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문학

박근혜 없는 세상, 촛불은 먼 추억인가?

참된 2018. 1. 7. 14:56

박근혜 없는 세상, 촛불은 먼 추억인가?

[기고] 촛불혁명 1년, 양심과 정의의 심지에 불을 붙여라
2017.11.29 17:20:53     프레시안


촛불혁명? 무슨 말을 쓸 수 있을까. 종일 컴퓨터를 켜놓고도 한 자도 적지 못했다. <역사의 원전>이라는 책을 펴두고 먼 과거로 여행을 해봐도, 문득 눈에 띈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수탈된 대지>를 꺼내두고 몇 장을 다시 읽어봐도 도무지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수탈된 대지>는 '라틴 아메리카 5백년사'를 담은 책으로, 1971년에 초판이 발행된 후 라틴아메리카를 넘어 전세계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어 지금도 읽히고 있는 세계의 양심과 지성들의 필독서다.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에서부터 시작해 근자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라틴 아메리카 대륙 전체가 앓아야 했던 고통과 수탈의 원인, 거기에 맞선 처절한 중남미 인들의 저항과 혁명의 과정을 다룬 책이다.  

저자인 E. 갈레아노는 우루과이 태생으로 군부 독재가 시작되자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다가 아르헨티나 역시 독재자인 비델라가 군부쿠데타로 집권하자 스페인으로 다시 망명해서 1985년 우르과이에 민주정부가 수립된 후에야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시대의 망명객이었다. 그 중남미의 소모사나 피노체트, 비델라 등 군부독재자들과 아시아의 박정희는 얼마나 닮아 있는지. 얼마나 더 혁명과 반혁명이 반복되어야 하는지.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고통받고, 끌려가야 하는지. 우리는 지금 역사의 어디쯤 와 있는 것인지? 누가 그 ‘혁명’을 만들어 가는 것인지. 진짜 '혁명'은 무엇인지? 언제쯤 자본주의 시대는 끝나는 것인지? 학습하지 않는 '혁명'이 있을 수 있는지?  

여하튼, 

우리는 세계사에 전례 없는 무혈 촛불혁명을 이루었다. 
모든 노동자 민중과 시민이 함께 이루었다.
모든 지역과 직장과 가정에서 혁명이 진행되었다. 
독재자와 그 하수들과 한국사회 제1 재벌총수를 감옥으로 보냈다.
정권을 교체하기도 했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우리는 새로운 한국사회의 가치관에 합의하지 못했다. 
촛불혁명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 세우지 못했다.
우리 자신을, 일상을 변화시키진 못했다. 

이런 말만 머릿속에 가득, 답답하게 맴도는 하루.  
어디에서 말문을 찾아볼까, 
페북의 '어제의 오늘'을 눌러본다. 
 

ⓒ프레시안(최형락)


작년 11월 26일 전국 10개 도시에서 동시에 '하야하롹(ROCK)' 콘서트를 연다고 열심히 홍보하고 있는 나를 본다. '다음엔 전 세계로 넓혀 개최해 볼 계획도 있답니다'라고 글을 맺고 있다. 실제 그런 꿈을 꾸었다. 전 세계 음악인들과 연대하면 못할 일도 없다고 배포를 맞추던 이동연 교수와 내가 광장에서 만났던 가장 멋진 벗 중 한 사람이던 한국진이 떠오른다. '박근혜 퇴진 광화문 캠핑촌' 초기 사업이었다. 당시 내던 <광장신문>도 전 세계 해적판을 꿈꾸기도 했다. 5개 국어 정도로 번역된 PDF판을 한날한시에 전 세계 도시에서 동시 발행하는 신나는 일이었다. 광화문 뒷골목 기차집에 앉아 열심히 <광장신문>의 꿈을 키우던 박점규와 노순택과 <한겨레>의 안영춘 기자와 후지히 다케시 등도 떠오른다. 

퇴진운동이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한계에 머무르지 않게 넓히는 일, 한국에서 벌어지는 퇴진운동이 '신종 독재자와 그 수하 몇 명의 퇴진운동'에 머무르지 않게 다른 상상을 보태는 일이 긴요하다고 봤다. 반 발짝만 앞서 나가며 퇴진운동의 꿈을 키워보자는 결의들이었다. 더 넓고, 깊고, 강인하고, 풍요로운 '열린 광장의 힘'만이 여의도정치와 상층 시민사회 연대체의 오래된 한계를 넘어 '박근혜 퇴진'과 '박근혜 퇴진 이후 한국사회'를 이룰 수 있으리라 믿었다. 

박근혜 반대가 모든 특권과 독점의 반대, 제2의 박근혜를 길러내는 세계관과 구조와 체재와 세력들에 대한 설득과 용서와 응징과 반대까지로 나아가려면 다른 상상력의 유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987년 6월과 7, 8, 9노동자 대투쟁으로도 못다 이룬 미완의 항쟁을 완결하는 선까지는 같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얼굴과 당 이름만 바뀌는 혁명'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이 주인이 되는 혁명'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1100만 비정규직이 없는 사회, 핵 없는 생태사회 건설, 1% 재벌들의 금수저 독점 사회 폐기 평등사회 구축, 모든 악법의 근원인 국가보안법 폐지, 남북대결 종식과 확고한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여성, 소수자 등에 대한 모든 차별과 폭력의 문화와 제도 폐기, 이런 방향에 확고히 동의하는 모든 이의 주체적 참여에 의한 새로운 정부와 정치사회 구조 재편 등을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박근혜 퇴진'이라는 혁명은 이루었지만, 특권과 독점으로 점철된 '구시대 퇴진'은 이루어내지 못했다. '정권 교체'는 이루어 냈지만, '시대 교체'에는 이르지 못했다. 정권 교체 과정 역시 충분치 않다. 우리는 '촛불혁명 정부'를 원했지만 현실은 '도로 민주당 정부'이거나, '문재인 정부'다. 혁명을 이루어 낸 주체들은 어느 틈에 가끔 환호하거나 가끔 좌절하는 객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명박근혜를 길러 냈던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바른정당'으로 여전히 건재하며, 우리를 향해 자주 호통을 치고 있다. '평화'는 여전히 전쟁의 위협 앞에 쪼그라들어 있고, '평등'은 요원하다. 1970년의 전태일이 1100만 비정규직이 되어 오늘도 온갖 갑질에 신음하며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고 있다.  

