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내 삶과 화해하고 싶어요, 상처만 있었냐고… 김두식의 고백 ‘부미방 30돌’의 문부식씨

참된 2014. 8. 27. 14:33

내 삶과 화해하고 싶어요, 상처만 있었냐고…

한겨레  등록 : 2012.03.16 20:45 수정 : 2012.03.16 21:14

[토요판] 김두식의 고백
‘부미방 30돌’의 문부식씨

 

문부식씨는 인터뷰를 위해 처음에 자리를 잡았던 홍익대 앞 카페 전체가 금연공간이라고 하자 “담배 없이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며 걸어서 10분 거리의 다른 카페로 이동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금부터 꼭 30년 전인 1982년 3월18일 고신대를 다니던 신학생 문부식은 “광주의 비극을 상기시키고 미국과 전두환의 더러운 결탁을 고발”하고자 후배들과 함께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질렀습니다. 휘발유의 폭발력을 예상치 못한 그들의 미숙함은 “사람을 살해한 죄악을 고발하려다 사람을 죽게 하는 모순되고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았고, 문부식은 사형선고와 10년 가까운 수감생활을 끝낸 후에도 영원히 내려놓을 수 없는 상흔과 부채감을 안게 됩니다. 두 번째 출소 후 시집 <꽃들>을 출간한 시인 문부식은 1997년 계간지 <당대비평>을 창간하면서 ‘국가폭력’과 ‘기억의 정치’를 성찰하는 글들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2002년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광기의 시대를 생각함>의 출간을 앞두고,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의 민주화운동 인정을 문제 삼은 그의 인터뷰가 <조선일보>에 실리면서 엄청난 비판에 부딪혔고, 깊은 상처를 입은 그는 <당대비평>을 떠나야 했습니다. 뒤이어 <조선일보>에 연재한 분쟁지역 기행문도 ‘변절’의 낙인만 남긴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지요. 편의점의 심야 아르바이트에 이어 카페를 차려 생계를 이어가던 문부식은 2007년 출판가로 돌아와 <진보의 재탄생>, <굿바이 삼성> 등을 기획했고, 2011년 12월 진보신당 대변인이 되었다가 한 달 만에 사임했습니다. 2월29일 홍대 앞의 작은 카페에서 그를 만나 사임 경위를 묻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택시기사와의 시비는 어떻게 된 건가요?

“결국 그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나요. 시간의 거리가 더 필요한데, 솔직히 어젯밤엔 인터뷰를 미루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날 사건은 여전히 기억이 제대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는 생각에 사과하기 바빴는데, 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해서 택시기사분께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랬더니 그날 밤 술자리에 동석했던 누군가로 자신을 오해해서 ‘네가 왜 이 차를 운전하느냐, 네가 왜 나를 데리고 가냐?’면서 시비를 걸더라고 하더군요. 하루 종일 언짢고 날카로운 일들이 이어진 날이었는데, 제 안의 어떤 망상이 그런 행태를 보였을지 몰라도, 공인의식 같은 것 없이 두서없이 울퉁불퉁 살아온 것의 반영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사건의 “공허함” 때문에 많이 힘들어 보였습니다. “돌 하나가 날아와 생을 가려주던 유리창이 왕창 내려앉은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안기부에 갔더니 “총을 왜 거꾸로 잡느냐”

-아버지 형제 다섯 분 중 네 분이 육사를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82년에 안기부에 갔더니 ‘총을 왜 거꾸로 잡느냐’고 하더군요. 할아버지가 좌익한테 죽음을 당해서 장남을 뺀 아들들이 모두 육사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거기서 들었어요. 아버지 쪽과 오래 불화한 탓에 사실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재판받을 즈음에는 집안 내력이 저의 구명을 바라는 분들의 논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대구교도소 면회 오셨을 때 첫 말씀이 ‘그래서 자네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믿는다’였죠.”

-신학대학을 선택했는데, 원래 기독교 집안인가요?

