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목 : <새경 댓거리>그 많던 민중시, 민중시인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
|
[시경 2003년 가을호]
그 많던 민중시, 민중시인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 우리 민족문학이 나아갈 길을 찾아서 <대담> 백기완(시인, 통일문제연구소장) / 홍일선(시인, 본지 편집주간)
백기완 약력 1933년 황해도 은율 출생. 1953년-1960년대 초반까지 농민운동, 나무심기운동, 달동네라는 말을 만듦.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 설립.?민족학교?개설. 1973년?항일민족문학의 밤?개최. 『항일민족시집』발간. 1978년 백범사상연구소․자유실천문인협의회 공동주최?민족문학의 밤?개최. 1984년 백범사상연구소를 통일문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꿈.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창립 회원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민요연구회 고문. 민중후보로 대통령에 출마. 1990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고문. 2000년 한양대 겸임교수. 2003년 현재, 통일문제연구소장․계간《노나메기》발행인
주요 저서로 1982년 첫시집『젊은날』간행 이후 『이제 때는 왔다』『백두산 천지』『아, 나에게도』등이 있으며, 그밖의 저서로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장산곶매 이야기』『이심이 이야기』『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백기완의 통일이야기』등이 있음.
홍일선 : 선생님 그간 안녕하신지요.
선생님을 생각하노라면 “일흔의 몸에 스물의 정신을 가진 청년”이라고 일컫고 싶고, 한살매(평생) 이 나라의 반독재 해방 통일운동에 몸바친 선각자이시며, 고 장준하 선생께서 선생님을 가리켜 ‘민족문화의 보고’라고 하셨듯이 새내기, 새뚝이, 동아리 같은 우리말을 발굴해 이를 널리 대중화시킴은 물론 <이심이 이야기>라든가 소설 장길산의 첫머리 <장산곶매 이야기> 등 우리의 민족설화나 전설 등을 찾아내 이를 널리 알리시는 등 민족문화 발굴작업에도 헌신하신 문화운동가이시기도 합니다. 아울러 지난 1982년 첫시집『젊은날』(1982년)을 시작으로『이제 때는 왔다』(1986),『백두산 천지』(1989),『아! 나에게도』(1996) 와 같은 네 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으로도 유명합니다. 저로서는 1979년 ‘시인사’에서 펴낸 수상록『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 딸에게 주는 편지』를 통해 ‘백기완’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으며, 이 책을 통해 춘향전, 심청전 등 우리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시를 쓰고자 하는 딸에게> 라는 문학론에서 언급하신- 시 한편은 하나의 혁명이다,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중요하다, 인식과 실천의 통일로서의 비나리 형식과 순수문학의 허위와 반민족성을 언급하시면서 생활상의 요구인 정치성을 뺀 문학은 껍데기 문학이며, 장수매의 부리질 같은 시를 써야 한다는 대목에선 감동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제가 문단에 데뷔하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절 선생님을 뵈었을 때 항상 올곧은 말씀과 자세로 후배들을 깨우쳐 주시고, 작가로서 우리말의 바른 쓰임새라든가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시대정신 같은 것을 강조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 당시 평론 활동을 활발히 하던 자실 총무간사 채광석 시인은 선생님이야말로 우리시대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전형이신 분이라고 우리 후배들에게 말한 적이 있고, 어려운 상황일 때마다 선생님을 찾아 뵙고 여러 고언을 들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시경》에서는 선생님을 모시고 「그 많던 민중시, 민중시인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 우리 민족문학이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 라는 주제로 한 말씀 듣고자 합니다.
백기완 : 반가워요. 내가 홍시인과 마주앉는 것은 지난 1980년대 초에 한 번 병원에서 만난 뒤로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그때 내가 전두환 일당에게 몹시 고문을 당해 죽게 되었을 때 날 받아주는 병원이 없어서 애를 먹었는데 때마침 지난 날 나와 함께 농민운동을 했던 의학박사 김광일 선생이 주선을 해서 간신히 한양대병원에서 입원하게 되었지요. 그때 누구도 접견을 하지 못하게 지키는데 홍시인이 뚫고 들어와서 빨리 쾌차해야 한다면서 우족(牛足)을 사다 주어서 잘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로도 홍시인을 여러 번 보긴 했어도 고맙단 말을 하진 못했지요. 늦었지만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단 인사를 하고 싶소. 그런데 내가 먼저 홍일선 시인께 되묻겠소. 민중시, 민중시인 그렇게 불렸던 시나 시인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소?
홍일선 : 사실 그 질의에 대한 명쾌한 답을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까? 현재의 우리 문학을 간곡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과 첨예한 전선을 이룬, 5월 광주문학을 떠올리는 독자라면 현재 발간되는 문예지나 창작집, 시집 등이 양적으로 엄청나지만 오늘의 한국문학의 현실은 상당 부분 민중적 삶, 민족적 현실을 작품으로 형상화하는 것을 기피하면서?민중문학?이라는 단어가 우리 곁에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는 몇몇 시인들도 있지만, 대다수 시인들이 공동체 문제보다는 자신만의 사적 밀실에 갇혀 우리 모두의 이야기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말하자면 작금의 민중적 현실이 미제국주의의 또다른 얼굴인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대공세에 몰려 차가운 거리로 내몰리고 있건만, 우리 시인들이 민중들의 뼈아픈 삶을 외면하고 개인의 사소한 내면 풍경과 자아 탐구에만 몰두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시경》에서는 선생님을 뵙고 민중시의 실종과 민중시인의 부재현상에 대해 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백기완 : 민중시인, 민중시가 사라졌다는데 그 말 맞습니다. 그런데 내가 홍시인에게 되묻는 뜻은 딴게 아니고 민중시, 민중시인이 없어졌느냐, 아니면 민중이 없어졌느냐 이 말이오. 민중이 계급적으로 높아져서 민중이 없어졌느냐, 아니면 민중이란 것을 양산하는 사회적인 잘못됨, 모순이 극복되어 민중이 역사의 알기로 나섰기 때문에 민중이 없어져서 민중시, 민중시인이 없어졌느냐 하는 말입니다. 민중시인 민족시인이라 일컬어지던 시인들은 민중이라기보다 민중적 현실에 어떤 깨우침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이 민중을 떠남으로서 그 민중의식도 파탄난 상황, 이를테면 배신 아닙니까.
홍일선 : 저 역시 1980년대 피폐한 농촌현실을 고민하면서 농민문학의 당위를 세우며 부족하나마 농민시를 썼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계속 붙잡고 있었던 민족통일 민중해방이라는 크나큰 과제가 있었지요. 물론 우리가 민중을 바라보는 관점이 사라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민중문학론이라는 중요 근거를 놓아버렸다는 철저한 반성이 전제되어야겠지요. 그것이 계급적 입장을 관철하는 것이든 소재적이든 힘없는 서민대중의 간절한 소망을 노래한 민중시가 우리 문학환경, 문학시장에서 사라진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의 약자, 소외된 자와의 소통의 회로랄까요, 그런 공간이 소리없이 사라진 것이지요.
백기완 : 그러니까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말하는데 다르게 생각하진 마시오. 내가 보기에는 민중이 없어졌기 때문에 민중시, 민중시인이 없어진 게 아닌가 하는 오해는 풀린 것 같아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민중적 현실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 민중은 도리어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민중시와 민중시인이 없어졌다 그런 얘기입니다. 자, 그렇다면 홍시인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민중은 있는데 민중시, 민중시인이 없어졌다면 민중시와 민중시인의 형태는 뭐라고 개념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날의 이른바 민중시, 민중시인들이 오늘의 민중을 배신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이말입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홍일선 : 글쎄요. 저는 민중시를 돌아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1980년대 민중시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당대의 문학사조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군사 파쇼정권에서 변혁의 무기로서 시를, 문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1990년대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민중시, 민중시인은 결국 시대정신의 진정한 알기(주체)를 놓쳤거나 아니면 스스로 포기하면서 민중시의 정체성에 회의가 든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시인 스스로에 의해서 민중시가 부정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백기완 : 홍시인의 얘기에 거듭 내가 얘기하자면 민중시, 민중시인들이 머릿속의 배신, 이를테면 관념적 배신에서 민중시 또는 민중시인이 없어졌다는 것으로 봐야 되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문학에서 민중시, 민중시인을 자처하던 사람의 관념적인 등빼기, 관념적인 배신의 현상이지, 그 외에는 아무 뜻도 없다 그렇게 나는 생각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홍일선 : 제 얘기도 그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당대의 민중시라는 것이 하나의 조류에 편승되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민족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자각 속에서 민중문학이 자연스럽게 태동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1980년대의 숱한 노동자시인, 농민시인 그리고 분단모순과 계급모순에 입각하여 우리를 조망해 보려는 이른바 지식인 시인들이 적잖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인들이 지금 절필을 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형성된 거대 자본의 문학시장 속에서 여전히 존재를 과시하고 있으나, 대부분이 민중시를 청산하고 독자들의 정서에 영합하는 회고 취향의 서정시나 연애시 등을 쓰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상당한 발표 지면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백기완 : 홍시인의 말은 참 세련됐소. 문제의식을 붙잡고 문제의 본질을 파헤쳐야 하는데 너무 정서적이고 인간적이오. 잘못 말하면 나만 칼을 들고 있는 것 같고, 늙은이가 좀 지나치지 않나 손가락질 받을까 싶어 좀 답답한데…. 난 그저 한마디로 말해 시인들, 민중시인들의 배신이다 그런 얘기요. 관념적인 배신…, 거기서부터 얘기가 출발하면 나도 좀 말이 풀려 나가겠는데….
홍일선 : 네… 제 흐릿한 귀와 눈이 번쩍 뜨이는 꾸지람으로 듣겠습니다.
