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사람

정의로운 사회를 운전하고픈 - 허세욱 회원

참된 2008. 1. 17. 09:03

▲ 대학로 한미 FTA 반대 집회에 참석한 허세욱 회원

 

▲ 대학로 한미 FTA 반대 집회에 참석한 허세욱 회원

 

 

 

 

 

참여마당_인터뷰

정의로운 사회를 운전하고픈 - 허세욱 회원
이경휴 참여연대 회원 2007-02-01

 

 

위 사진과 아랫글은 참여연대가 펴내는 월간지인 참여사회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참여연대 사무실을 수줍게 들어서는 중년의 한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선하게 웃는 모습이 지방에서 막 올라온 민원인이라는 짐작이 순간 들었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 빗나가고 말았다. 여러 간사들이 반갑게 그를 맞으며 근황을 물었다. 그제야 시위·집회 현장의 파수꾼- 허세욱(54세) 회원임을 알았다. ‘민주노총-민택연맹 서울지역본부 한독분회 대의원’이라는 명함에 새겨진 직함과는 달리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이 쉽게 말문을 트게 했다.

“택시 운전을 한 지 올해로 16년이 되지요. 애초부터 노동운동을 한다고 뛰어든 것도 아닌데 세월은 이렇게 흘러 가버렸네요. 뭐 하나 이루어진 것도 없고, 여전히 택시노동자들은 1평 남짓한 공간에서 12시간 이상 뼈 빠지게 일하지만 수입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지요. 왜 우리들이 거리로 뛰어나와야만 하는지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참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어요.”
늦은 점심상 앞에 앉은 그의 얼굴에선 곤고한 삶의 자락이 엿보였다. 교대 시간을 맞추다 보면 끼니를 때맞추어 먹기가 어렵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사골우거지국에 소금 간을 하는 그의 듬직한 손을 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발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발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두발을 편히 뻗을 곳이 없는 처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막연히 사회를 탓하기엔 무책임하다는 자괴감에 고개가 숙여졌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랄까.

“참 부끄러운 기억이 있어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요. 95년 봉천6동 철거촌에 살 때였죠. 그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살 때라 그날이 그날 같았죠. 빈민운동을 하던 강인남이라는 여자 간사가 있었는데 용역깡패들에게 얻어맞는 일이 벌어졌는데 나는 그냥 구경만 했었죠. 그 뒤 많은 걸 깨달았죠.”
국밥이 식어가도 개의치 않고 그 시절을 즐겁게 회상해갔다. 많이 배우고, 젊고 예쁜 선생님들이 어떻게 우리 편에 서서 우리의 입장을 세상에 알리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는지,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지금도 고마울 따름이라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용역깡패들이란 사람이 아니예요. 갈 곳이 없어 못 떠나는 혼자 사는 할머니집 지붕에 구멍을 2군데나 내고 담을 헐고, 장마철에 그랬으니 가재도구가 어떻겠어요? 이불이 다 물에 젖고, 할머니는 울고 있고,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았죠. 떠나지 못한 50여 세대가 똘똘 뭉쳐 새로운 가족이 되었죠. 그 중심에 선생님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죠. 빈 집에 간사들이 ‘철거민들이 갖추어야 할 행동’이라는 게시물을 보고 또 감동을 받았죠. ‘내부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내부에서 소란하지 않습니다.’ 등등 일상적인 내용이었는데도 그때는 그 가르침이 가슴을 파고들었죠.”
김영삼 정권 시절, 세계화 국제화를 떠들어대며 선진국 진입을 노래했지만 정작 그들에게 돌아간 것이라곤 280만원의 보상금과 500만원을 융자 받을 수 있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우성아파트는 그렇게 철거민들을 짓밟고 들어섰고, 그 땅에 엎드려 살았던 사람들은 풀씨처럼 흩어져버렸다. 다행히도 봉천동 일대의 철거민들이 합심하여 관악주민연대가 발족하여 간신히 빛을 밝히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문민정부 시절에는 택시가 호황이었어요. 비록 저임금이었지만 합승을 묵인해주었고 자가용이 오늘처럼 이렇게 거리로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어요. 전용차선제도 그때 생겼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부터 끊임없이 제도개선에 대한 논의가 있었죠. 즉 사업주를 위한 제도에서 손님을 위한 서비스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우리 많이 투쟁했지요. 2005년 전액관리제도가 국회를 통과했지만 사업주들의 반발로 무산되다시피 되었죠. 그래도 서울에서는 세 회사가 가감누진형 월급제를 실시하고 있어요. 쉽게 말해 전액을 입금하고 월급을 받는데 그 전액을 부가세로 신고를 해야 되요. 탈세를 막기 위해 그런다는데 어디 사업주들이 그런다고 탈세를 안 해요.”
몸으로 깨달은 현실에서 긴 한숨이 배어나왔다. 그럼 월급으로 얼마나 타느냐고 어렵게 여쭈었다. 헛헛한 웃음 끝에 “100에서 120만 원 정도이지요.” 순간 도시근로자의 최저생계비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계산되었다.

“떨어지는 감만 주워 먹으려 말고, 모양 좋은 떡만 골라 먹으려 말고, 사람들이 관심을 좀 가졌으면 해요. 몇 해 전, 도시가스나 발전노조 파업 때 반응이 어땠어요. 결국 민영화가 되어 소비자가 피해를 보게 되는데도 냉소하고, 언론의 왜곡된 보도만 보고 경기도 안 좋은데, 강경노조 때문에 기업이 힘을 못 쓴다니…. 감상에만 젖고 정작 그 속내는 알려고 하지 않죠. 언론의 보도를 사실인 양 믿는 게 가장 문제이죠.”
언론의 왜곡된 보도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건만 그의 절절한 항변에는 정의가 꿈틀대고 희망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열심히 집회에 참여 합니다.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죠. 거기에는 상·하도 없고 너와 나도 없습니다. 오직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힘만이 있을 뿐이죠. 일한만큼 대접받는 사회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죠.”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을까. 또한 그 꿈을 버리지 않는 이가 참여연대 회원이라는 사실이 행복했다.
식어버린 국밥을 서두르는 그의 손에서 정의로운 세상으로 향한 핸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