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제국

‘독립영화계 맏형’ 김동원 감독과 ‘샛별’ 홍리경 감독 다큐를 말하다

참된 2014. 3. 8. 09:28

‘독립영화계 맏형’ 김동원 감독과 ‘샛별’ 홍리경 감독 다큐를 말하다

글 박은경·사진 김창길 기자 yama@kyunghyang.com    경향신문  
입력 : 2014-02-26 21:20:35수정 : 2014-02-26 23:25:51

 

 

 

ㆍ“출연자와의 인간적 관계 촬영 사이서 고민 많아”
ㆍ“여전히 갈등 많은 한국… 감독들은 더 바빠졌죠”

‘독립다큐계의 맏형’ 김동원 감독(59·

사진 왼쪽)과 첫 장편다큐 개봉을 앞둔 ‘샛별’ 홍리경 감독(32·오른쪽)은 ‘푸른영상’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푸른영상은 1991년 김동원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제작집단으로, 노동·장애인·여성문제를 카메라에 담아왔다. 철거민 문제를 다룬 <상계동 올림픽>(1988)으로 한국 다큐의 초석을 다진 김동원 감독은 비전향 장기수들의 송환 과정을 담은 <송환>으로 2004년 한국인 최초로 선댄스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수상했다. <송환>이 개봉된 지 10년 후인 올해, 홍리경 감독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를 다룬 <탐욕의 제국>의 개봉(3월6일)을 앞두고 있다. 다큐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김 감독과 출발점에 선 홍 감독을 만났다.


- 두 사람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나.

홍리경(홍)=2000년쯤 광화문의 한 극장에서 김동원 감독님 회고전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처음 봤다. 그땐 영화에 관심 많은 학생이었는데, 질문도 했었다.

김동원(김)=그럼 그 이후에 영화 공부하러 러시아도 가고 프랑스에도 간 거냐. 내가 네 인생을 망쳤구나(웃음).

홍=공부를 마치고 2010년 10월 푸른영상에 들어갔다. 3개월 자원활동을 하고 난 후에 3개월의 수습기간과 수습작 평가로 정식 멤버가 된다. 수습 5개월쯤에 한 선배가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 문제를 제안했고 그게 <탐욕의 제국>으로 만들어졌다. 수습작 겸 데뷔작이 된 셈이다.

- 촬영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홍=서초 삼성타운과 경기 기흥, 화성 공장에서 피해 노동자 가족들이 1인 시위할 때 함께 다녔다. 초반엔 촬영 제지가 거의 없었는데, 고 황유미씨에 대해 산재 인정 판결이 난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기숙사, 공장 내부도 담고 싶었는데 못 찍은 게 아쉽다.

김=촬영하다가 “못하겠다”면서 한 달인가 도망갔다 왔잖나.

홍=이윤정씨(뇌종양 투병 중 촬영 도중인 2012년 5월 사망)가 사망하고 나서였다. 사람도 만나기 싫었고, 영화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1주일간 캄보디아 봉사하는 친구를 따라 갔다가 그후에는 집에서 ‘잠수’탔다.

김=이런 것까지 찍어야 하나 고민했던 적이 많다. 친하면 친할수록 관계에 집중하고 싶은데 카메라 때문에 그럴 수 없을 때, 촬영이 천형처럼 느껴졌다. 적대적 관계는 오히려 더 좋다. <상계동 올림픽>을 찍을 때 ‘용역 깡패’들이 쳐들어 왔는데, 아드레날린이 솟아나더라. 철거촌 아줌마들도 철거 전엔 욕 한마디 못하다가 투사로 변하지 않나. 카메라에 사회문제를 담으면서, 내가 모르던 나를 발견하곤 했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위 사진)과 홍리경 감독의 ‘탐욕의 제국’(아래).


- 예전 다큐가 국가 권력에 대항했다면 지금은 거대 자본에 대항한다.