백기완 : 내가 어디 홍시인을 꾸지람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홍일선 : 평소 선생님께서는 문학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샘솟듯 솟아나는 문학이다, 라고 말씀해오셨습니다. 1990년대 이후 전국의 대학마다 문예창작과가 많이 생기면서 모름지기 시는 잘 만들어지고, 잘 세공되는 것 같습니만, 그 속에서 지나치게 미학적인 관점만 내세우다 보니 일부 평자들 사이에서 민중시를 철지난 목소리로만 치부하고, 1980년대 문학을 청산 대상으로만 공박하다보니 우리 민중시가 설 자리를 더욱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됩니다. 또한 그러다 보니 민중시인들 역시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민중시를 포기했지 않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백기완 : 홍시인이 구체적으로 문제를 더듬어 가는데 그 이전에 먼저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어요. 보기를 들면 소련이 망한 이후 전세계를 휩쓴 것이 미국의 신자유주의인데, 이 신자유주의에 오염된 사람들이 오늘의 여러가지 문제점을 잘못 이끌었습니다. 소련의 멸망은 뭡니까? 소련 공산당의 부패요, 썩어 문드러져서 망했단 말입니다.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해서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자, 라는 것이 사회주의 이념의 기본이자 우리 인류의 보편적 염원이라고 난 생각합니다. 어느 경전을 봐도 그렇고 어느 큰 그릇을 봐도 혼자 잘먹고 잘살지 말고 옆 사람도 같이 나눠먹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큰 그릇, 대덕(大德)들의 가치관이었거든요. 그렇다면 사회주의 이념은 근대 이후의 소산이라기보다 우리 인류의 보편적 염원이었단 말입니다. 그것이 좀더 체계화된 것이 자본주의 발전 과정이고, 그 반영으로 사회주의가 구체화된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볼 때 소련이 멸망했다는 것은 소련 공산당의 부패때문에 무너진 것이지 인류의 보편적 염원이 무너진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미국 독점자본의 승리,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가 나서게 된 것은 역사의 당위라고 합니다. 난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쉽게 말해 허무주의입니다. 허무주의라는 것은 인간이 하제(전망)를 잊어버리거나 포기했을 때 오는 역사상실적인 현상, 아울러 희망이 아닌 허상의 섬김이거든요. 소련이 망했다고 해서 어떻게 인류의 보편적인 염원이 사라집니까?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으니까 거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얘기는 미국의 독점자본의 비인간적 자본증식논리에 우리 인간의 희망을 걸자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자본주의 원리는 자본증식의 앞날은 있어도 우리 인간의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미국이 아무리 부자나라라고 하지만 미국 인구 2억여명 가운데 돈 많은 사람 400명이 미국과 전 세계의 부를 쥐었다 폈다 하고 있고, 현재 온 세계의 60억중 30억이 겨우 하루 2천원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이게 뭡니까? 바로 미국 독점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모순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우리의 하제가 있겠습니까. 죽음밖에 없어요. 그 죽음을 희망으로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허무주의자인 거지요. 나는 그렇게도 많던 우리나라 민중시인들이 이제는 몇 몇밖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모두 허무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지적하고 싶어요.
홍일선 : 선생님 말씀에 동감하는 바입니다. 1980년 초반, 이른바?서울의 봄?이 깨지고 신군부에 의해 광주학살이 자행되면서 한때 우리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가 만연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차차 자신을 추스르면서 노동현장에 투신하는 문학 지망생과 문학인들이 있었고, 그 현장의 목소리를 형상화한 작품들도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1980년 중반 이른바?민중문학의 주체논쟁?이 우리문단에서 쟁점이 되기도 했고, 민중이 다름아닌 문학의 생산자가 되기도 하고, 향수자가 되기도 하는 등 새로운 현상이 출현하지 않았습니까?
백기완 : 그랬지요. 그런데 그때의 우리나라의 노동현장은 지금보다도 더 심각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불안정 노동자, 직장에서 쫓겨나서 하루하루 막노동을 해먹는 임금 노동자도 못되는 불안정 노동자의 숫자가 800만이 넘고 있어요. 그때보다도 몇 배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나라 시민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양적인 비율도 그때보단 거의 배나 늘었어요. 노동자들에 대한 안팎의 착취구조도 더 심해졌습니다. 요 며칠 전에는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노동자들이 뻑하면 하는 노동쟁의 좀 못하게 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짓밟고 있을 때나 할 수 있었던 얘기를 요즘 하는 겁니다. 일본정부가 공개적으로 한국의 노동쟁의를 규제하라, 탄압하라, 말살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노골적인 식민지 시대 이후 처음이었는데 며칠 전에는 또 미국에서도 그랬어요. 미국이야 여러번 공개적으로 그랬었지만 일본까지도 노동쟁의를 억압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습니다. 국제적인 음모가 우리나라에 이렇듯 무섭게 다가오고 있고 국내적으로는 노동자들에게 표를 제법 얻었을 노무현씨가 불법 폭력시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법률을 다시 만들겠다는 겁니다. 있는 법률도 개폐를 해서 더욱 탄압을 강화하겠다는 건데 노동자들한테 도움을 받은 사람이 지금 누구를 편들어 줍니까? 외래 독점자본과 우리나라 독점재벌 편만 들어주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노동자들의 현실에 뛰어들었던 문학인들, 지금 어디가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는 소련이 망한 뒤에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허무주의, 그 모태인 미국의 금융제국주의 다시 말하면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절망의 정신적 황폐화이지요. 그러니까 내 얘기는 시인들이 다시금 오늘의 민중적 현실 속으로 뛰어드는 풍토를 가지란 말이지요. 민중시를 다시 써라, 그런 얘기가 아니고, 진짜 민중적 현실에 뛰어드는 삶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자유주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허무주의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홍일선 : 매우 일리있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잠시 바꿔서 선생님의 근황에 대해 좀 여쭙지요. 선생님께서는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된 이래 수차례 옥고를 치뤘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 잔혹한 고문을 당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올해로서 어느덧 고희를 맞으셨고,?통일문제연구소?의 일이라든가, 잡지《노나메기》 발간과 통일 관련 강연, 저술활동 등으로 지금도 통일문화운동의 선두에 서 계십니다. 선생님의 최근 근황에 대해 좀 말씀해 주시지요. 2000년부터 한양대 겸임교수로도 출강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백기완 : 요즘 파업현장에서 꼭 이 할아버지가 와줬음 좋겠다고 하면 내 시간이 나는대로 가기도 하고, 또 여기저기서 얘기 좀 해달라고 하는데 다 응해줄 수가 없어서 고르는 편입니다. 얘기해달라고 신청하는 젊은이의 심정과 정작 얘길 듣는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서 꼭 내가 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만 갑니다. 그 다음, 저작이라고 해봐야 최근『백기완의 통일이야기』라고 2년동안 그것을 울면서 썼는데 잘 안 팔렸소. 출판사에 미안할 정도로 말이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운다는 것은 자기 한 개인의 감성이지 사회적 공감대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얼마전 교육방송에서 한달동안 특강을 하는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나 연탄을 찍으면 똑같은 구공탄이 나온다. 그런데 내가 찍으면 안되었다. 따라서 나는 이제 할 일도 별로 없고, 되지도 않는 구공탄만 찍고 있는 꼴이라고….
홍일선 : 선생님의 최근 저서『백기완의 통일이야기』를 읽어보니 선생님의 스무살 무렵인 1950년대 중반부터 1961년 5․16 쿠데타까지 달동네 운동이라든가 나무심기 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지난 40여년간 선생님께서 주창해오신 생각의 알기들이 생생히 녹아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생님은 시인이면서 고단한 삶의 구비들을 헤쳐 나가며 통일운동을 쉼없이 해오셨습니다. 그저 운동이라기보다는 선생님이 지나오신 삶의 응혈진 갈피들이지요. 험난한 삶의 곡절을 숱하게 겪으시면서 그 곡절들 속에서 비원이랄까요, 그것이 결국 민족해방, 민족통일로 모아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백기완 : 글쎄, 내가 민족 해방통일에 내 모든 삶과 활동이 귀결되었다는 얘긴데 그건 과장인 것 같습니다. 억압이 강요되는 세상에서 살다보니까 삶의 유형도 그렇게 자연적으로 빚어진 것이지 쭛별난 게 있겠습니까. 그리고 홍시인이 『백기완의 통일이야기』를 읽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시인, 작가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참 서운합니다. 칠십이 넘은 노인네가 2년 동안 울면서 그 책을 썼는데 그 책을 읽었다는 문인은 홍시인 한 사람밖에 못 봤어요. 난 분단시대가 강요되기 전에는 일제식민지 밑에 있었어요. 어려서 식민지를 겪으며 있었던 얘기들이 그 속에 많이 담겨 있어요. 그 옛날을 더듬다보니 2년동안 울면서 쓸 수밖에 없었지요.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를 겪은 사람들이 나 밖에도 많이 있겠지만 난 나름대로 살아온 삶이 있는데 그것이 다른 뜻이 없다면 뭐 읽을 필요가 없겠지요. 두 번째로 식민지 시대와 분단 시대를 살면서 무엇이 통일이냐는 문제로 몸부림을 쳤습니다. 1953년 1월,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시작된 고민이었단 말입니다. 우리 가족이 본래 다 북쪽에 살았는데 이 삼팔선이 강요되면서 가족이 딱 반으로 나눠졌어요. 북쪽엔 어머니 남쪽엔 아버지, 북쪽엔 큰 형님 남쪽엔 작은 형님, 북쪽엔 큰 누님 남쪽엔 작은 누이, 북쪽엔 우리 할머니 남쪽엔 나, 이렇게 여덟 식구가 반으로 나뉘어져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총을 겨누고 싸우는 형국에서 사셨습니다. 이때 작은 형님은 남쪽의 군대에 가서 저 강원도 철원의?철의 삼각지대?에서 육군 이등병으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북쪽의 큰 형님은 전쟁 뒤에 남쪽으로 내려오시다가 간첩으로 몰려 10년 동안 징역을 살다가 이빨이 몽땅 없어진 상태로 나왔어요. 감옥에서 워낙 못 먹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내가 만 3년을 접견하지 못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접견을 가면 사과 한 톨이라도 넣어주고 몇푼 영치금이라도 넣어줘야 하는데 차비조차 없었으니 방법이 없었지요. 어느 날 접견을 갔더니 교도관이 나무랍디다. 아무리 빨갱이 형님이라지만 어떻게 3년간 면회 한 번 오질 않느냐고…. 그래서?아저씨 고마워요?하면서 돌아서서 울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난 서울에서 한번도 버스를 타본 적이 없었어요. 매일 걸어서만 다녔지만 그래도 늘 흥얼거리면서 다녔어요.?비나리?도 흥얼거리고 유행가도 불렀지요.?갈매기 바다 위에 나지 말아요?라는 노래, 아 갈매기가 바다 위에서 날지 않으면 어디서 날 거요? 날개도 다 부러졌고 배도 고픈데 뭘 날겠다는 말이냐? 그냥 죽어라 이 자식아, 그런 말도 되고 바다만 날지 말고 역사의 질풍노도의 현장을 날개치란 뜻도 되지요. 신발 하나 살 돈 없어 주워 신거나 친구 집에서 신발을 신고 오면 당장 자기 신발 왜 신고 가냐고 하지요. 그러면 내가 ?이 새끼야, 신이란 무엇인줄 알아? 먼저 신는 놈이 임자야 임마.?라고 윽박지르기도 했지요. 그런데 우리 큰 형님은 감옥에서 나와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60년만에 누님을 3년 전 북쪽에 가서 만났는데 갈대처럼 변해 서로 껴안고 꼼짝 않고 울기만 하다가 돌아왔어요.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만 나고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았어요. 1953년 1월부터 통일문제, 민족문제와 씨름해 왔는데 그 피눈물 나는 동안 가만히 생각해보니 통일은 남과 북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남쪽을 거머쥔 게 미제국주의인데 그들을 없애지 않으면 통일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난 통일문제를 추상적 민족문제로 제기한 것이 아니라 분단 억압 착취 때문에 고통받는 민중의 해방이 전 한반도적으로 완결되는 것이 통일이라는 것입니다. 미제, 일제 앞잡이들, 썩어 문드러진 분자들이 큰 소리 치는 세상이 아니라 양심이 통하고 피눈물이 통하는 세상,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세상, 노나메기 세상을 만드는 것이 통일이란 말입니다. 그랬더니 무조건 통일부터 하고 보자는 사람들은 나더러 이상한 논리라고 합니다. 자본의 자기증식논리에 따르면 한반도를 먹은 미국이 있고서는 진정한 통일이 아닙니다. 그 미제를 몰아만 낼 것이 아니라 이 땅별(지구)에서 아주 해체하여 세계를 통일하는 첫걸음, 민중의 해방이 통일입니다. 그런 얘기로 쓴 것이『백기완의 통일이야기』입니다. 여보시오 홍시인, 작가들 제발 그 책 좀 읽어주길 바랍니다.