“아닙니다. 넉넉지 못한 집안의 맏딸인 어머니가 청년 장교의 장래를 보고 결혼하셨을 텐데, 두 분의 불화로 집안이 늘 불안정했죠. 성장기 내내 참 불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와 만난 건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면서부터였지요. 집에서 느낄 수 없는 우애나 새벽기도 분위기에 끌렸던 것 같습니다. 일찌감치 성직을 꿈꾸고 그때부터 입시공부 대신 번역된 신학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신학대학 간다니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시는 아버지와 크게 충돌한 후 집을 나온 게 첫 번째 가출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막상 신학대학에 들어가니 상상하던 것과는 영 달랐지요. 신에 대해, 인간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오솔길이 아니라 넥타이에 금박의 성경책만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장발에 고무신 끌고 다니고, 교련시간 같은 데는 얼굴도 안 비치고, 소주 마시고 불콰한 얼굴로 수업 들어가고 그랬죠. 그러다 2학년 때 그 학교 생긴 이래 처음으로 유인물이란 걸 뿌렸습니다.”

-그 일로 처벌을 받으셨나요?

“네. 강제휴학을 당했죠. 그 무렵 어머니는 사업하다 큰 빚을 지고 이혼도 당하고 어딘가 피하셔야 했어요. 어머니를 제가 숨겨드리기도 했는데, 학사징계 결정되고 허탈한 심정으로 귀가하다가 어머니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차가운 산에 어머니를 묻고 당시 학교 가는 길목에 있던 완월동(성매매 업소 집결지)을 찾아갔습니다. 신학생으로 멀리서만 바라보던 그곳을요. 1년이 지나면서부터 산이나 흐르는 강만 봐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더군요. 어머니를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 견디기 힘들었지요.”

 

 

 

문부식의 인생 타임라인 (※ 클릭하시면 더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23907.html

-80년 봄 복학해서 사회과학 공부모임을 만들었고, 광주항쟁 수배자였던 김현장씨를 만나면서 부미방(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이어지게 되었죠? 30년 전 사건을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먼저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로부터 달아나지지가 않아요. 언젠가 최인훈 선생님께서 말씀 중에 ‘지나치게 종교적인 태도 아닌가’ 하시던데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라 생각해요. 딸이 자라는 것을 보다가도 문득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돼?’ 하는 생각이 들면 아프지요.”

-당시 문 선생은 밖에서 사진을 찍으셨죠?

“그게 면책사유가 될 수 있나요. 80년 12월의 광주 미문화원 방화사건처럼 단순 실화로 은폐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는 밖에서 언론에 보낼 사진을 찍고 동료들에게 사인을 보내고 그랬지요. 사람이 다칠 것을 염려하던 후배들에게 참으로 면목이 없었어요. 제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잠시 침묵) 그 죽음에 대해 누군가 책임져야 한다면 그건 저라고 생각했고 스스로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자로서 법정에서도 무죄주장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산에 가더라도 미문화원 쪽은 쳐다보지도 못했어요. 유리창 깨지는 소리, 연기 속에서 달려 나오던 후배들의 모습, 이들이 짊어져야 했던 부채감들이 떠올라서.”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의 민주화운동 인정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저는 그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치 않았던 결과를 떠안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이들과 이해와 공감의 끈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명예회복과 보상을 제도적으로 실행하는 일은 다른 문제를 동반합니다. 설혹 역사에 대해 청구할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좁은 문’ 앞에 저나 그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뒷줄에 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우리 같은 사람들이 묵묵히 지고 갈 짐이라고. 동의대 사건에 대한 제 이야기 자체는 지금도 회수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문부식

부미방 사건으로 인한 죽음
‘조선일보’ 연재로 쏟아진 비판…
동의대 사건에 대한 제 이야기는
지금도 회수하고 싶지 않아요

이번에 음주사고를 치고 보니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보여요
목수가 되고 싶어요, 글도 쓰고

<조선> <중앙>과의 해프닝, 그리고 편의점 알바

-그런 내용을 전달하는 매체로 <조선일보>를 선택한 건 판단착오 아니었나요?

