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목소리가 있다. 꽃다운 어린 시절, 나물을 캐다가 일본군에 끌려가 차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이들의 낮은 목소리가 있다. 고통에 찬 그들의 절규는 어느 까만 밤을 가득 채웠을 것이다. 하지만 먼곳에 있는 가족들이 듣기에는 턱없이 낮은 소리였고, 자신들의 피해가 수치로 변해버린 공간에서 그들은 침묵해야 했다.
해방 50여 년이 지난 1991년, 김학순 할머니는 한국에서 최초로 종군위안부에 대해 증언했고, 이듬해인 1992년 1월 8일, 위안부 할머니들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를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를 카메라에 담는 있는 이가 있었다. 변영주 감독이 그 주인공이었다. 변영주 감독은 1993년 12월 23일, 100차 수요시위에서 첫 촬영을 시작으로 1999년 6월 16일 365차 수요시위를 거쳐 6월 26일 강묘란 할머니 장례식 촬영까지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현장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지냈다.
변영주 감독은 할머니들과 동거동락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냈다. 때로는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큰 외침을, 때로는 설움에 찬 낮는 한숨을, 때로는 천진난만하게 웃음짓는 할머니들의 표정이 만들어 내는 소리까지. <낮은 목소리> 3부작(<낮은목소리>, <낮은 목소리2>, <숨결>)은 이렇게 태어났다.
<낮은 목소리>(1995)가 만들어진지 12년 만에 <낮은 목소리> 3부작 DVD가 출시됐다. 혹자는 “<낮은 목소리>가 너무 늦게 나온 것이 아니냐”고 지적한다. 하지만 수천만원의 빛을 영광의 상처로 간직해야 했던 제작사 보임이 DVD를 제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번 출시된 <낮은 목소리> 3부작 DVD는 ‘영화진흥위원회 2006년 독립영화 DVD제작․배급 지원사업 지원작’으로 선정돼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제작한 것이다.
|
변영주 감독은 할머니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카메라에 담았 다. 할머니들과 함께한 시간이 많을 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커졌다. ⓒ한독협 |
<낮은 목소리> 3부작 DVD는 1990년대의 ‘성과’라고 평가받는 다큐멘터리일뿐 아니라 종군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작품이다. 조금 늦게 도착하기는 했지만 <낮은 목소리> 3부작 DVD는 시계를 거꾸로 돌려 놓은 듯 1990년대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재현해 낸다.
<낮은 목소리>는 수요모임과 나눔의 집(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곳)을 배경으로 할머니들의 일상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할머니들은 처음에는 거리를 두었으나 이내 카메라 속으로 들어와 그들이 겪은 일들을 하나둘 풀어 놓는다. 또 해방 후에도 돌아 오지 못한 중국 무한의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고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부가 할머니들을 소개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면, <낮은 목소리2>는 한 할머니의 죽음과 그들의 희망을 그렸다. 강덕경 할머니는 폐암말기 진단을 받고 힘겨운 투병생활을 한다. 하지만 카메라는 단지 강덕경 할머니의 죽음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할머니들의 생기넘치는 모습을 주목하면서 삶과 죽음의 공존을 말한다. 텃밭을 일구며 활기찬 삶의 기쁨을 누리는 할머니들은 강덕경 할머니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 슬픔에 빠지기도 하지만 곧 삶과 희망을 얘기한다.
<숨결>에서는 기존 인터뷰 방식(감독-할머니들)을 새로운 방식(할머니-할머니들)으로 변경해 그들 스스로가 말하고 만들어가는 작품을 완성했다. 또 한국 뿐 아니라 한국에 의해 피해를 당한 베트남 할머니를 만나면서, 영화는 고통의 범주를 확장시키고, 화해의 범위를 넓혀갔다.
가족조차 쉽게 믿지 못할만큼 충격적인 경험을 하고, 일상적인 고통을 안고 살아야하는 할머니들. 하지만 이는 <낮은 목소리> 3부작이 보여주는 그들 모습의 절반에 불과하다. 변영주 감독은 할머니들이 일상에서 벌이는 유쾌한 모습으로 작품의 나머지 반을 채움으로써 단순한 고발 다큐멘터리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이번에 출시된 <낮은 목소리> 3부작 DVD는 풍성한 서플먼트를 담고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매 작품에 대해 말하는 변영주 감독의 인터뷰이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이야기를 하는 인터뷰 방식은 변영주 감독과 관객이 대담을 하는 느낌을 준다. 변영주 감독은 다양한 제작 에피소드를 전하고 있는데, 그 중 <낮은 목소리>를 처음 제작하게 된 계기는 특히 인상적이었다.
|
영화는 할머니들의 슬픔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웃음과 삶에 대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더욱 큰 울림 을 만들었다. ⓒ한독협 |
1993년 국제 매매춘에 대한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찍던 변영주 감독은 한 여성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의 어머니가 종군 위안부였고, 거기서 병을 얻은 어머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매매춘을 시작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그 얘기에 충격을 받은 변영주 감독은 <낮은 목소리> 제작을 생각했다고 한다.
또 <낮은 목소리2>를 제작하게 된 계기는 강덕경 할머니였다고 한다. 폐암 말기의 강덕경 할머니는 자신의 죽어가는 모습을 찍어 많은 이들이 오랫 동안 볼 수 있기를 원해, 먼저 제작진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강덕경 할머니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에서 먼저 세상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과 남은자들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며 세상을 떠났다.
<낮은 목소리> 3부작 DVD에서는 이밖에도 김소영 영화평론가와 변영주 감독의 대담 ‘역사적 트라우마, 그 치유의 과정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작업에 관하여’와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과 변영주 감독의 대담 ‘<낮은 목소리>가 독립영화에 미친 영향에 관하여’ 등을 만날 수 있다. 또 <낮은 목소리> 3부작 DVD 박스 세트에는 제작노트와 교사 수업 활용 교제가 수록된 책자가 포함돼 있다.
“그저 배가 불룩해 아이 하나 낳아 보는 것”이 소원인 할머니들은 이렇게 말한다. “끝을 보기 전에 죽으면 안돼”라고. 강덕경 할머니가 죽을 때 박두리 할머니가 “눈 감지 마라, 눈 감지 마라”고 외치는 장면(<낮은 숨소리2>)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관련정보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