들도록 쇠스랑질을 해 밭을 일구어 우리 식구 먹을 것을 심는다. 새벽에 일어나 논물 보는 것을 시작으로 공장에서, 그리고 집에 오면 해지도록 밭에서 일을 한다.
모두 돈 안 되는 일이다. 높은 자리로 올라갈 일도 아니다. 얼굴이 새까맣게 타고 목덜미에 주름이 깊게 지는 노동일 뿐. 하루에 일하는 시간도 더 늘어났고, 쉬는 날도 없는데 나는 지금 아프지 않다. 아니 일을 하며 행복을 느낀다. 다시 일을 할 수 있어 무지무지 고맙다.
행복한 노동, 참 고마운 삶을 찾아와 처음 쓴 시가 「첫날밤」이다. 지금 내 삶은 가마솥에 푹 고아지고 있다.

1997년 전태일문학상 수상
<일과시> 동인
시집 『그리고 여섯 해 지나 만나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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