“현명치 못했고, 결과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는 데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 인터뷰는 계획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무렵 역사문제연구소라는 학술단체에서 책 출간을 앞둔 저를 불러 이야기를 듣는 토론회를 열었어요. <조선일보>와 <한겨레> 기자가 참석했는데, 먼저 기사화한 것은 <한겨레>였습니다. <조선일보> 학술부 기자에게는 ‘책이 나오면 써 달라’고 당부했지만, 데스크에서 성화를 부리는데 엄연히 현장에 있던 기자의 기사를 계속 막을 수는 없었지요. 그때 그쪽에서 ‘기사가 싫으면 인터뷰를 하고 본인의 확인을 거친 후 기사를 내보내겠다’는 제안을 했죠. 그편이 제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는 데 낫다고 생각해 수락했는데, 인터뷰가 나가자마자 난리가 났던 거죠.”

-결과적으로 이용당한 건가요?

“제가 동의했으므로 이용이란 말은 쓰고 싶지 않네요. 특정 부분을 강조했을지는 몰라도 제 말을 왜곡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살아남기 위해 해당 기자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없고요. 그 신문이 사설이나 칼럼에서 마치 알카에다가 간디로 개과천선한 것처럼 묘사하고, 그게 운동을 비판하는 무기가 된 것은 안타깝지만, 어디까지나 그것도 제 책임이죠.”

-인터뷰는 몰라도 2003년 2월부터 <조선일보>에 ‘폭력의 세기를 넘어-문부식의 시간여행’을 연재한 것은 문제 아닌가요?

“비판받아야 한다면 기꺼이 감수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인터뷰 사건으로 이미 ‘조선일보의 나팔수’가 되었고 잡지 일도 자진해서 그만두고 하필이면 살던 작은 아파트도 경매에 넘어가게 될 상황이었어요. ‘내가 더 추락할 바닥이 있나?’ 생각했습니다. 그때 <조선일보>가 기명칼럼을 주겠다고 했는데, 제가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분쟁지역을 돌아다니는 여행 에세이를 쓰고 싶다고요.”

-집이 넘어가는 판에 <조선일보>에 여행 에세이를 쓴다고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나요?

“원고료 선금을 받아 월세 보증금은 충당했고, 적지 않은 원고료와 넉넉한 여행경비가 따로 책정되었어요. 기억의 상품화를 비판해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과거를 상품성으로 평가받았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일이겠죠. 연재는 중간에 포기했어요. 기왕에 쓰는 거 좋은 글을 쓰고 싶었는데 돈이 급해 뛰어나간 여행에서 무얼 제대로 볼 수 있었겠습니까. 신문사 입장에서는 ‘화끈한’ 얘기가 없으니 재미없어하는 것 같고, 저는 저대로 자기모멸감 같은 것에 허우적대고, 그래서 끝내겠다고 했죠.”

-그전에 <중앙일보>하고도 이야기가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변에서 <조선일보>는 피하라고 권유해서 <중앙일보>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문화부 데스크는 환영했는데, 나중에 뭔가 메모를 갖고 내려옵디다. 너무 반미적이면 안 되고 너무 반정부적이면 안 되고…(웃음) 그런 가이드라인이 있는 것도 그렇고, 여행경비도 삼성 같은 곳에서 협찬받아야 한다고 얘기하기에 구질구질한 느낌이 들어서 못 하겠다 그랬어요.”

-<조선일보> 연재를 중단한 후에는 편의점에서 일하셨죠?

“밤 12시부터 아침 9시까지 심야 아르바이트를 했죠. 스스로에게 내린 ‘하방’이었습니다. 허명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삶, 책을 멀리하는 삶, 몸을 움직여 사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운전면허도 없고, 아파트 경비원을 하려니 나이가 너무 젊어서 안 된다고 하고.(웃음)

이력서 내지 않아도 되는 동네 편의점에 전화하고 가서 애 학원비라도 벌려고 왔다고 했어요. 수도하는 마음으로 쓸고 닦고, 꼬맹이들에게 동전 거슬러주고 사탕 끼워 주며 열심히 일했죠.”

