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문학

"그 장미가 딱 불편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참된 2009. 7. 14. 20:02

"그 장미가 딱 불편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샘터에서> 수필가 이현실, 저 꽃이 불편하다
 
수필가 이현실       브레이크뉴스

 

 

 

2006년 이슥한 봄밤이었다. 내 모바일에 다급한 문자 메시지가 떴다.

박영근 교수님 별세 빈소는······.

나는 문자를 읽어가면서 순간 한 그루 석곡(石斛)을 떠올렸다. 남쪽 지방의 그늘진 바위 위나 죽은 나무 위에서 자란다는 여섯 개의 꽃잎을 가진 별 모양의 꽃. 보드라운 명주 두루마기의 흘러내린 앞섶을 여며 쥔 듯한 단정한 모습. 선한 눈망울의 교결한 기품이 흐르던 생전의 시인 모습이 자꾸만 떠오르고 시야는 금새 뿌옇게 흐려져 왔다.

나는 J예술대학원에서 박영근시인께 한 학기 동안 시 창작 강의를 받았던 인연이 있다. 기어이 올 것이 왔다는 그날이 왔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 어쩌면 시인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생은 한 조각 뜬구름이 일어남 같고 죽음은 뜬 구름이 흩어짐과 같다 했던가.

그러나 시인이 남기고 간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는 늘 내 가슴에서 한 떨기 설화(雪花)처럼 피어난다.  이 화창한 봄날.

 
누군가 내리는 봄비 속에서 말한다.

공터에 홀로 젖고 있는 은행나무가 말한다.

이제 그만 내려 놓아라

힘든데 네 몸을 내려 놓아라 

 
사람이 옷을 입고 있는 게 아니라 옷이 사람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간당간당 힘들어 보이던 시인. 그러나 시인의 눈빛은 언제나 명징해서 시 공부에 소홀한 학생들에게 단호하게 질타하였던 엄한 선생님이셨다.

 

▲ 눅눅한 장마철, 골목을 들어서자 활활 불타오르는 장미꽃송이의 그 천연덕스러움에 시인은 너무 혼란스러웠을까?


 
< 저 꽃이 불편하다>란 시 제목을 두고 어느 지인이 그 의미를 물었다고 한다.

"한 여름 장마 철 이었어요. 골목을 들어섰을 때 문득 장미꽃이 보이는 거예요. 아무런 논리적 사고가 아닌 그냥 그 장미가 딱 불편하게 느껴지는 거예요."라고 대답한 시인.

왜 시인은 장미꽃을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이야기 했을까. 어쩌면 시인은 시린 겨울을 냉방에서 보내야했던 우울했던 기억들이 가슴 속에 녹지 않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눅눅한 장마철, 골목을 들어서자 활활 불타오르는 장미꽃송이의 그 천연덕스러움에 시인은 너무 혼란스럽더라는 뜻일까.

박영근 시인, 그의 촉수는 가멸차게 늘 노동현장에 있었다. 격동의 80년 대, 이 땅 민중들의 자유의지가 말살되는 중심에 직접 뛰어들어 몸으로 쓴 <솔아 푸르른 솔아>는 동시대 참여자들의 가슴에서 여전히 푸르디푸르게 자라고 있다.

80 년대의 이념이 무너진 자리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보고자했던 시인. 새로운 세상을 품기엔 그의 감성은 너무 여렸고 시대의 무게는 너무 무거웠으리라. 시인은 문학과 현실의 괴리감 속에서 절망하고 통곡했다. 어떤 시인은 박영근시인을 을 보고 "절망이 너무 깊어서 죽었다"고 말하는 시인도 있으니 말이다.

시인의 학력은 전주고 1년 중퇴가 전부다. 노동운동과 문학을 하는데 학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세속의 허울을 과감히 벗어던진 시인. 그는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며 고뇌하는 정직한 노동 시인이었다.

자본이 모든 가치를 삼켜버린 이 시대에 시인은 자본의 심장에 성난 종기(腫氣)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영근 시인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시와 삶의 경계에서 왜곡된 세상을 향해 예리한 파열음을 거침없이 쏟아낸 시인이며 억압받는 민중의 넋을 대변하는 살신성인의 전사(?)이다.

모순으로 가득찬 현실에 시인은 절망했고 절망할 줄 알았다. 그 절망의 탁자위엔 늘 시와 술이 놓여있었다. 한 끼의 밥 대신 영혼을 울리는 한 줄의 시와 잠시라도 절망을 잠 재워줄 술을 찾았던 시인. 결국 시인은 뇌수막염과 패혈증의 악화까지 겹쳐졌으니 외양간의 지붕처럼 엉성하던 육신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박영근 시인의 마지막 시 창작 강의가 되어버린 4월 어느 날, 강의는 한 권의 텍스트도 없이 진행되었다. 그날따라 시인의 목소리는 바싹 다가앉아 귀담아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 큼 정말이지 모기 소리만 했다.

수강생들은 잦아드는 육성을 가슴에 담으려고 청신경을 곤두세웠고 강의 내용을 노트정리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육신이라는 거추장스런 거죽 옷을 입고 서서 그저 입술만 달싹일 뿐이었다.

강의 도중 몇 번이나 물을 찾았다. 그때 누군가가 "교수님, 식사하셨어요?"라고 묻자 멋쩍게 웃으며 며칠 동안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잠깐 쉬었다 하시라며 눈치 빠른 누군가가 잽싸게 밖으로 나가 샌드위치와 쉐이크를 가져왔지만 한사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미 시인의 그때 건강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상태였다. 시인의  나이 48세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시인은 10년도 더 늙어 보였다. 그런 몸으로 부평에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흑석동까지 단 한 번의 결강도 하지 않고 오다니······. 마침내 90분의 강의가 끝나고 휘청대며 경사진 언덕길을 내려가시던 박영근 시인.

나는 시인과 함께 한 이승의 마지막을 그렇게 보냈고 며칠 뒤 의식불명의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우리와 영별한 것이다. 시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서슴지 않고 박영근 시인을 시의 순교자라고 부른다.

 
바람은 불어오고

먼 데서 우렛소리 들리고

길이 끌고 온 막다른 골목이 젖는다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가 젖는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긴 여운을 주고 간 박영근시인!

시인은 지금 어디에서 진창에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아잇적 미소를 찾고 있을까 

 



  
◇ 수필가 이현실

한국예총 월간 <예술세계> 수필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동작문인협회/짚신문학/문학동인 글마루 회원
수필집 <꿈꾸는 몽당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