홍일선 : 1967년에 장준하 선생님의 제의로?백범사상연구소?를 만든 다음에 선생님께서는 민족문화운동의 큰 틀을 짜게 됩니다. 『백범어록』이라든가?앎과 함?문고인『조선혁명선언』『민족주의자의 길』등을 출간하였고, 또한?민족학교?개설 등으로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항일민족시집』을 발간하는 등 관념적인 지식인 문학세계에 큰 경종을 울린 바 있습니다. 당시 그 저서의 의미는 우리 민족문학의 맥락을 찾자는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 여러 문인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문학인들이 숭미(崇美) 반북주의(反北主義)에 매몰되어 있을 때가 아닙니까. 그 당시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백기완 : 나는?박정희 군사독재타도?라는 물살의 맨 꼬리에 서왔습니다. 그 거센 물살 하나는 이리 흐르고, 또 다른 물살 하나는 저리 흐르던 때, 내가 내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때가 있었어요. 내 삶의 현실로 볼 때 이런 두 개의 물살이 지금 잘못 가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 때였지요. 나는 나름대로 박정희 정권을 개념화했는데 그것은 단순한 군사독재가 아니라?분단 군사독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둘로 가르는?분단 군사독재?란 말이지요. 나아가서 박정희는 분단 군사독재를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그 체제가 파쇼화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그러면 박정희 분단 군사독재를 타도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하는가? 박정희는 분단의 원흉이자 앞잡이다, 라고 몰아세우는 것이요. 두 번째로는 그 체제가 파쇼화 하기 때문에 파쇼체제에서 타도운동은 가장 피해를 당하는 민중의 해방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민중이 앞장서서 군사파쇼를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된 것이지요. 그래서 박정희 분단 군사독재 타도라는 거친 물살에 뛰어들고 보니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 물살을 따라다니면서도 나 나름대로 판단하고, 나 나름대로 대응코자 하는 원칙과 방법들로 박정희 분단 군사독재 타도투쟁을 관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상관없었지요. 그래서 박정희 분단 군사독재를 타도해 민주화만 얻어내자는 것이 아니라 해방 통일이라는 명제를 들고 나가야겠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해방?이라는 명제만 들고 나가면 그 말 한마디에도 무서운 탄압이 다가오기 때문에 해방이라는 말은 조금 뒤로 돌리고 ‘통일’을 내세워야했습니다. 다시 말해 통일이라는 명제로 박정희 분단 군사독재를 타도하는 뜻을 집약했는데 그 통일은 누가 하는 통일이냐는 것입니다. 나는 민중이라고 믿었습니다. 남쪽과 북쪽의 민족이 앞장서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자칫잘못하면 통일을 추상적 민족문제로 올가맬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보기를 들어 우리 한국말만 쓴다고 다 민족은 아니지 않습니까.?반민족?이 있어요. 살인마 미제 앞잡이도 민족입니까? 때문에 민족의 알짜, 민족의 실체가 반 박정희 분단 군사독재 타도운동에 앞장을 서야겠다는 것입니다. 그게 민중이요, 민중해방이 곧 통일인데 그 통일은 민족분열주의적인 세력만 몰아내는 것이 아니다. 민족분열주의를 강요하는 파쇼의 총체 미제국주의를 때려부수는 해방투쟁만이 통일을 이룬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 생각이 민중적 요구의 전부라는 것은 아니고 난 그랬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민주화의 실체는 통일이요, 통일의 실체 또한 민주화라, 모든 민주화의 요구는 통일?이라는 명제를 들고 나와야 하는데?통일?이란 명제를 들고 나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군사파쇼체제에서는 통일이란 말만 써도 잡아갔으니까, 잡혀가면 매를 맞아 죽어야 하니까, 통일이란 문제를 갖고 조그마한 연구소를 만들어볼까 했는데 그것이 어려워 친구 사무실에?통일문제연구소?라고 간판을 붙이면 어떻게 알고 왔는지 제까닥 와서 간판을 떼어가고 친구를 잡아가는 겁니다. 돈 벌어서 백아무개에게 자금을 댄 것이 아니냐고 때리고 협박을 하니까 그 친구가 무서워서 간판을 떼어가라고 하기도 하고 또 사무실을 출입하지 말아달라고 하기도 했지요. 그래서?백범사상연구소?라고 하자는 생각에 간판을 바꿔 달았지요. 그래도 간판을 내걸 수가 없었어요. 하는 수없이 우리집 대문에 걸었지요. 그러나 그것도 한 시간도 못되어 바로 떼어내어 우리집 앞에서 불을 질렀으니까요. 그러니까 ‘백범사상연구소’가 되었든 ‘통일문제연구소’가 되었든 내 등 뒤에다 그 연구소 간판을 매고 다닌다고 해서 주변에선 나더러 ‘백통일’이라고 덧이름을 달아주기도 했었습니다. 참말로 노여움의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멈출순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통일의 이념을 당장 내세울 것이 아니라 통일운동의 역사적 줄기, 역사적 맥락을 먼저 검출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맥락을 오늘에 이어 발전시키는 것이 통일이다, 혹은 통일운동이다, 이렇게 제시하자는 얘기가 오고갔어요. 그 방법의 하나로 제국주의와 싸우던 애국열사들의 의기를 읊어두었던 시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한번 모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도서관엘 갈 돈도 없었고, 점심값과 차비도 없어 마냥 굶을 때였지요. 그래도 뜨거운 젊은이들이 앞장서 항일시를 모았습니다. 아무려나 집대성은 못했습니다만 그것을 『항일민족시집』이라고 했고, 그것으로 땅불쑥한(특별한) 문학을 하고 예술을 하고 문화운동을 하고 해방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어도?반제국주의 항일?이라는 것을 시적으로 승화시키고 오늘의 해방투쟁을 뒷받침하고 혹은 앞장선다라는 증거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걸 좋게 얘기 해주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요.
홍일선 : 그 책을 지금 제가 갖고 있거든요. 서문을 함석헌 선생님이 쓰셨고 백선생님을 비롯하여 장준하 선생, 김지하 시인, 김도현 선생, 최혜성, 허술, 김희로 선생 등 여러 뜻있는 인사들이 참여했다는 것을 후기에서 보았습니다. 그 이듬해인가요? 선생님은 1973년 12월 24일, 유신독재헌법 개헌청원을 위한 100만명 서명운동을 전격적으로 전개하시고, 그 이틀 후인 12월 26일 ‘항일민족문학의 밤’을 흥사단 강당에서 개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선생님은 지난 1984년 평론가 채광석씨 등에 의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재건되면서 이후 숱하게 치뤄진 바 있는 ‘민족문학의 밤’ 이라는 문학운동의 단초를 열어젖힌 선구자이기도 합니다. 당시에 선생님께서 좀 전에 말씀하신 것처럼 박정희 군사파쇼라는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정권과 그 속에서 기생하는 반민족세력들과 당당히 맞서서 행사를 연 것은 그때의 자료가 없었다면 이를 믿지 않을 사람도 많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항일민족문학의 밤’을 개최한 배경이라든가, 그 문학행사에 참여했던 당시 문학인들의 면모가 궁금합니다.