 그 무렵 문부식은 어떤 모임에서든 밤 11시만 되면 어김없이 자리를 떠나곤 했습니다. 민주화운동 보상 신청도 하지 않은 전직 사형수가 편의점 ‘알바’를 위해 자리를 뜬 뒤에도 저를 포함한 <당대비평>의 다른 편집위원들은 대부분 자리를 지켰습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한때 운동권 언저리를 맴돌았으며, 지금은 주로 교수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문부식은 그때 느꼈던 적막감을 이야기했습니다.

 “눈이 많이 오던 겨울밤 오랜만에 동료들을 만나 술 한잔 걸치고 집에 왔지요. 혼자 자전거 타고 편의점으로 가다가 미끄러져 공중에 떴다가 자빠지고 난 뒤 생각했어요. ‘이런 젠장 내 인생은 뭐지?’ 꽤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어울리던 친구들과 저는 다른 인생이었던 거죠. 그동안 지녀온 지적 자존심이 삭풍과 함께 날아가 버린 것 같은 쓸쓸함.”

 

그를 끝까지 보호한 ‘조직’은 없었네 

 -한때 월드뮤직에 푹 빠져 지냈다는 소문도 있던데요?

 “편의점은 손님이 없으면 밤에 할 일이 없잖아요. 활자를 보면 화가 치밀 것 같고. 작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졸고 있으면 손님이 깨워주는 식인데, 그 가게에 조그만 오디오가 있었습니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아무거나 가져다 들었죠. 어떤 책에 끼워준 빅토르 하라의 노래를 듣다가 마지막 트랙에 편집된 비올레타 파라의 ‘삶에 감사드리며’를 만났어요. 피노체트 쿠데타 군이 대통령궁을 포격하는 시끄러운 소리 안에 삽입되어 있던, 한쪽에선 총에 맞아 죽어 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긍정하는, 저 간절한 목소리는 뭘까, 그때부터 그 어떤 목소리들을 추적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쁜 일 곁에는 좋은 일이 숨어 있다고, 그게 나중 카페 할 때 자산이 되더라고요.”

 -너무 추운 이야기만 들은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따뜻했던 시기는 언제입니까?

 “딸의 첫울음 소리? 처음으로 아이가 제게 거짓말한 때? 지난 10년간 많이 외롭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사고를 치고 나서 보니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더라고요. 힘들 때면 달려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영혼의 친구도 있고, 예컨대 홍세화 선생님 같은 분. 언젠가 이분이 저를 끌고 반강제로 치과에 갔는데 의자에 누워 입을 벌리기 전 멀리서 저를 바라보는 안타까운 그분의 눈길을 봤어요. 울컥했는데, 이후로 졸졸 따라다니죠. 강연도 따라다니고, 대신 주량도 좀 늘려드리고.(웃음)”

 -앞으로의 계획은?

 “목공일을 제대로 배워 목수가 되고 싶어요.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지나온 제 삶과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상처만 있었냐고, 외로움만 있었냐고, 곳곳에 묻혀 있을 행복했던 아름다웠던 순간들과도 만나고, 그래서 내 삶과 화해하고 싶어요. 그러고는 글쓰기도 다시 시작하고 싶고.”

 굴곡이 심했던 인생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문부식은 “나는 원래 길 잃은 인간으로 태어났으며 구원받는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도 않는다”는 존 스타인벡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네이팜탄 공장에 폭탄을 설치했다가 예기치 않은 희생자를 내고 평생 도망 다녀야 했던 영화 <허공에의 질주>의 반전운동가 부부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화 속의 그들과 달리, 문부식에게는 그를 끝까지 보호하고 지원하는 ‘조직’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사람을 쓰고 빨리 내다버리는 곳이 우리 사회인 것 같습니다. 문부식처럼 민주화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에게 자기 삶과 화해할 기회를 한번이라도 더 주는 것이, 저처럼 민주화 운동에 전혀 기여한 바 없이 과실만 따먹은 사람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