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 31]노동자시인 오도엽 | ||||
감옥서 만난 장기수‘펜’잡게 해 | ||||
| ||||
94년 봄 구속돼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고 곧바로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 사법당국이 학교 다닐 때 국회의원회관 점거농성을 한 것과 현장에 취업해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생각을 나눈 데 대해 국가보안법 등 위반으로 걸어 넣었던 것이다. 수감된 16사동 옆에 있는 15사동은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들이 몰려 있는 곳이었다. 운동이나 면회 등으로 오가며 얘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장기수들의 삶과 생각을 알게 됐다. 이들은 60년대와 70년대의 전향을 강요하는, 때로는 사람이 죽어나갈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견디고 살아 남은 사람들이었다. 젊은 시절 품었던 사상이나 믿음을, 목숨을 걸고 평생 동안 지켜온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장기수들은 바깥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평생을 바쳐 믿음이나 사상을 지킨 것은 남달리 훌륭한 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늙고 병들어 눈도 잘 보이지 않는데다 작은 일 하나에도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우리 곁의 이웃이었다. 한편으로는 장기수의 삶과 자신을 견줘보면서 스스로의 삶에 대한 반성이 깊어지게 됐다. ‘5년밖에 안되는’ 수배 기간 동안 운동을 회의하고 팍팍한 생활을 힘들어하면서 먹고살기 위해 숨어서 취직해 기술을 익혔던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며 게을러지는 자신을 추슬렀다. 장기수들의 참 모습을 알리고 싶어졌다. 바깥 세상에는 이들이 아주 편향되게 알려져 있었다. 극우 시각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빨갱이로만 그려져 있었으며 좌파 입장에서 나온 기록물들도 지나치게 극화돼 개개인의 사람됨이나 크고작은 울림과 떨림이 있는 마음씨는 잡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자기가 몸담고 있던 현장을 떠나는 게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유행처럼 번지고 있을 때였다. 복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하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벌이가 좋은 일터나 사업을 찾아갔다. 아니면 고시를 준비하러 절이나 고시원.학원으로 숨어들었다. 이처럼 작은 변화에도 쉽게 흔들리는 바깥 사람들에게, 지켜야 할 것을 지켜가는 장기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대못이나 볼펜으로 닥치는 대로 쓰기 시작했다. 당시는 집필의 자유가 없어서, 우유봉지.은박지는 물론 성경.불경.잡지 등의 여백에다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이 적었다. 장기수와 자신에 대한 것이 각각 150여 편씩이 됐다. 장기수들에게 보여주었더니 아주 좋다며 밖에 내보내 알려보자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밖으로 빼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출판돼 나오지는 못했다. 시를 쓴다는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썼기 때문에 문학적 형상화가 제대로 안된 데다 장기수 이야기가 이미 상품성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 겨울 출감, 안에 있을 때 썼던 글들을 가다듬어 노동자 문학상에 응모해 상을 받았다. 또 지난 경험들을 글로 옮긴 작품들을 모아 시집을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장기수에 대한 글들은 아직도 책으로 찍어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마음의 빚으로 남아 늘 갖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고쳐쓰고 있는 것이다. ▶오도엽씨는 67년 전남 화순 출생. 94년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 96년 들불문학상과 97년 전태일 문학상 최우수상 받음. 99년 시집 <그리고 여섯 해 지나 만나다> 펴냄. <일과 시> 동인.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창원에서 살고 있다. |
'노동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오도엽 시인, 전태일 문학상 생활글 부문 당선(2004.9.9) (0) | 2009.09.05 |
---|---|
도시생활 접고 함안 여항산으로 간 시인 오도엽씨(2004.9.13) (0) | 2009.09.05 |
노동문학 문예지 '삶과 문학' 창간 (0) | 2009.09.02 |
다시 노동문학을 생각하며 (0) | 2009.09.02 |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문학 생각”-하태성 씨 (0) | 2009.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