백기완 : 그 항일민족시집을 갖고 있다니 고맙습니다. 그리고 옛추억이란 모두 아름답다는 말이 있지요. 홍시인이 내게 와서 아득한 옛날 얘기를 다시 새김질하게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런데 나는 좀 엉터리입니다. 정기교육을 못 받아서…. 옛부터 이런 노래가 있었지요. ?바윗고개 언덕을 홀로 넘자니, 옛님이 그리워 눈물납니다, 십여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납니다.?이 노랫말이 정확히 맞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던지 1950년도 중반쯤에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이태리 민요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우리나라 사람이 노랫말을 만들고 작곡한 우리 노래였어요. 그 정도로 나는 무식했는데, 1950년도 초에서 중반까지는 서울이라는 데가 얼마나 다 깨졌었느냐면 서울역에서부터 신문 한 장을 보면서 동대문까지 걸어도 부딪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집도 없고 사람도 별로 없고 했는데 그 폐허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습니다. 만약 이 땅에 시가 있다면 그 시는 활자하고만 연결된 시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깨어진 벽면이 있잖습니까. 전쟁으로 깨어진 벽면, 저 공간에다가 시를 쓰자면서 다녔어요.?벽시운동?이지요. 난 이런 발상을 어디서 주워들은 것도 아니고, 책에서 본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나 혼자서 그러고 다녔습니다. 주변에선 내가 공부도 안하고 문학이 뭔지도 모르면서… 문학이 있으면 활자가 있는 것이지 벽에다가 왜 시를 쓰느냐면서 어디서 무식하고 못된 놈이 굴러 왔다고 깡탈을 부리곤 했지요. 그러면 나는 그런가 하고 귀담아 들어야할 텐데 그러질 않았습니다. ?저 벽이 그냥 벽면이냐, 우리 겨레의 피눈물이 어려있는 벽이다. 거기다 우리 시를 새겨 넣자는데 그게 어째 무식한 수작이냐??고 했지요. 그러면 그 사람들이 소주 마시러 가면서도 날 끼워주지도 않고 문학 얘기할 때도 날 안 끼워줬습니다. 그때 서울 명동은 이를테면 예술가들 문인들이 많이 모여드는 중심지였는데 내가 대폿집에 나타나면 다들 나를 피해서 자리를 옮겨갔어요. 자리를 피해봤자 당시 명동에는 돈없는 예술가 문인들이 갈 곳이 별로 없어서 옆골목으로 옮겨갑니다. 이에 또 따라가면 날더러 재수 없다며, 또 나를 피해서 가버리곤 했지요. 그러면 나는 그들이 먹다 남긴 것이나 먹고서 홀로 노래를 부르며 쓸쓸히 돌아오진 않았습니다. 주먹을 뽑아들곤 했지요. 그땐 그랬습니다. 나는 그런 꼴도 못 보아 주었지만 박정희가 자신의 분단 군사파쇼체제를?유신?이라고 하는, 정말로 용납할 수 없는 헌법체제로 포장을 하는 것은 정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비인간적이요, 반민중적이요, 반민족적인 체제를 헌법으로 포장해서 꼼짝을 못하게 만드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나서기로 한 거죠. 그러면 그 유신독재를 어떻게 부수느냐. 첫째 유신이 나쁘다는 것을 대중화시켜야 되겠다, 대중화시키는 방법으로 명망가들과 유신헌법 철폐 백만인 서명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동원하면 유신헌법을 바꾸자는 공론이 빠르게 전국적으로 퍼지리라는 판단이었지요. 그래서 개헌 청원백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는데 그 개헌청원운동이 직접적으로 대중에게 호소하는 방법 외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문화예술적으로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문학예술의 밤을 열게 되었지요. 우리는 1973년 12월 24일 아침에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을 공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여러 신문들이 우리 소식을 전한 것은 높이 살만 했습니다. 이틀 뒤?항일민족문학의 밤?을 흥사단 강당에서 열게 되었는데 강당은 크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가득 모였습니다. 신경림, 이호철, 백낙청, 염무웅 등… 좀 생각이 있다는 문인들은 시간이 겹쳐지지 않는 한 다 왔습니다. 거기서 장준하 선생이 나서서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제2차로 공포했어요. 1차는 이틀 전에 YMCA 기독교청년회관에서 했고 두번째로는 그곳에서 공포하게 된 것이지요. ‘항일민족문학의 밤’이 곧 유신헌법을 바꾸자는 변혁투쟁으로 발전하자 분위기가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내가 나서서 항일민족문학의 밤을 왜 이 마당에 열었느냐, 얘기를 하는데 5분도 못 되어 전깃불이 갑자기 나가버리더라구요. 바로 그 시간에 당시 국무총리인 김종필이 어디다 대고 유신헌법을 개정하자고 그러냐, 용납할 수 없으니까 당장 거둬치우라고 테레비에 나와서 생방송으로 막 협박할 때였습니다. 나는 그날 그의 생방송이 나온다는 것을 보도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지요. 바로 그 때박(순간)에 내가 한마디를 하려고 하니까 겁이 난 박정희 일당들은 전깃불을 꺼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한발자욱도 아니 물러서며 그 캄캄한 어두움을 갈라쳤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선 것은 유신헌법 개정이라는 정치적 요구와 유신헌법이 갖고 있는 반민족적이고 반인간적이요, 반민중적인 정서를 하나로 통일하는 방법의 하나로 항일민족문학의 밤을 열게 되었다.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면 정치투쟁과 문화투쟁을 변증법적으로 하나로 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우리가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말뜻을 아는 젊은이들은 발을 구르고, 모르는 사람은 눈만 굴리는데 바로 그 때박 나는 다그쳤습니다. “여러분, 다들 성냥 가지고 있지요? 라이타도 있지요. 그것들을 꺼내어 불을 켜십시오.” 캄캄하니까 다들 불을 켰어요. 그리고 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다들 엄지손가락은 있지요. 그 엄지손가락을 꺼내어 불을 당겨라, 만약 엄지손가락이 공장에서 일하다가 잘려나가 없다면 염통은 아직 갖고 있지 않느냐. 염통이 무엇인가 심장 아니냐, 그 심장 다 꺼내! 거기다가 불을 질러! 그리고 이제부터 캄캄한 이 밤을 불지르며 우리에게 암흑을 요구하는 광화문으로 행진하자”고 했습니다. 청와대로 가자는 말이었지요. 그 때박(순간) 와- 하는 아우성이 터져나왔습니다. 굉장했지요. 이리하여 하나같이 막 일어서려는데 다시 불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피를 토했습니다. “이제 불이 들어왔으니까 또다시 전깃불이 나갈 때까지 성냥을 주머니에 넣어두라, 불이 나가면 다시 불을 지르자. 자, 박정권의 어리석은 만행을 다 보았지요. 그렇습니다. 이제는 더이상 박정희 유신독재는 도저히 용납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 다 개헌용지에 서명하자. 우리 민중, 절대 다수 민중의 의사를 뚜렷하게 증거하자”라고 외치자, 맙소사 이때 하늘을 찌르는 아우성과 마루를 뻐개는 손뼉소리가 엄청나게 쏟아졌지요. 그때 일을 참고하려면 1973년 12월 26일인가 27일자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문화면을 보세요.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습니다. 아무튼 우리나라 문학운동 역사상 문학이라는 깃발 예술이라는 문화적 쟁기를 들고 대중투쟁에 앞장을 섰던 것은 보기드문 예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홍시인이 말을 걸어오니 내가 얘기하는 겁니다.
홍일선 : 지금 말씀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창립 이전의 얘기인데요. 1980년대 넘어와서 5월 광주항쟁 이후 등장한 일군의 청년 문학인들에 의해 주도된 ‘민족문학의 밤’ 행사를 진행하면서 ‘항일민족문학의 밤’에 대하여 많은 얘기를 나눈바 있었습니다. 그 당시 ‘항일민족문학의 밤’이 다름아닌 밀실에 갇힌 우리 문학을 대중의 품으로 안겨준 민중문학운동이자, 이후 1980년대 문학운동의 물꼬를 터주는데 소중한 계기로 작용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봅니니다. 이 점 분명 우리 문학사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하겠지요.
백기완 : 그렇게 얘기하지 마세요. 그러면 내가 미안해서 앉아 있을 수가 없지요. 잘못하면 홍시인이 나를 너무 과장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홍일선 : 아닙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죠. 또한 ?항일민족문학의 밤?에 그때는 이미 작고한 탓으로 신동엽, 김수영 시인은 참석하지 못했겠지만 그 당시 이 행사에 참석했던 여러 선배 문학인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날 밤에는 모두들 시만 낭송했습니까.
백기완 : 시만 낭송한 것이 아니지요. 그때 함께한 사람으로는 앞서 얘기했듯이 신경림, 염무웅, 백낙청, 김지하 등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고은 시인이 앞장을 섰지요. 그런데 누가 1, 2년 먼저 앞장을 섰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어려운 억압체제속에서도 문인은 본디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입증해준 것이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항일민족문학의 밤이 열린 그날, 가수 김민기에게 부탁을 하나 했었습니다. 우덕순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동지가 있는데 그분이 쓴 시가 괜찮아서 그 시에 곡을 붙여서 발표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시의 제목이「보난대로 죽이리라」였는데, 가사가?네 뿐인줄 아지 마라, 너의 동포 오천만을 보난대로 죽이리라?였지요. 항일민족 시집에도 실렸지만 내가 참 좋아했어요. 그때 왜놈이 오천만이었거든요. 작곡가 김영동이 해금을 섞은 곡에 김민기가 노래를 하는데, 그때 멋졌던 이야기는 머리가 허옇던 함석헌 선생님이 눈물을 계속 줄줄 흘리시고, 장준하 선생도 비오듯이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날 항일민족문학의 밤에는 문학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많은 예술가 민주투사 양심적 민중 지식인들이 함께했습니다.
홍일선 : ?항일민족문학의 밤? 열기가 지금 생각해봐도 참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날 엄혹한 독재치하인데 행사가 끝난 이후 모두들 별다른 일없이 무사히 잘 들어가셨는지요.
백기완 : 그럴 리가 있겠어요. 행사가 끝나고 밤 11시 반쯤에?창비?의 김윤수 교수와 우리 집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그때 눈발이 날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깜깜한 골목 뒤에서 누군가 자꾸 따라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걸음을 재게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사람이 뒤에서 ?야 임마 담배 한 대 주고 가? 하는 겁니다. 얼핏 보니 나보다는 젊어 보였습니다. 이에 나는 대꾸도 않고 다시 잰걸음으로 갔어요. 그랬더니 ?이 자식 담배 한 가치 달라니까 왜 그냥 가??라고 하질 않겠어요. 그때 돌아보면 그녀석이 날 번개처럼 칠 거란 걸 나는 알고 있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뒤를 안돌아보고 한 발짝 한 발짝 가다가 자그맣게 얼어붙은 눈더미 앞에서 ?담배 없다는데?하며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때박(순간) 홱하고 내게 발이 들어오더군요. 그 때박 나는 잽싸게 피하고 그대신 그 사람은 그 눈더미에 미끌어졌지요. 그때 나는 잽싸게 그 녀석의 머리를 잡고 바닥에 짓찧었습니다. 한번 두 번 짓찧었더니 눈에서 흰자위가 나오는데 세 번을 짓찧으면 그냥 죽겠더라구요. 하지만 그의 주먹을 보니 내 주먹의 세 배는 되어 보이고 몸도 나보다 몇 배나 더 커보이는 녀석이라, 에라 모르겠다 하고 한번 더 짓찧을려고 하는데 뒤에서 또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치는 겁니다. 그때도 난 얼굴을 그 사람 쪽으로 돌리지 않고 반대쪽으로 돌리며 왜 그러냐고 했지요. ?점잖으신 분이 뭘 불량배한테 그러십니까? 하길래 내가 이 자식 혼 좀 내주려고 그런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말하길 ?우리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냥 가시죠? 그럽디다. 그 일이 요샛말로 하면 느닷없는 폭력아니겠어요. 서양말로 하면 테러. 아주 꼼꼼히 짜고 한 살인미수였지요. 내가 그때만 해도 워낙 몸이 쟀으니까 망정이지, 참말로 죽을뻔했습니다. 요 얼마전에 만난 김교수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때 생각이 난다며 배꼽을 잡고 웃더군요. 그때 내가 자칫하다가는 술 한잔 먹고 불량배와 싸우다가 죽은 걸로 처리되었을 겁니다. 박정희의 무시무시한 살인행위의 실패작이었지요.
