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며

진보정당의 꿈은 살아있다(1998.12.13)

참된 2010. 1. 12. 18:35

진보정당의 꿈은 살아있다

주현숙 schua@jinbo.net / 1998년12월13일 17시32분   참세상

 

 

다시 정치세력화 깃발 든 국민승리21, 청년진보당·국민연합과 경쟁체제로 선거, 패배, 실망, 분열, 침체, 제도권 개별 입당 등등.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지난 10여년간 재야 진보세력이 걸어온 길은 대체로 이런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했다.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좌절과 함께 재야 진보세력은 기존 제도권 정당에 ‘가랑비에 옷 젖듯’ 흡수돼 온 게 사실이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재야운동은 남아 있지 않다’는 회의론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국민승리21, 회비납부자 2천명 확보

이런 악순환이 끝날 수 있을까. 진보세력에게 끊임없는 ‘고민의 대상’이자 아킬레스건이던 DJ가 대통령이 됐지만, 지금도 이를 장담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 때 각각 정권교체와 독자후보를 내세우며 진보진영이 둘로 나뉘었던 경험을 비롯해 지난 10여년간 패인 불신과 분열의 골이 깊은 탓이다. 이에 따라 진보진영은 나름의 활동을 각자 벌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쉽게 이뤄질 수 없는 통일보다는, 제 갈길을 충실히 가는 게 오히려 낫다는 인식도 자리잡고 있다.
 
진보세력 가운데 초미의 관심대상은 역시 ‘국민승리21’(대표 권영길)이다. 지난해 12월 대통령선거 패배에도 흩어지지 않고 진보정당 창당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거결과에 실망해 뿔뿔이 흩어졌던 지난 87년, 92년 대선 때의 모습과는 다른 셈이다. 국민승리21이 지난 대선에서 거둔 성적표는 30만6천표, 민주노총 50만 조합원 수에도 못 미치는 초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국민승리21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전과는 달리 강력한 대중조직인 ‘민주노총’이라는 분명한 실체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또 한때 운동방향을 서로 달리했던 여러 진보세력이 선거과정에서 ‘동상이몽’을 꿈꾸지 않았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만큼 ‘진보정당 창당’에 대한 공감대가 깊고 넓은 셈이다. 선거 뒤 일부가 떨어져나간 것을 빼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일부 세력과 진보정치연합 등 선거과정에서 국민승리21의 기본 뼈대를 이뤘던 층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이미 국민승리21은 자체적으로 ‘숨고르기 작업’을 끝낸 상태다. 지난 2월 여러 진보세력의 공동선거기구에서 정치조직으로 탈바꿈한 데 이어, 지난 9월 중앙위원회에서는 99년 5월까지 진보정당을 만들기로 공식 결의했다. 20여개 실업자단체들의 연석회의도 꾸려냈다. 지난 5월부터 본격적인 회원가입운동을 벌인 결과, 11월 말 기준으로 매달 회비를 꼬박꼬박 내는 회원만도 2천명이 넘어 재정의 90%를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기본적 재정기반을 갖춘 것이다. 지금처럼 회원이 늘어나기만 한다면 내년 5월 창당 때는 1만명에 이를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도 하고 있다. 서울·경기지역과 울산·구미·마산·창원·남해·거제·대전 등 전국 30곳에 지구당이 만들어져 활동중이고, 25곳에 지구당 준비모임이 구성돼 있다.
 
“김대중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권”

그렇다고 국민승리21의 앞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사회의 대체적인 정서나 인식에 비춰 볼 때 진보정당이 착근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수당의 국회 진출을 막는 법적·제도적 장벽이 더욱 높아질 가능성도 크다. 청와대와 국민회의에서 내놓은 비례대표제 등 선거제도 개혁안에 대해 국민승리21 김두수 부대변인은 “진보정당은 아예 죽으라는 뜻”이라며 “정치는 자기들끼리 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한다.
 
국민회의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국회의원수를 250명으로 줄이되 그 절반인 125명을 전국 6개 권역에서 비례대표제로 뽑는 것으로 돼 있다. 여기에 지역구 3석이나 정당에 대한 지지율 5% 이상인 정당에게만 비례대표 1석을 배정하는 이른바 ‘봉쇄조항’이 붙어 있다. 결국 정당명부 비례대표 지지율이 5%를 넘어야 겨우 1석을 얻는 것이다. 독일 녹색당이 올해 총선에서 정당지지율 4.7%로 47석을 얻은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사표(死票)를 방지한다는 비례대표제의 취지가 충분히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원회 참여 여부, 총파업 문제 등 운동노선을 둘러싼 내부갈등으로 국민승리21에 충분히 힘을 싣지 않고 있는 것도 또하나의 어려움이다. 특히 창당되는 진보정당의 이념·정책과 민주노총의 운동노선은 긴밀하게 맞닿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국민승리21은 보고 있다. 국민승리21 노회찬 기획위원장은 “창당되는 진보정당 이념을 ‘∼주의’로 분명히 못박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다만 국내·외 여건상 ‘중도좌파’쪽으로 가닥을 잡는 게 좋을 듯하지만, 이것 또한 당원들의 논의를 통해 결정할 사항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민승리21은 김대중 정부를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규정하는 데는 주저하지 않고 있다. ‘민주적 시장경제’를 내세우지만, ‘민주’는 ‘시장’의 수식어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DJP연합’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배경으로 ‘정권재창출’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보적인 민주개혁은 이뤄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 재벌총수 일가의 전근대적인 소유·경영구조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재벌개혁은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국민승리21의 시각이다.
 