김=다큐를 처음 시작한 1980년대는 피아가 분명했다. 독재만 무너지면 민주화가 된다는 목표가 단순했다. 자본은 편재돼 있다. 나도 자본 없인 살지 못한다. 자본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는 게 옳은지 자기 의심도 한다. 장애인, 한센병 환자 등 소수자들을 주로 찍는데 그런 소수자들을 찍을 만큼 내가 투철하게 살고 있나도 반성한다. 잘못하면 남의 인생을 도둑질할 수도 있으니까. 장애인에 대한 성적 서비스 제공 문제 같은 건 판단하기가 어렵다. 어떤 문제를 어떻게 담을지 복잡해졌다.

- 다큐 지원금도 많아졌고, 소셜 펀딩(대중을 대상으로 한 소액 후원, <탐욕의 제국>도 소셜 펀딩으로 개봉 비용 4450만원을 모았다)도 생기면서 편해진 부분도 있다.

김=기자재도 좋아지고, 지원금·펀딩도 많아졌지만 그 자체가 본질적인 고민을 준다. 다큐가 뭔지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그땐 카메라와 나뿐이었다. 지금 촛불집회에 나가면 카메라가 1000대도 넘는다(웃음). 뭘 찍을지 결정하는 게 훨씬 힘들어졌다. 전엔 투쟁의 일환으로 카메라를 들었고 아무 보상도 바라지 않았지만, 요새는 다큐도 돈 없으면 못 찍는다.

- 예전에 다큐 제작비는 얼마였나?

김=그땐 제작비 개념이 없었고 드는 만큼 썼다. <상계동 올림픽> 찍을 때도 “상계동 촬영간다”가 아니라 “상계동 간다”고 했다. 작품 욕심을 내고 제작비 걱정을 했으면 안 찍었을 거다. <상계동 올림픽>은 3년, <송환>은 12년 찍었다. 요즘처럼 촬영기간을 정하고, 예산을 짜면서 찍었으면 못했다.

홍=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찍는다는 게 대단하다. 나도 작업은 작업대로 하고, 생계는 생계대로 꾸려야 한다. 사무실에서 매달 50만원의 활동비가 있었지만, 못 받을 때도 있었다. 생계 때문에 촬영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 심정적으로 어려울 때는.

홍=이윤정씨가 돌아가셨을 때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에서 만났지만, 마음속에는 기적처럼 건강해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분이 촬영을 원치 않는다고 해서 조심스러웠다. 편해졌을 때 찍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악화되셨다. 돌아보니, 그분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수도 있는데, 내가 제때 못 담아낸 것 같아 미안하다.

김=미묘하고 민감한 순간이 있다. <송환>에서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이 결정되고 이별하는 장면은 찍기가 힘들었다. 제대로 못 찍을 것 같아 다른 감독을 데리고 갔는데, 부탁하지 않았으면 그 장면은 <송환>에 못 담겼다.

- 예전과 비교해 지금의 한국 다큐를 평가한다면.

김=지렁이가 용된 수준이다. 내가 <상계동 올림픽>을 찍은 지 30년이 채 안됐다. 당시엔 허접스러운 그것도 다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해외 영화제 수상뿐 아니라 다큐를 보는 시선이 넓어졌고 기술적 완성도도 높아졌다. 한 외국 감독이 내게 “한국은 다큐의 천국”이라고 하더라. 남북 문제도 있고, 아직 역사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사건도 많아 소재가 넘친다는 거다. 현재에도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현 정권에선 다큐 감독들이 더 바빠졌다. 선진국 다큐 감독들은 다 제3세계로 나가는데, 우리는 나갈 필요가 없다. 웃기면서 서글픈 현실이다.

- 넘치는 소재 속에서 길어낼, 두 분의 차기작은 무엇인가.

홍=‘전자 쓰레기’가 누구의 손에서 만들어져 어떻게 버려지는지 담고 싶다.

김=<송환2>를 준비 중이다. 송환 후 평양의 이야기를 찍는 건 불가능하니, 영상 편지를 전하는 형식이다. 이번엔 송환 과정이 아니라 ‘못 가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