홍일선 : 듣기로는?항일민족문학의 밤?행사 이후로도 몇 차례나 더 개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백기완 : 또 있었지요. 1978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와 백범사상연구소가 공동주최한 ?민족문학의 밤?이 열렸는데 그때 난 고은 선생이 쓴 「갯비나리」를 무기수로 감옥에 있는 이현배 씨 부인과 입체적으로 낭송을 했었습니다. 성공회 강당에서 열린 행사인데 ?항일민족문학의 밤?이 발전적으로 계승된 것이지요. 이 행사가 끝나고 감옥에 있는 김지하 시인의 어머니가 수고했다며 개고기를 샀어요. 잘먹었지요.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맥주 한잔 마시러 가자고 해서 고은, 황석영등 20여명이 맥주집에 가서 먹는데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들어와 포위를 하더군요. 종로서 정보과장이엇을 겁니다. 그 사람이 내 귀에 대고?잠깐 나가서 차나 한 잔 하시죠??하길래 나는 차는 안 마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고리눈으로 바뀌더니? 당장 가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이에 문인들이 막 소릴 지르고 했지만 당할 도리 없이 내가 잡혀갔어요. 당시 중앙정보부였지요. 그 지하실에 가서 왜?민족문학의 밤?을 열게 되었냐며 따지고 매도 맞고 했지요. 그런데 밤에 유치장 저 건너편에 있는 구두가 눈에 익어서 긴가민가했는데 어디서 ?아, 또 자자?하는 소리와 한숨이 들렸어요. 고은 선생 목소리였지요. 내가 먼저 잡혀오고 이틀 후에 고은 선생이 잡혀왔던 거지요. 그때 난 오줌이 마렵지도 않은데 마려운 척 하고 똥통에 대고 헛기침처럼 ?아! 일초?했어요.?일초?는 고은 선생의 덧이름 아닙니까. 이에 고은 선생은 내가 다섯 방 건너에 있다는 걸 알었지요. 그 뒤 한 보름쯤 고생을 하고, 둘이 같이 나왔지요. 나와서는 소주 두 궤짝과 맥주 세 궤짝을 사서 당시 퇴계로 6가에 있던 내 집에서 밤새도록 그 술이 다 없어질 때까지 떠들고, 노래하고 그랬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내가 꼭 증언 하고 싶은 것은 그뒤 감옥에 있을 때 입니다. 《실천문학》이라는 잡지가 몰래 들어왔는데 민족문학의 밤?행사 화보가 실려 있더군요. 그 화보 속의 기둥에 한쪽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쓰여 있고 한쪽에는?백범사상연구소?가 있어야 하는데 ?백범사상연구소?만 지워졌더군요. 내가 전두환 정권에 매를 맞고 죽는다, 산다 그럴 때라 그 책을 어렵게 구해서 이불 속에서 몰래 보면서 어찌나 서운하던지. 매를 맞는 것도 원통한데 마땅히 있어야 할 장면을 지운 사진을 보고선 이루 말할 수 없이 서운했습니다. 그게 1980년대 초의 일인데 굳이 내가 지금에라도 증언하고 싶단 말이오. 정말이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요.
홍일선 : 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야기를 바꿔서 선생님께서 남으로 내려오시게 된 것은 축구선수가 되기 위해서였다는 말도 있지만 당시 6년다녀야 할 초등학교를 4년까지만 다니지 않았습니까. 선생님은 일제시대에 유년기를 보내야 했고, 그때 다른 공부는 일등을 해야 하지만, 왜놈말은 꼴찌를 해야 그게 일등이라고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말 대신 우리말를 쓴다는 이유로 매를 맞았다고 하더군요. 선생님의 우리말법과 우리 민중언어 토박이말의 발굴과 보급, 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최근 EBS 노나메기 문화강좌에서 「우리말의 하제(내일)」에 관해서 강조하신 바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아주 잘못 쓰여지고 있는 언어 중 채팅을 소근대기(속살대기) 아이디를 덧알기, 메시지를 글월, 혹은 유무로 쓰자는 운동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우리말살리기운동?과 관련해 요즘 인터넷의 폐해가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인터넷 채팅(소근대기) 용어랄까, 또 게시판 같은 곳에 실린 글들을 보면 세종대왕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대성통곡하실 정도입니다. 시를 쓰는 우리 입장에서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민중언어랄까 토박이 말을 어떻게 가슴속에 지니고 계셨을까 궁금합니다. 우리말 사랑에 대한 특별한 내력이라도 있습니까.
백기완 :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났습니다. 이상하게 머리가 좋은 애가 태어났다고….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5학년 교과서를 거의 다 떼고 들어갔으니까 배울 게 없었지요. 그러니 당시 1학년 우리 반에는 열일곱 먹은 장가를 간 학생도 있었지만 선생이 내게 반장을 안 줄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형이 어디서 들었는지 왜말은 꼴등하는 게 일등이라면서 반장이라고 왜말공부를 너무 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말은 외우지도 말고, 외우면 머리가 나빠진다고 하는 겁니다. 그때는 형의 말이 절대적인 진리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뒤로는 일본말을 진짜로 꼴등을 하기도 하고, 일부러 꼴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2학년 때는 부반장으로 떨구더라구요. 그래서 그건 안 하겠다고 했더니 막 때리면서 강제로 부반장 완장을 달아 주더군요. 하는 수없이 학교 가서는 달고, 올 때는 책상에 놓고 왔어요. 그러니까 우리형은 잘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은 종아리에 피가 맺히도록 때러드라구요. 이에 앙앙 눈물없이 우는 맨데이 울음을 울면서 집엘 왔더니 어머니께서 내가 우는 까닭을 들으시고선 말씀하시더군요. 그놈이 ‘던적’이로구나, 합디다. ‘던적’이란 몸 속까지 쳐들어온 적군이라는 뜻 아닙니까. 나라는 사람은 이렇게 해서 우리말을 즐겨 쓰게 된 것이지요. 두번째로 나는 어떻게 우리말 쓰기를 하게 되었느냐, 난 공부를 안 했거든요. 축구선수가 소원이었으니까. 그 다음엔 주먹쟁이가 소원이었고. 그렇지만 주먹 갖고는 못산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안했고, 그 다음 소원이 설렁탕집의 심부름꾼이었습니다. 배가 고플 때였으니까 요. 설렁탕집에서 일을 하면 밥은 실컷 먹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3일 동안 곧잘 일을 했는데 얼마나 밥을 많이 먹었던지 밥 많이 먹는다고 나를 내쫓았어요. 그런 나머지 내 꿈은 깨졌고…. 어느 날 애들과 얘기를 하면서 느낀 건데 그 애들이 쓰는 말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보기를 들어 ‘적’을 일본말로 ‘데끼’라고 하는데 초등학교 1학년 땐가 어머니께 엄마, ‘데끼’가 쳐들어 왔대, 했더니 그 말을 모르시더군요. 그런데 할머니가 그 말을 듣고선 이놈아, ‘데끼’가 아니라 ‘부셔’야, 하시는 겁니다.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는 놈을 ‘부셔’라고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학교에 가서 으시대며 ‘데끼’가 아니라 ‘부셔’가 쳐들어왔다고 했더니 애들이 놀리고 선생 귀에 그 말이 들어가서 매를 맞았습니다. 나의 우리말쓰기는 그런 것이지요. 그뒤 8․15해방과 함께 서울엘 오니까 서울운동장에 ‘헤엄치는 데’가 있었어요. 그때는 수영장이란 말은 잘 안 쓰고 ‘헤엄치는 데’라고 했습니다.?데’란 ‘곳’이란 말 아닙니까. 어쨌든 거기서 누가 물 속으로 뛰어드는 걸 보고 내가 야 ‘속꽂이’ 근사하게 잘한다고 했더니 옆에 애들이 ‘속꽂이’가 뭐냐고 합디다. 그래서 물 속으로 곧장 꽂히는 게 ‘속꽂이’라고 하니까 애들이 ‘다이빙’이지 ‘속꽂이’가 뭐냐고 빈정거리더니 내가 계속 우기니까 때려서 코피가 났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린 ‘속꽂이’라고 말하면서 자랐는데 서울애들의 ‘다이빙’이라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저런 것들이 내가 우리말 쓰기에 관심을 갖는 때참(계기)이 되었지요. 내 책에도 나오지만 전쟁이 한창이던 1953년도 1월, 서울역 주변 언덕 어디쯤에 조그마한 채알학교(천막)를 쳐놓고 있는데 어느날 그 동네에 눈이 오고 달이 뜨니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채알학교 소식지 이름을 「달동네 소식」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내보냈는데 그것으로 하여 빨갱이로 몰려서 경찰서에서 일주일동안 거꾸로 매달려 고문을 당했습니다. ‘달동네’가 뭐냐, ‘하꼬방촌’이지, 라는 겁니다. ‘하꼬방’은 왜말 아니냐고 했더니, 나더러 왜말을 싫어하는 걸 보니 네놈이 빨갱이임이 틀림없다고 몰아 세우며 배경이 있을 거라고, 내 뒤에 있는 배경을 밝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한심했지요. 그 유치장에서 나오고 나서도 내가 이따금씩 달동네, 달동네 했더니 그 뒤에는 시에서도 ‘달동네’라는 말이 나오고 소설에서도 나오더군요. 나의 우리말 쓰기는 이런 것이었지요. 아무튼 우리말 한마디 한마디를 쓰려고 애쓸 적마다 난 자꾸 눈물이 납니다.
