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세상을 떠난 지 25년이 되는 날이다. 김선수 법무법인 시민 대표 등 후배 변호사 16명이 지난 7월 16일부터 3개월간 ‘인간 조영래’를 기억하는 22명을 만났다. 본지는 후배 변호사들이 담아온 기억들을 재구성했다.
◆“통일 대한민국의 초대 총리감”=1965년 2월 14일자 조간신문에 실린 서울대 합격자 발표에 조영래 변호사(이하 경칭 생략)의 이름이 있다. ‘최고득점자 : 조영래 (법대·경기고) : 421점’. 그러나 조영래가 인터뷰에서 밝힌 소감은 덤덤했다. “뭐 대단한 일입니까. 그저 운 좋은 덕이지.”
이홍훈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3학년 1학기 때까지 가정교사를 하고 한·일 협정 반대 시위도 주도했는데 고3 2학기 몇 달 공부해 서울대 전체수석을 했다”며 “보통사람 머리하고는 좀 달랐다”고 했다. 민법의 대가인 서울대 법대 곽윤직 교수는 “조영래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머리 좋은 사람”이라며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영래는 교수들의 기대와 달리 입학 직후부터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 나선 이후 69년 3선 개헌 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대학생활을 민주화 운동으로 채웠다. 좋은 머리는 학생운동의 전략과 이론을 만드는 데 썼다. 그의 방에는 일본어로 된 사회과학 서적이 가득했다.
“2학년 때인가, 영래가 조셉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들고 다니더니 일주일도 안 돼 다 읽었더군요.”(손학규)
법대생들이 65년 6월 14일부터 벌인 200시간 단식투쟁을 거치며 조영래는 전국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정영일 변호사는 “정세에 대한 판단력이 탁월했다”며 “친구들끼리 통일이 되면 초대 총리감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말했다.
◆전태일이 기다렸던 대학생 친구=“아이고, 우리 아들이 ‘나한테는 왜 대학생 친구도 하나 없나’ 그랬는데, 죽고 나서야 나타났구나.”
1970년 11월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빈소 인근에서 만난 장기표에게 쏟아낸 오열이었다. 69년 9월 3선 개헌이 된 뒤 조영래가 사법시험 도전을 결심해 경기도 고양시의 용구암에 들어갔을 때였다. 이때 함께 기거한 사람이 ‘직업 운동가’ 장기표였다.
“고시 준비 중에 학생운동 백서를 쓰는 등 주로 나를 통해 운동에 관여하던 조영래가 전태일 분신 소식에 용구암에서 내려왔다.”(장기표)
감시를 피해 이소선 여사와 만나며 장례절차에 깊이 관여했던 조영래는 12월 말 용구암으로 돌아간 지 두 달 만에 치른 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사법연수원 입소 후 두 달 만에 터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6월의 실형을 살고 나온 뒤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수배돼 변호사의 길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전태일 평전의 탄생…“다시 써야 한다”=민종덕은 90년 가을 조영래의 서소문 사무실에 찾아갔다. “지금쯤 저자가 누구인지 발표해도 괜찮지 않으냐”고 묻는 민종덕에게 조영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태일 평전』을 다시 써야 한다. 잘못 쓰였다. 어차피 지식인 관점에서 쓴 책이고, 의도치 않았지만 죽음을 미화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전태일 이후에 나온 많은 열사에게 굉장히 미안해하는 표정이 읽히더군요.”(민종덕 전 청계피복노조 위원장) ‘저자 조영래’로 인쇄된 『전태일 평전』은 1991년 1월 세상에 나왔다. 이미 조영래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조영래는 74년 4월 이후 6년간의 수배생활 중 절반은 전태일을 위한 삶이었다. 조영래는 비밀리에 이소선 여사 등을 수시로 만나 구술을 채록하고 자료를 모았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책이 탈고된 것은 76년. 최초 원고는 민종덕에게 넘겨져 다섯 부의 등사본으로 만들어졌다. 그중 한 부가 손학규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78년 책으로 나왔다. 83년 6월의 국내 출판은 민종덕이 통로였다. 집필과정을 지켜봤던 장기표는 “조영래가 3년 동안 전태일을 온전히 녹여서 다시 내뿜어 놓은 책”이라고 했다.
