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경향신문 입력 : 2012-12-13 21:26:30ㅣ수정 : 2012-12-13 21:36:33
이재영 동지!
일주일 전 만났을 때, 내 신발 사이즈 물으며 좋은 등산화 한 켤레 사주겠다고 큰소리 쳐놓고 이게 무슨 일인가? 며칠 만에 다시 만나니 사람도 구분 못하고, 내가 왔다고 큰소리 치자 알아먹지 못할 말만 겨우 내뱉더니 몇 시간 만에 이게 무슨 일인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더 살고 싶다며 의지를 불태우던 사람이, 늦장가 들어 얻은 두 아이와 천사 같은 제수씨 두고 이게 무슨 일인가?
이재영 동지!
그대의 한평생은 한국 진보정당운동 역사 그 자체였네.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를 거치고, 진보정당추진위원회가 진보정치연합을 거치는 동안 진보정당을 만들겠다는 우리의 꿈은 점점 멀어져가는 듯 보였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낀다는 노랫말처럼 한때 서른명이 넘었던 상근자는 단 한 명으로 줄었고 그게 바로 자네였지. 1995년 그 추운 겨울날 우리 두 사람이 민중당 시절부터의 낡은 짐을 내발산동 좁은 사무실로 옮기면서도 꿈이 있기에 기죽지도 힘들지도 않았지. 국민승리21을 만들어 1997년 대선을 치르고 그 힘으로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구상을 처음 들어준 사람도 자네였고, 그 엄청난 일을 현실화시킨 것도 자네 없이 불가능하였네. 그래서 10년의 고행 끝에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이 출범했을 때 우린 평생 소원의 절반이 이뤄지는 감격을 함께 나누기도 했었지. 그러나 어렵게 찾아온 진보정당의 봄은 짧았고 이내 거센 한파에 시달렸네. 10석으로 첫 원내진출을 이뤄내고 20%에 육박하는 지지율로 들떴던 순간은 잠깐이고 분당과 창당, 분열과 통합과 재분열로 이어지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애간장은 다 녹아버렸네. 지난 25년간 역정을 함께한 동반자이자 선배로서 참으로 미안하고 또 부끄럽네.
이재영 동지!
자네가 멈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겠네. 자네가 옮기다만 산을 우리가 마저 옮기겠네. 이 땅에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다시 세우는 날까지 우리 모두 이재영이 되겠네. 그러니 이제 무거운 삽 넘겨주고 편히 쉬시게. 남은 가족 걱정까지도 우리에게 넘기고 편안히 쉬시게. 이재영의 꿈은 반드시 이뤄질 걸세. 부디 영면하시게.
2012년 12월13일 그대의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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