홍일선 : 우리말을 사랑하는 과정에 정말 피눈물나는 일도 많았군요. 그런데 선생님도 인터넷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요즘 우리말에 변용어가 많습니다. 축약어, 어순의 파괴, 비속어의 범람 등이 과거 일본어의 폐해보다도 무차별적이어서 인터넷 언어 사용의 역기능이 더 심각한 듯합니다. 이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과히 우리말의 혁명적, 총체적 파괴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백기완 : 혁명적인 것이 아니라, 반역적으로 파괴되고 있지요.
홍일선 : 그 문제점에 대하여 선생님께서 EBS 강좌에서 아름다운 우리말에 대하여 가슴 뭉클하게 말씀하셨지만 젊은 사람들에게 우리말에 대해서 백번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을 듯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우리말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번 말씀해주시지요.
백기완 : 내가 교육방송에 가서도 말했지만 ‘화이팅’이란 말 좀 쓰지 말았으면 합니다. ‘화이팅’은 우리말로 ‘싸우자’ ‘힘내자’ ‘때려부수자’ ‘공격하자’ 그런 말 아니겠어요. 그건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도 잘 안 쓰는 말입니다. 그건 조작된 영어요, 우리 민족문화나 정서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말로 뭐라고 할 것이냐. ‘아리아리’라고 하자고 했습니다. 그 말은 없는 길을 찾아가자, 길이 없으면 길을 내자라는 뜻입니다. 내가 자꾸 그랬더니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축구 시합할 때, 어느 방송에서 하루는 씁디다 그러구는 아무데서도 안썼습니다.. 그리고 ‘비전’이라는 말은 ‘전망’ ‘희망’이라는 뜻입니다. 내 손자의 이름에도 붙였지만 우리말로 하면 ‘하제’지요. ‘메세지’도 ‘글쪽지’ 또는 ‘말쪽지’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까. 결정적으로 내가 양보 못하는 말은 ‘빠이 빠이(bye bye)’인데 아침 저녁으로 출퇴근할 때 엄마 아빠에게 쓰는 이 말은 정말 쓰지 말자는 겁니다. 전두환 군사 양아치 독재때입니다. 백기완이 잡으라고 해서 도망다닐 적 일인데 도저히 숨을 때가 없어요. 그래서 낚시꾼으로 변장을 해서 어느 시골 구석에 가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낌새가 이상해서 아주머니한테 방값을 치르고 그곳에서 나오려는데 자기 아들을 안고서 나한테 “할아버지 빠이 빠이”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잘 있어라” 하고 오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무리 쭐이타도(급해도) 그 말은 꼭 고쳐줘야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다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말하자면 잡혀가도 좋다, 라는 생각으로 그 아주머니를 찾아가 물었지요. “아주머니 아까 날 보고 뭐라고 했소?” ‘빠이 빠이’ 라고 한 것 같은데…, “그게 어느 나라 말이오?” 했더니 우리나라 말이라는 겁니다. 우리나라 말엔 그런 말이 없고 영어일 거라고 했지요. 그리고 그 말 대신에 ‘잘잘’이라는 말을 쓰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잘 가세요, 그래 잘 있거라. 그 말을 줄여서 ‘잘잘’이라고 하자는 것이었지요. 그러고 나서야 ‘잘잘’이라고 인사를 나누고, 그 집을 떠나올 때 갑자기 하늘이 새까맣게되더니 늦가을 비가 시름시름, 나는 아!하고 한숨을 지었던 기억이 납니다.
홍일선 : 광주항쟁이 끝나고 나서 얼마 후인 지난 1982년이던가요? 선생님은 첫시집『젊은날』을 펴내셨습니다. 흰색 표지의 소박한 장정이었지만 이 시집을 읽고 민족문학의 나아갈 길이라든가, 절실성이 담긴 선생님만의 가락과 힘을 느꼈습니다. 이후로 채광석 시인의 기획의 풀빛 판화시선으로 1986년에『이제 때는 왔다』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고, 이후『백두산 천지』라든가『아! 나에게도』라는 시집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특히 앞서도 잠시 언급한 선생님의 수상록『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 치마 휘날리며- 딸에게 주는 편지』는 당시 문학을 꿈꾸는 젊은 층에게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던져주기도 했고, 1980년 서울의 봄 시절에는 한동안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언제부터 시작(詩作)을 하였으며, 문학에 관심을 가지신 특별한 계기라도 있습니까?
백기완 : 나는 원래 소설이나 시를 좋아하지요. 그 가운데서도 신동엽 시인의 시를 좋아했습니다. 1959년도에 발표된「진달래 산천」이라는 시였어요. 난 그때 농민운동을 할 적이었는데 그 시를 보고 놀랐습니다. 나는 농촌에 가서 농민들과 삶이나 같이 하려고 하는 초라니였습니다. 그런데 신동엽은 진짜 농민의 흐름을 알고서 시를 썼더군요. 어디서 그것이 증거가 되었느냐면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라는 대목입니다. 그래서 그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싶어서 만나봤더니 촌사람처럼 생기고 자그마합디다. 내가 소리를 좀 지르면 겁이 나서 눈을 꿈벅꿈벅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신동엽이는 이응집 지붕위에 박꽃같은 사나이었습니다. 내가?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죽창을 들고 산으로 갔다?는 구절이 너무나 좋았다고 했더니 대뜸 낙지볶음을 사더라구요. 실컷 먹었지요. 그 다음에 좋아하는 시는 신경림의 「목계장터」인데 그 시에도 내가 좋아하는 구절―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라는 대목이 있어요. 늦은 가을이나 이른봄에 웅덩이에 가보면 민물새우들이 추워서 한곳에 모여 있어요. 그것을 채로 몇 번만 떠내면 대접으로 하나 가득 차는데 그걸로 무우와 고추장, 고춧가루를 넣고 끓이면 국물도 빨갛고 민물새우도 빨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먹거리는 빛깔이라고 해오지요. 그러나 알로는(실은) 색깔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 먹거리는 그 냄새가 온동네를 들었다 놓지요. 그러면 어른들이 그거 한 숟갈 얻어먹으려고 그 집으로 마실을 갑니다. 어흠 어흠, 헛기침을 하며…. 신경림은 바로 그 헛기침에 취하는 단침 같은 사나이, 바로 그거죠. 어떻게 그런 구절을 떠올려냈을까. 그리고 「가난한 사랑노래」라는 시집엔가에 실린「월악산의 살구꽃」이란 시가 있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아들과 살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빨갱이로 몰려 매맞아 죽자 너무나도 억울하고 화가 나서 월악산을 울고 다녔어요. 그러던 어느 눈이 허옇게 내리던 날 죽었는데 그걸 본 동네 젊은이들이 그 늙은 아주머니를 묻어줬어요. 그런데 이듬해 봄이 오니까 들에서 핀 살구꽃이 바람에 휘날려서 그 무덤을 하얗게 덮어주더라는 짧은 시였습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빨갱이로 몰려 맞아죽은 아들을 내놓으라고 울부짖다 죽은 그 원통한 아낙네한테 꽃닢을 덮어준 실례가 우리 역사에 있었던가, 없었습니다. 신경림이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신경림이 앞에 꿇어 앉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서정주시인의 몇몇 시편에도 농촌에 사는 서민들의 정서가 서려 있잖습니까. 그런데 나는 서정주의 시엔 서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정서가 시어로 재창조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지용의「향수」를 보면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울음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오’ 라는 구절이 있는데 나는 그 시를 좋아하면서도, 늘 비판합니다. 당시 얼룩배기 황소는 온 한반도에서 열 마리도 안됐어요. 그렇다면 얼룩배기란 무엇일까요. 서구문물에 대한 환상적 경험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정지용의 시란 정지용이 동경 유학생때 얻은 어설픈 지식인의 정서를 갖고 우리나라 농촌의 바닥을 훑었구나, 라고 생각했지요. 그런 나를 두고 주변의 문학하는 사람들은 무식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육사의「청포도」라는 시가 있는데 ‘청포도 무르익는 내 고향 칠월은…’ 라고 했지요? 이 시도 어설픔니다. 당시 청포도라는 것은 일개 군 단위에서 한 그루가 있을까 말까 합니다. 그런데 왜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가 익는다는 말을 썼냐는 겁니다. 머루 다래가 무르익는 곳 그래야지 그것도 동경 유학생 비슷한 환상적인 서구 문화의식이 잠재적으로 남아 있다가 우리 정서를 잘못 빚은 예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변에선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말했지요. 하지만 나는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꼭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시인들이 토속적인 삶의 현실을 담은 시어를 잘 쓰지 못했다는 얘기를 하다보니 나온 얘깁니다. 하지만 신경림이 그런 삶의 시어 그냥 있는 말을 살아있는 시어로 다듬어 썼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또 잘된 시는 형상화가 잘됐어요. 잘 빚어졌다 이말이지요. 김지하 시인의「1974년 1월」이라는 시를 보면 형상화가 진짜 잘되어 있습디다. ‘일천구백칠십사년 일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라고 하다가 맨마지막에 ‘일천구백칠십사년 일월의 죽음을 두고 우리 그것을 배신이라고 부르자, 온몸을 흔들어, 온몸을 흔들어, 거절하자, 네 손과 내 손에, 마지막 남은 뜨거운 땀방울의, 기억이 식을 때까지’ 라는 시의 매듭이야말로 음악성과 회화성이 다함께 아우려져 있잖습니까. “1974년 1월”이라는 시야말로 그 혁명적 정서가 완벽한 경지지요. 