◆공익소송의 새 장을 열다=“이건 인재다.” 84년 9월 3일 변호사 사무실 문을 열며 조영래가 던진 말이었다. 폭우로 서울 망원동 유수지의 제방이 터졌다는 보도에 그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조 변호사가 ‘저거 소송하면 재밌을 텐데’라고 얘기해 알아보니 수재민 중에 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 앞집·뒷집 등 5가구를 묶어 소송을 시작했습니다.”(박석운 당시 사무장·현 한국진보연대 대표)
조영래는 소송의 길목마다 미리 수를 뒀다.
“망원동 수재사건에서 소장을 내면서 바로 증거보전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서울시가 수문을 파기해 증거를 없애는 걸 막기 위해서였죠. 그때만 해도 잘 쓰이지 않던 증거보전신청이 소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죠.”(김선수) “토목공학을 공부해 서울시 쪽 증인으로 나온 고려대 엔지니어링 전공 교수를 몰아붙이는데 증인이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던 모습이 생생해요.”(박원순)
조영래는 평범한 사건에서 사회적 함의를 찾아내 소송으로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승소했다. 김선수는 “인권 변론이라면 주로 시국 형사사건이 대부분이던 시절 조 변호사는 환경·소비자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소송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진실은 감방 속에 가두어 둘 수가 없다”=“권양이 처음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는 슬픔과 절망으로 왔으나 이제 우리는 가슴 가득한 기쁨과 희망으로 권양의 승리에 대해 증언하고자 합니다.”
86년 11월 21일 인천지법 법정에서 권인숙씨에 대한 변론요지서를 읽던 조영래는 눈물을 흘렸다. 그해 6월 위장취업 혐의로 구속됐던 권씨가 부천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받은 사건은 조영래의 개입으로 정국을 뒤흔드는 시국사건으로 확대됐다.
권인숙과 함께한 조영래의 법정투쟁은 가해자 문귀동 등을 고발하던 86년 7월부터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리하던 1990년까지 계속된 대장정이었다. 홍성우는 그 시작을 이렇게 기억했다.
“86년 7월 정법회(정의실천법조인회) 모임에서 이상수 변호사가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졌다’고 흥분해서 얘기했어요. 조영래와 함께 인천소년교도소에 가서 1시간반쯤 면회하고 ‘이제 그만 끝내고 가지’ 싶었는데, 조영래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에요. 하나하나 세밀하게 전부 파고들어 기록을 했죠.”
변호사 9명이 가해자 문귀동을 고발하는 당사자로 나서며 쓴 고발장은 조영래의 선전포고였다.
◆87년 후보 단일화 실패와 새로운 길=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뒀던 조영래는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힘썼다. 그 이유는 87년 10월에 쓴 기자회견문에 남아 있다.
“양 김씨가 동시 출마해 군부독재에 승리가 돌아갈 경우 민주화에 대한 체념의 분위기가 사회에 가득 차고….”
조영래는 ‘단일화국민협의회’를 이끌며 양 김과 접촉했지만 실패했고, 선거 결과는 ‘노태우 후보 당선’이었다. 지인들은 “조영래가 가장 낙담했던 게 이때”라고 입을 모았다. 조영래는 묵묵히 본업으로 돌아갔다. “‘민중당’에 동참해 달라” 는 장기표의 제안도 거절했다.
“남들은 다 조영래가 나서야 된다고 보는데 본인은 안 그랬어요. 너무 겸손하고 신중해서….”(장기표)
◆불쑥 찾아온 죽음=새 길을 모색하던 조영래는 90년 1~5월 미국 컬럼비아대학 초청으로 ‘인권 변론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개혁·개방이 한창이던 러시아도 이때 가봤다. 귀국 후 주위에 “사회주의는 끝났다”는 말을 던지기도 했던 조영래에게 죽음이 불쑥 다가왔다.
“90년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 어느 날 나갔다가 ‘냉방병인 것 같다’고 하시더니 어느 날은 ‘한 달이나 다녔는데 안 낫는다. 큰 병원에 가보라네’ 하시더라고요.”(정향아 당시 직원)
12월 12일 조영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우울증이 왔어요.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할 정도로….”(신평)
“요즘도 가끔 모란공원에 가 한동안 앉아 있다 오곤 합니다. 보고 싶어서….”(이홍훈)
임장혁 기자·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S BOX] 흉상 제작·기념전 등 25주기 추모행사 다양
1990년 12월 12일 새벽 조영래 변호사가 폐암 투병 중 4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올해 25주기를 맞아 서울지방변호사회(회장 김한규)는 ‘시대를 밝힌 자랑스러운 변호사 조영래’를 기리기 위해 다양한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25주기 기념사업위원장은 조 변호사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함께 일했던 김선수 변호사가 맡고 있다.