이재용은 구속되었지만 삼성은 건재하다. 김앤장도 건재하다. 관료사회도 건재하다. 사드는 재빨리 배치되고, 수십 조 원의 전쟁무기 수입이 재빨리 결정된다. 제주에는 제2공항이라는 이름의 군사기지가 다시 들어선다. 입시경쟁 취업경쟁, 그 모든 생존을 향한 경쟁과 발악은 여전하고, '흙수저', 'N포세대'의 삶의 막막함 역시 여전하다. 학자금대출, 전세금대출, 주택자금대출을 갚아나가는 것만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은 '쫑'이 난다. 일상의 수많은 권력과 위계와 차별과 폭력의 문화 앞에서 마지막 불빛을 안간힘으로 지켜보려는 촛불의 심지조차 와해되어 버리고 만다. 우리가 무엇에 다시 져버린 것인지도 알 길이 없다. ‘촛불’은 먼 추억이 되어버리고, ‘혁명’은 설핏 지나가는 환영이었다.  

우리는 '박근혜 없는 세상'이 아니라, 이런 분노와 좌절과 절망이 없는 사회를 원했던 것 같은데 '희망'을 보는 횟수보다 '절망'을 다시 보게 되는 횟수가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박근혜 이후 한국사회'라는 실질적인 제2의 촛불혁명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죄없이 '착한 김정숙 여사'나 쳐다보고 있게 한다. 모든 부분에 산재한 '적폐 청산'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대리인들의 선의를 기대해보는 일이 되고 만다. 선후가 바뀌어도 많이 바뀌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희망'을 만들어 온 것일까.  
1700만 촛불은 언제 다시 화가 나는 걸까. 
우리 모두의 양심과 정의의 심지에는 언제 다시 불이 붙는 걸까.
인류와 역사의 진정한 발전을 위하여 우리는 어디에서 출발해야 할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작년 말 국회에서 박근혜를 탄핵소추한 이후 헌법재판소 판결까지 생겨난 애매한 역사의 시간에 곧바로 반민주, 반민생, 반평화, 반평등 정책의 전면 폐기에 국회가 나서도록 명령하고 강제했어야 했다. 다가온 대선에서는 '광장의 후보', '촛불의 후보'가 나서도록 해야 했다. 인물이 아니라 어떤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약속이 서도록 해야 했다. 여야의 대결이 아니라, 좀더 확고한 '평등'과 '평화'라는 새로운 한국사회의 가치관이 모두의 참여 속에서 확정되는 제2의 촛불혁명의 과정이었어야 했다. 기존 관료행정의 시간과 법과 룰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유일하게도 헌법 위의 최고 상위법일 수 있는 주권자들의 직접민주주의 혁명의 시간과 룰에 대한 집중의 시간이었어야 했다. 구시대의 퇴진과 몰락과 파괴와 아웃의 시간이었어야 했다. 민주당의 집권이 아니라, 주권자인 촛불시민의 직접민주주의의 실현 과정이었어야 했다.  

무엇을 집권했는지도, 무엇을 획득했는지도, 무엇을 위임받았는지도 모르는 정부라면 '문제'가 다시 될 수 있다. 영민한 정권이 되기를 바란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꿀 줄 아는 정부였으면 좋겠다. 의회에 있는 자한당 무리들의 눈치나 보고, 재벌들의 눈치나 보고, 촛불시민들의 눈치나 보고,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한 눈치나 보는 정권은 '문제'일 수 있다. 기준과 목표는 모든 이들의 평화와 평등이어야 한다. 1% 자본가들의 부를 99% 평범한 이들의 삶의 평화와 평등을 위해 내놓자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는 정권이라면 좋겠다. 존중하겠다, 그러나 바뀌어야 한다고 확고하게 얘기할 수 있는 정부면 좋겠다. 지혜보다는 용기가 더 많은 정권이었으면 좋겠다. 나중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여기에서 최선을 다해주는 우리들의 대리인들이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촛불항쟁, 촛불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 초입이다. 그 혁명이 우스워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함께 가야 할 한국사회에 대한, 세계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합의들을 만들어가야 한다. 모든 삶의 공간에서 모든 적폐를 몰아내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지금 만들어진 촛불혁명의 시공간의 주체는 정부에 들어 간 기껏 수백 명의 일꾼들이 아니다. '문재인 정부'도 그 촛불의 일부일 뿐이다. 촛불혁명을 이루어 낸 우리 모두가 해야 한다. 위임할 필요도 없다. 기다려서도 안 된다. 내가 하면 될 일을 누군가에게 기대할 까닭도 없다. 되지 않는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다. 이 '혁명'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항쟁'이 우스개가 되면 안 된다. 한국이라는 '고유하고 고답적이고 후진' 틀에 갇혀서도 안 된다. 

다시 전세계의 혁명을 위해, 모두의 평화와 평등과 안전과 존중과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한국인'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혁명은 끝나지 않을 것이며, 사랑도 명예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kakiru@pressian.com 다른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