난 그런 시를 좋아했습니다. 그 시를 내 정서처럼 되뇌이곤 했다니깐요. 그런데 내가 무슨 시를 썼느냐 이겁니다. 부끄럽지만 세 가지 고비가 있어요. 나는 어떻게 시를 쓰게 되었느냐 하면 고문을 받던 중에 나더러 혓바닥을 내밀라고 했습니다. 왜 혓바닥을 내미냐고 하니까 무조건 내밀라고 해서 내밀었더니 거의 끊어지리만치 혓바닥을 꽉 잡고선 자기 말을 듣겠냐, 아니듣겠다면 혓바닥을 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석이 그렇다면 내 혓바닥으로 바닥을 청소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더 이상 안 때리겠다는 겁니다. 아니 여보시오, 사람이 이 더러운 세면바닥, 내 피와 오줌똥, 내 땀과 눈물로 사방이 온통 핏자국인데 그 더러운 바닥을 어떻게 혓바닥으로 청소를 하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이따만한 몽둥이로 절구찧듯 내 발등을 찍었습니다. 꽝! 한번 찍히던 것은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이 안 납니다. 옛날 감옥 문과 창틀은 살구나무로 만들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그 살구나무는 홍길동 임꺽정이가 내려쳐도 결이 안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살구나무가 그렇게 강해 보여도 썩으면 시퍼러둥둥한 게 영 볼품이 없어요. 내 발잔등이 마치 살구나무 썩은 것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좁고 시커먼 바닥에는 내 피눈물이 고여 있고 내 몸에선 야릇한 갯비린내가 나는 걸 느꼈습니다. 살점이 떨어진 자리에 다시 살을 붙여서 그 살이 썩고 있는 냄새였지요. 이가 막 갈릴만치 춥고 떨리고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문현장에는 아무도 없었어요. 의사가 왔으면 좋겠는데 의사도 안 오고 마음씨 착하다는 예수가 왔으면 좋겠는데 예수도 안 오고 또 자비롭다는 부처가 왔으면 좋겠는데 부처도 안 오고, 아무도 안 왔어요. 수천년 전에 죽은 사람들이니 어찌 오겠어요. 이리하여 난 이제 죽었구나 하고 있는데 어디서 웽웽 소리가 났습니다. 무슨 소리일까. 내 환청이었을까. 아닙니다. 그 추운 겨울 지하실에 어쩌자고 파리새끼 한 마리가 들어와서 웽웽거리고 있는 겁니다. 나는 얼핏 울부짖었습니다. 옳거니, 생명이란 너밖엔 없구나. 그래서 내가 파리한테 수작을 거는 시를 썼습니다. 바닥에 있는 내 피를 더듬어 벽에다가 시를 썼지요. 내가 원래 벽시 운동하던 사람 아닙니까. “파리새끼야, 넌 내가 지금 달달달 떨고있는 것처럼 보이지? 무섭거나 추워서 떠는 것처럼 보이지? 아니야, 이렇게 떨리는 건 내 복수의 주먹이 떨리고 있다는 걸 네가 혹시 나가거든 꼭 전해달라”고 벽에 썼습니다. 그게 내 맨처음의 옥중시입니다. 그렇다면 나에게 시는 무엇인가. 시를 쓰는 사람 백이면 백, 거의 다 걸레를 짜듯이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내 경우 시는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었어요. 나는 막 솟아올랐습니다. 노여움이 솟아오르고 맑은 물이 솟아오르고 피눈물이 솟아오르는 게 시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쓴 벽시는 지금 악덕한 군사양아치들이 증거인멸을 하려고 그 고문현장을 허물어 모조리 없어졌지만 감옥 안에서 마지막 죽어갈 때 쓴「젊은날」이란 시가 있어요. 그땐 꼭 옥사할 것만 같더라고. 그러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도 한때 젊은 날이 있더라 이말입니다. 나도 한때 사랑도 해봤고 나도 한때 외상을 떼어먹고 도망도 쳐봤고 또 농민운동을 하면서 가난한 민중에게 일생을 바쳐야겠다고 다짐도 해본 적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여기서 옥사를 할 수가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기가 났어요. 그렇게 해서 쓰여진 시집이『젊은날』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시집이 나왔는가 하면 내가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전채린 교수가 돈 50만원을 들고 나를 찾아왔어요. 환경운동가 최열씨와 지금 국회의원을 하는 이호웅씨가 번갈아가며 내게 밥을 해줄 때였습니다. 그때 전채린 교수가 옥중에서 쓴 내 시를, 걸리지 않을 만한 것들로 골라서 좀 달라고 하는 겁니다. 내 병원비 좀 보태려고 그것들을 시집으로 꾸며 상품이 아니라 비매품으로 내려고 하니 구석구석 좀 고쳐달라고 하여, 걸릴 만한 것은 빼고 고쳐서 나온 시집이 바로『젊은날』입니다. 비매품이었는데 시집 나온 지 일주일도 못되어 돈을 가져왔는데 그때 돈 몇백 만원이니까 요샛돈으로 따지면 천 만원쯤은 되겠지요. 그래서 병원비를 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 최열씨가 어떤 일을 했느냐 하면 내가 그 시집을 내는 과정에서 뺀 시 중에서「백두산 천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걸 최열씨에게 줬더니 어느 잔칫집에 가서 축하 인사말 대신에 그 시를 낭송을 하기도 하고, 자기 친구들과 술 마시다가 노래를 하라고 하면 또 그 시를 읊곤 했더랍니다. 그 시가 어떻게 나왔냐면 감옥에서 춥고 떨려서가 아니라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을 때 입으로 천정에 새겨두었던 시입니다.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내 몸무게가 80킬로쯤이었는데 40킬로로 줄어 들었을 때입니다.
홍일선 : 1980년대 민중문학의 성과와 관련하여 노동자, 농민 등 창작 주체의 문제와 그때껏 금기시되었던 이념의 확대, 그리고 진솔한 민중언어의 발견을 통한 민중시의 성과도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성급한 낙관주의에서 오는 상투성, 이념의 과잉문제 등이 민중시의 퇴조를 불러오게 한 요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백기완 : 닭의 본디 이름을 ‘질라라비’라고 하질 않습니까. 나는 그 ‘질라라비'라는 말을 널리 알리고 깨우치도록 하느라 애쓴 시간이 40년이 넘습니다. 그건 진짜 중요한 것입니다. 이를테면 그것은 민중의식의 기본적인 정서라고 봐야 합니다. 할머니들이 우리가 어렸을 때 “질라라비 훨훨, 질라라비 훨훨”하면서 흥얼거리는 것은, 말하자면 민요인데 사실 민요라는 말보다 흥얼거림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지요. 네가 비록 머슴의 자식이지만 질라라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란 뜻입니다. 날이 밝았다고 훼를 치는데 닭은 꼬끼오 그럽니다. 그러나 질라라비는 꺼끼오입니다. 그것은 늦잠자는 주인을 깨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깨우고 아니 잠겨 있는 햇덩이를 끄집어내자는 소리입니다.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중의 한 예입니다. 민중문학이 없어졌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민중문학을 하는 사람이 없어진 것이고 민중적인 정서와 의식을 저버렸기 때문에 민중문학이 없어져 가는 겁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민중 스스로가 소스라쳐 깨우쳐야 합니다. 진정한 민중문학이란 민중 스스로가 해야 참 예술로 이룩되는 것입니다. 소련이 망했을 적입니다. 어떤이가 이제 사회주의적 인간상 구현은 파탄났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적 인간상 구현은 성공해 가고있단 말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다. 또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을 적입니다. 어느 누구가 이제부터는 머리에 붉은 띠를 두루고 하는 시위따위는 없어져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놀랐습니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것으로 부패착취구조가 청산됐단 말인가. 어림도없는 소리입니다. 또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이제부터 모든 민주화 운동은 햇볕정책으로 수렴되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놀랐습니다. 우리들의 통일이 곧 햇볕정책에 의한 한쪽의 통일인가. 아니다. 그것은 개수작이다. 진짜 통일은 분단을 틀어쥔 미제와 그 앞잡이들을 청산, 해방을 이루는 것이라고 했다. 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이제 우리는 승리했다. 모든 문필은 노정권의 정치적 승리의 완결에 봉사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는 아니다고 외쳤습니다. 민중의 역사는 민중이 일구는 것이다. 따라서 민중해방이 곧 정치적 자유의 완결이지 한 보수 정치인의 권력장악이 아니다. 그것은 억압착취구조의 강화를 향한 억압의 고도화일뿐이다. 그렇다면 그 논리는 무엇인가. 반역적 지식이 민중을 파괴하는 것이요, 아울러 우리 민중이 스스로를 저버리는 배신이다고 땅을 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문학인들 다시 긴장을 해야합니다. 민중들도 정신차리고….
홍일선 : 신동엽 시인의 초기 시「진달래 산천」에 대해 앞서 얘기하셨는데 그분의 문학은 어두웠던 시대에 봉홧불처럼 타올랐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분에 관한 얘기를 좀 더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백기완 : 나는 신동엽 시인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시를 만드는 소재 자체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역사에서 왜곡되어진 문화, 예술에 그는 끊임없이 저항했어요. 그런 부분이 상당히 탁월해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시인이 일찍 떠난 건 안타까웠습니다.
홍일선 : 우리 민족문학사의 연대기에는 위로는 신채호, 한용운으로부터 1960년대 김수영,신동엽 문학에 이르러서 대종을 이룹니다. 그런데 김수영 시를 읽다보면 시인이 얘기하고자 하는 의미망들이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서였을 테지만 많은 시편들이 민중의 척박한 현실을 초월한 듯한 난해한 시들이 많았습니다. 당시 신동엽 시인과 김수영 시인의 시를 어떻게 읽으셨습니까?