[뉴스 속으로] 조영래 변호사 25주기, 43년 삶 재구성
고 3때 시위 주도하고 서울대 수석
수배생활 중 전태일 평전 집필
공익 소송과 인권 변론 선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맡아
이홍훈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3학년 1학기 때까지 가정교사를 하고 한·일 협정 반대 시위도 주도했는데 고3 2학기 몇 달 공부해 서울대 전체수석을 했다”며 “보통사람 머리하고는 좀 달랐다”고 했다. 민법의 대가인 서울대 법대 곽윤직 교수는 “조영래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머리 좋은 사람”이라며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영래는 교수들의 기대와 달리 입학 직후부터 한·일 협정 반대 시위에 나선 이후 69년 3선 개헌 반대 운동에 이르기까지 대학생활을 민주화 운동으로 채웠다. 좋은 머리는 학생운동의 전략과 이론을 만드는 데 썼다. 그의 방에는 일본어로 된 사회과학 서적이 가득했다.
“2학년 때인가, 영래가 조셉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들고 다니더니 일주일도 안 돼 다 읽었더군요.”(손학규)
법대생들이 65년 6월 14일부터 벌인 200시간 단식투쟁을 거치며 조영래는 전국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정영일 변호사는 “정세에 대한 판단력이 탁월했다”며 “친구들끼리 통일이 되면 초대 총리감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고 말했다.
1970년 11월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빈소 인근에서 만난 장기표에게 쏟아낸 오열이었다. 69년 9월 3선 개헌이 된 뒤 조영래가 사법시험 도전을 결심해 경기도 고양시의 용구암에 들어갔을 때였다. 이때 함께 기거한 사람이 ‘직업 운동가’ 장기표였다.
“고시 준비 중에 학생운동 백서를 쓰는 등 주로 나를 통해 운동에 관여하던 조영래가 전태일 분신 소식에 용구암에서 내려왔다.”(장기표)
감시를 피해 이소선 여사와 만나며 장례절차에 깊이 관여했던 조영래는 12월 말 용구암으로 돌아간 지 두 달 만에 치른 1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사법연수원 입소 후 두 달 만에 터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6월의 실형을 살고 나온 뒤 민청학련 사건으로 다시 수배돼 변호사의 길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전태일 평전의 탄생…“다시 써야 한다”=민종덕은 90년 가을 조영래의 서소문 사무실에 찾아갔다. “지금쯤 저자가 누구인지 발표해도 괜찮지 않으냐”고 묻는 민종덕에게 조영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태일 평전』을 다시 써야 한다. 잘못 쓰였다. 어차피 지식인 관점에서 쓴 책이고, 의도치 않았지만 죽음을 미화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전태일 이후에 나온 많은 열사에게 굉장히 미안해하는 표정이 읽히더군요.”(민종덕 전 청계피복노조 위원장) ‘저자 조영래’로 인쇄된 『전태일 평전』은 1991년 1월 세상에 나왔다. 이미 조영래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
조영래는 74년 4월 이후 6년간의 수배생활 중 절반은 전태일을 위한 삶이었다. 조영래는 비밀리에 이소선 여사 등을 수시로 만나 구술을 채록하고 자료를 모았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책이 탈고된 것은 76년. 최초 원고는 민종덕에게 넘겨져 다섯 부의 등사본으로 만들어졌다. 그중 한 부가 손학규의 손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가 78년 책으로 나왔다. 83년 6월의 국내 출판은 민종덕이 통로였다. 집필과정을 지켜봤던 장기표는 “조영래가 3년 동안 전태일을 온전히 녹여서 다시 내뿜어 놓은 책”이라고 했다.
◆공익소송의 새 장을 열다=“이건 인재다.” 84년 9월 3일 변호사 사무실 문을 열며 조영래가 던진 말이었다. 폭우로 서울 망원동 유수지의 제방이 터졌다는 보도에 그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조 변호사가 ‘저거 소송하면 재밌을 텐데’라고 얘기해 알아보니 수재민 중에 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 앞집·뒷집 등 5가구를 묶어 소송을 시작했습니다.”(박석운 당시 사무장·현 한국진보연대 대표)
조영래는 소송의 길목마다 미리 수를 뒀다.