이에 비해 지난 11월29일 창당한 청년진보당(대표 최혁)은 “국민승리21이 유럽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걷고 있다”며 “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하지 못한 유럽 사민주의는 우리 사회의 대안이 아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국민승리21보다 ‘왼쪽’에 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비록 학생·청년운동 세력의 일부가 모여 이뤄진 것이라고는 하지만, 청년진보당 창당은 진보정당 추진세력 내부의 새로운 분열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주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민주노총 일부와 노동운동 관련 단체들 일부가 청년진보당과 비슷한 인식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연합, 핵분열 겪을 수도

정당 창당을 추진하는 진보세력과 대비되는 게 지난 11월30일 준비위원회 결성식을 한 ‘민주개혁국민연합’(공동대표 김상근·이창복)이다. 재야운동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이 단체는, 지금은 김대중 정부와 명확한 분리의 선을 긋기보다는 “현 정권이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고 있으나 개혁주체와 토대가 허약하다”는 판단 아래 ‘민주개혁세력의 총집결을 통한 범국민적 사회운동’을 통해 민주개혁을 위한 국민전선을 형성하자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정치·경제·언론·교육·사회 및 인권 등 모든 분야의 총체적인 개혁을 내걸고 있다.
 
“현 상황에서 진보세력의 최소공배수는 사회안전망 구축이라는 데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대공약수에 대해서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민주노총이 재벌개혁에 대해 보이는 모습은 기대에 못 미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겉으로는 교직원 정년 축소에 반대하고 있다. 조직들의 연합체가 아니라 개인들이 가입하는 국민연합은 기존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의 경계에서 이런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는 것이다.” 국민연합 나병식 조직위원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국민연합의 위상과 사업방향에 대해서는 조직 내부에서도 아직 뚜렷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국민연합을 개혁적인 국민정당으로 가기 위한 전단계로 바라보고 있는가 하면, 기존 전국연합을 대체하는 재야운동연합체로 상정하는 의견도 있다고 한다. 진보정당 추진세력쪽에서는 “국민연합에 참여하는 개인마다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모습이 천차만별일 것”이라고도 지적한다. 국민연합을 87년 대통령선거 이후 등장했던 ‘민주연합론’의 새로운 버전으로 보는 것도 이런 시각과 닿아 있다. 늘 그랬듯이 ‘DJ지지론’으로 끝날 것이라는 얘기다.
 
‘IMF 모범생’으로 통하는 DJ 정부의 신자유주의 성격이 강화하고 있는 터에 ‘개혁전선 강화’가 뜻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도 국민연합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질문이다. 게다가 재야운동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국민연합의 주장도 상당한 반론에 부닥치고 있다. 정통성은 80년대 학생운동에 이어 90년대에는 92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모태가 돼 만들어진 민주노총으로 이어졌다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또다른 ‘민주연합론’이라는 주장에 대해 나병식 조직위원장은 “밖에서 보면 이런 의혹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며 “국민연합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국민연합이 재야운동의 총결집체로 커간다면 더 바랄 나위 없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제도정치권의 정계개편 여부에 따라 국민연합이 핵분열을 겪을 가능성도 높다고 바깥에서는 전망한다. 국민회의가 개혁신당을 만들 경우 국민연합 내부에는 ‘개혁신당 확대강화론’이 득세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결국 정권과의 연계 의혹에서 벗어나는 길은 국민연합이 앞으로 어떤 실천을 해나갈지에 달려 있는 셈이다.
 
합쳐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당분간 진보세력은 하나의 틀로의 ‘단결’보다, 여러 틀로 나뉘어져 선의의 ‘경쟁’에 들어갔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좀더 냉정하게 말한다면 좀처럼 합쳐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큰 게 현실이다. IMF사태를 부른 원인에 대한 진단, IMF와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인 처방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에다, ‘민주연합론’과 ‘독자후보론’을 둘러싼 뿌리깊은 감정의 골이 치유되기 어렵다는 점도 각개약진을 전망하는 또다른 근거이다.
조준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