백기완 : 나는 신동엽과 김수영을 비교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굳이 대답하자면 신동엽을 좋아했지요. 김수영의「풀」이란 시를 보면 시적으로는 형상화가 잘된 작품이고 따라서 김수영은 큰 시인인데, 한편 신동엽은 제국주의에 항쟁하는 역사의식에 두 발을 딱 딛고 서서 거기서 치솟아 오르는 정서를 시적으로 형상화했다고 봅니다. 신동엽의 시는 똑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제국주의에 침탈당하는 민중의 피눈물 나는 저항의 역사를 딛고서 치솟는 정서를 형상화했기 때문에 김수영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고, 또 어찌보면 근본적인 차이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둘 다 좋아하지만 내게 영향을 준 것은 신동엽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홍일선 : 남쪽으로 내려와서 선생님께서는 10대 소년시절 지독한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다닐 수 없어 독학으로 문학공부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시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의 달구질을 통하여 나오는 신명이 한판 굿으로 전이되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선생님은 그걸 비나리라고 했었지요. 평론가 채광석씨는 ‘비나리는 해방과 통일의 큰 울림으로서 최고의 민중시 형식’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비나리는 선생님 고향 황해도 지방의 민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백기완 : 넋두리가 될 텐데… 어렸을 적 나는 서울의 뒷골목 꼬마들과 어울리고 싶었는데 그 뒷골목 꼬마들이 날 끼워주질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게 참 서운했지요. 뒷골목 꼬마들은 학교를 다니는데 나만 뜨내기로 사니까 우선 하는 일이 달라서 끼워주지 않았고 또 놀 적에도 걔들은 주워듣고 배우고 읽고 그런 얘깃거리를 일삼는데 난 배가 고프니 먹는 것만 생각했지요. 그런 상황 속에서 이따금 모여 시를 읊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럴적마다 다들 유명한 사람들의 시를 읊었지만 난 배운 것이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시골에서 내가 보고 들은 것을 털어놓는 수밖에…. 무슨 수작이냐. 우리 고향에 가면 연자방앗간에서 방아를 돌리는 할머니가 늘 흥얼거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연자방아가 돌아갈 때는 ‘왱-왱- 찌꿍’하는 소리가 나거든요. 나무와 나무의 결이 부딪치는 소리이자 틈새가 부딪치는 소리이지요. 거기에다 할머니가 장단을 붙이고 노랫말을 넣어서 흥얼거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하로 따를 갈고 따로 하를 갈고 왱-왱 찌꿍찌꿍, 하늘로 땅을 갈고 땅으로 하늘을 갈고 왱-왱- 찌꿍찌꿍’ 하는 겁니다. 당시 나는 어렸지만 어떤 문학적 감수성이 있었는지 하늘과 땅이 맷돌이 되어 이 세상을 벅벅 간다는 할머니의 말이 그렇게도 좋았습니다. 소리도 좋았고 장단이 점점 빨라지는 것도 좋았어요. 그래서 내가 그 할머니께 ‘왱-왱 찌꿍찌꿍’이라는 덧이름을 붙이기도 했는데 그걸 기억하고, 서울애들 앞에서 낭송을 했더니 다들 재수 없다면서 내 머리를 쥐어박는 겁니다. 그게 무슨 시냐는 거지요. 그렇게 군밤을 맞으면서도 나는 너희들이 읊고 있는 유명한 시보다 훨씬 내 기억이 뿌듯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우리 시가 흥얼거림이라고 생각합니다. 흥얼거림의 형식에는 이야기 흥얼거림이 있습니다. 이야기를 끊임없이 꾸며가는 것을 일컫는데 그걸 우리말로 이야기 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그 이야기 시는 곧 ‘비나리’이지요. ‘비나리’는 하늘에 대고 있지도 않는 신, 이를테면 관념적인 실재한테 비는 게 아닙니다. 자기를 달구는 것입니다. 을러대는 거지요. 이게 ‘비나리’의 두 개의 뼈대입니다. 다시 말해 이야기 흥얼거림에는 ‘비나리’가 있고 ‘비나리’의 두 뼈대는 ‘을러대기’와 ‘달구질’입니다. ‘달구질’은 자기의 뜻과 의지를 끊임없이 다지는 것이며 자기 힘을 뽑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견주어 ‘을러대기’는 뭔가. 보기를 들어 홍시인이 좀 흐릿하고 어정쩡하게 반동적으로 나갔다 하면 옆에 사람이 “홍시인, 왕년에 농민이라는 무지렁이들의 정서를 오늘에 발전시키던 그 창조적인 예술 충동은 다 어디로 갔냐”고 부추겨 올려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을 ‘을러대기’라고 합니다. 시는 이 두가지 뼈대가 있어야한다는 것이 바로 내 생각입니다. 「젊은날」은 나를 달구질하고 이 세상을 을러댄 시였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적 형식이란 반드시 ‘달구질’과 ‘을러대기’만으로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읊조리기’도 있습니다. ‘십여 년간 머슴살이 하도 서러워 진달래꽃 안고서 눈물납니다’ 이 시를 보면 ‘달구질’도 없고 ‘을러대기’도 없습니다. 하지만 ‘읊조리기’는 있지 않습니까. 진달래는 뭐냐. 사랑의 불길이고 분노의 불길입니다. 그걸 안고 운다는 것은 ‘읊조리기’입니다. 홍시인의 시를 보면 ‘달구질’도 있고 ‘을러대기’도 있지만 어쨌던 그건 시의 한 ‘틀거리’이지 시의 모든 원형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시도 시이고 서양시도 시인데 우리의 ‘비나리’ 라는 것은 우리 무지렁이들의 시적 정서였다는 말을 하다보니 여기까지 얘기하게 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인가 내가 민요연구회 고문을 지낸 적이 있는데 창립대회에 가서도 그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유인열이 초대 사무국장을 지낼 때인데 나를 고문으로 해줘서 처음으로 사회적인 명예라는 게 생겼던 때이기도 했지요. 이렇게 해서 누가 알아주든 말던 나와 민중문학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랐고 내 역사적 성장과정과도 맞물려왔다고 봅니다.
홍일선 : 선생님 문학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듣기로는 일제 강점시기에 소설가 전영택이 1925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화수분」의 순응주의적 세계관이 잘못 그려져 있다고 생각하여 전영택 선생을 찾아가 개작 요구를 청했다가 큰 곤욕을 치른 바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또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부활」의 중심 주제가 그릇되게 형상화되었다고 생각하여 저자인 톨스토이에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전해주려고,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경찰서로 끌려가 공산주의자로 몰렸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만….
백기완 : 나는 어렸을 적부터 성격적으로 상대가 마음에 안 들면 마주앉아 얘기를 하다가도 그대로 비정서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어렸을 적 내 주변에서는 여학생이고 남학생이고 이기영의 소설 「고향」을 안 읽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홍명희의 「임꺽정」 김래성의 「청춘극장」 등을 많이 읽었고 그 다음으로 많이 읽는 것이 세계문학 전집인데 그 가운데 「레미제라블」이란 소설도 거의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집도 없고 방도 없고 책도 없는데 뭘 읽었겠습니까? 이따금 친구집으로 놀러가면 책상에 꽂혀 있던 몇 권의 책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또 그 책을 베개로 내주는 것도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 때문에 어쩌다가 그런 책이 손에 들어오면 난 단숨에 읽어버렸어요. 그 집에서 나오면 읽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때 전영택의 「화수분」이란 단편을 읽게 되었는데 영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화수분」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정서가 농촌 사람들의 정서와 맞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새벽별 지고 나가서 저녁달 지고 들어오는 게 우리 농민의 기개요, 배짱인데 어떻게 얼어죽느냐는 거지요. 길이 없으면 길을 내고 추우면 삭정이라도 갖다 불을 붙이기라도 해야지 아무것도 시도해보지도 않고 얼어죽는다는 건 작가가 일제가 죽인 농민을 다시 죽인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주먹이 떨리더라구요. 그래서 찾아가서 소설을 다시 쓰라고 했더니 그렇게 읽고 느꼈으면 그만이지 어딜 찾아와서 감히 다시 쓰라고하냐며 따귀를 때렸지만 내가 맞겠어요. 피했지요. 그랬더니 내 주변에선 왜 그러고 다니냐고 다들 빈정거렸습니다. 그 다음으로 읽은 것이 톨스토이의 「부활」인데, 정말 대단한 대문호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성경을 들고 뉘우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서 편지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그만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렸어요. 길거리에 서서 톨스토이도 모르는 경찰관과 시비가 붙었지요. 공산주의 나라 소련에 편지를 쓰다니 불온하다고 엄청 몰아치는 겁니다. 어쨌던 그런 논쟁아닌 엉터리 논쟁을 아니할 수가 없었는데 그런 일들로 하여 내 문학적 소양은 점점 더 깊어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문학수업을 따로 받은 것이 아니라 그런 문학작품을 읽은 뒤의 반응을 통해서 인간적으로 성장을 했다고나 할까요.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나를 진짜 키운 것은?배문학?이라는 사람의 얘깁니다.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이 들락거리는 고장에서 살면서 희한한 일도 겪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빨갱이로 몰린 어느 젊은이를 잡아다가 구덩이를 파라고 하고선 머리만 남겨놓고 파묻더랍니다. 그리고 빨갱이로 몰린 다른 사람들도 잡혀왔는데 자기가 빨갱이가 아니라면 저 얼굴을 차서 증거를 보이라고 했답니다. 이에 배문학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 어느 할머니가 풀을 뜯어다가 그 얼굴을 덮어주더란 겁니다. 원통하게 땅에 묻힌 젊은이의 얼굴을 자기는 발로 차고 살아났는데 그 초라한 할머니 한 분이 풀을 덮어주는 것을 확인하는 때참(순간), 자신은 인간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답니다. 자신이 인간을 배신했으니 ‘배인간’이다. 아니다, 나는 소설 지망생이다. 그런데 소설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의 얘기를 다루는 것이 아닌가. 그렇고 보면 자기는 문학을 배신한 것과 다름없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을 ‘배’로 붙이고 이름을 ‘문학’이라고 고치고 살았다는이야기였습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듣자마자 찡! 그 어느 작품보다 그 사람의 삶 자체가 위대한 문학작품 같았습니다. 다시말해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내 문학적 수업은 보다 높은 차원으로 발전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홍일선 :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극한적인 전선에서 만난 배문학 선생이야말로 백선생님에게 장차 지향해야 할 민중문학의 틀을 구축시킨 계기였다고 볼 수 있겠군요.
백기완 : 그렇지요. 전쟁문학이 많지만 한국적 전쟁상황의 땅불쑥하기(특징)를 집약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본디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인데도 그것이 마치 민족 내부의 이념적 싸움으로 깊어졌기 때문에 전쟁에 나서는 사람들의 전투적인 살의가 상당히 자학적이고 자기착란적인 상황을 만들었었지요. 그 속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자신이 인간임을 깨우치는 길인데 배문학은 참말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우친 것이지요. 자신이 비인간적임을 깨우쳤다는 건 인간적인 측면을 본질적으로 깨우친 것과 같아서 배문학의 삶이 곧 훌륭한 문학작품이 아닌가 그렇게 느꼈던 것입니다.
홍일선 : 지난 1970년대부터 민족문화운동을 펼치는 선생님이시고, 또한 1980년대에는 벽시운동을 주창하여, 민중시 민중시인들에게 선생님은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문학을 보면 민족(민중)의 서사담론에서 개인의 사소한 내면으로 침잠, 몰입해 가고 있으며 한편으론 시가 특권화되어 소통이 불가능하다라는 얘기도 나옵니다. 그리고 그 많던 민중시, 노동시, 농민시는 그 흔적이 사라져 묘연하기도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당시 박노해, 백무산 시인 등 민중시인의 맹아가 그 무렵 싹트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최근 우리시를 읽어보셨다면 아시겠지만 요즘의 시를 읽으신 소감이랄까, 특히 19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