“망원동 수재사건에서 소장을 내면서 바로 증거보전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서울시가 수문을 파기해 증거를 없애는 걸 막기 위해서였죠. 그때만 해도 잘 쓰이지 않던 증거보전신청이 소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죠.”(김선수) “토목공학을 공부해 서울시 쪽 증인으로 나온 고려대 엔지니어링 전공 교수를 몰아붙이는데 증인이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하던 모습이 생생해요.”(박원순)
조영래는 평범한 사건에서 사회적 함의를 찾아내 소송으로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승소했다. 김선수는 “인권 변론이라면 주로 시국 형사사건이 대부분이던 시절 조 변호사는 환경·소비자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소송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진실은 감방 속에 가두어 둘 수가 없다”=“권양이 처음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는 슬픔과 절망으로 왔으나 이제 우리는 가슴 가득한 기쁨과 희망으로 권양의 승리에 대해 증언하고자 합니다.”
86년 11월 21일 인천지법 법정에서 권인숙씨에 대한 변론요지서를 읽던 조영래는 눈물을 흘렸다. 그해 6월 위장취업 혐의로 구속됐던 권씨가 부천경찰서에서 성고문을 받은 사건은 조영래의 개입으로 정국을 뒤흔드는 시국사건으로 확대됐다.
권인숙과 함께한 조영래의 법정투쟁은 가해자 문귀동 등을 고발하던 86년 7월부터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승리하던 1990년까지 계속된 대장정이었다. 홍성우는 그 시작을 이렇게 기억했다.
“86년 7월 정법회(정의실천법조인회) 모임에서 이상수 변호사가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졌다’고 흥분해서 얘기했어요. 조영래와 함께 인천소년교도소에 가서 1시간반쯤 면회하고 ‘이제 그만 끝내고 가지’ 싶었는데, 조영래는 그때부터가 시작이에요. 하나하나 세밀하게 전부 파고들어 기록을 했죠.”
변호사 9명이 가해자 문귀동을 고발하는 당사자로 나서며 쓴 고발장은 조영래의 선전포고였다.
◆87년 후보 단일화 실패와 새로운 길=현실정치와는 거리를 뒀던 조영래는 87년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힘썼다. 그 이유는 87년 10월에 쓴 기자회견문에 남아 있다.
“양 김씨가 동시 출마해 군부독재에 승리가 돌아갈 경우 민주화에 대한 체념의 분위기가 사회에 가득 차고….”
조영래는 ‘단일화국민협의회’를 이끌며 양 김과 접촉했지만 실패했고, 선거 결과는 ‘노태우 후보 당선’이었다. 지인들은 “조영래가 가장 낙담했던 게 이때”라고 입을 모았다. 조영래는 묵묵히 본업으로 돌아갔다. “‘민중당’에 동참해 달라” 는 장기표의 제안도 거절했다.
“남들은 다 조영래가 나서야 된다고 보는데 본인은 안 그랬어요. 너무 겸손하고 신중해서….”(장기표)
◆불쑥 찾아온 죽음=새 길을 모색하던 조영래는 90년 1~5월 미국 컬럼비아대학 초청으로 ‘인권 변론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개혁·개방이 한창이던 러시아도 이때 가봤다. 귀국 후 주위에 “사회주의는 끝났다”는 말을 던지기도 했던 조영래에게 죽음이 불쑥 다가왔다.
“90년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 어느 날 나갔다가 ‘냉방병인 것 같다’고 하시더니 어느 날은 ‘한 달이나 다녔는데 안 낫는다. 큰 병원에 가보라네’ 하시더라고요.”(정향아 당시 직원)
12월 12일 조영래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우울증이 왔어요.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을 수 있으면 좋겠다’할 정도로….”(신평)
“요즘도 가끔 모란공원에 가 한동안 앉아 있다 오곤 합니다. 보고 싶어서….”(이홍훈)
임장혁 기자·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S BOX] 흉상 제작·기념전 등 25주기 추모행사 다양
1990년 12월 12일 새벽 조영래 변호사가 폐암 투병 중 43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올해 25주기를 맞아 서울지방변호사회(회장 김한규)는 ‘시대를 밝힌 자랑스러운 변호사 조영래’를 기리기 위해 다양한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25주기 기념사업위원장은 조 변호사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함께 일했던 김선수 변호사가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