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30주년>-④도청사수 김기광氏의 기억
연합뉴스 입력 2010.05.12 08:31 수정 2010.05.12 09:27 누가봤을까?
고교생으로 시민군 가담했다 상무대 영창 옥살이
"당시는 내 가족과 친구들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
(나주=연합뉴스) 장덕종 기자 = "내 가족과 친구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5.18 민주화 항쟁 당시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던 18살의 어린 나이에 시민군의 일원으로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켰던 김기광(49)씨.
김씨는 도청을 사수하다 진압군에 붙잡혀 6개월을 교도소에서 보냈고, 그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온 5.18의 '산증인'이다.
그는 5.18 30주년을 맞아 5.18이 점점 잊혀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후유증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다.
◇항쟁의 기억 = 총이 어떻게 생긴지도 모르던 순진한 고등학생이던 김씨. 그가 시민군의 일원이 된 날은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해 무자비한 살상이 자행되던 1980년 5월 21일이었다.
고향인 나주에서 학교에 다니던 그는 광주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해 수많은 시민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을 느꼈다.
분노에 치를 떨던 다른 청년들과 어울려 자연스럽게 '시민군'이 된 그는 이날 오후 2시께 나주의 무기고를 털어 총기를 탈취한 뒤 버스 5대에 나눠 타고 광주로 향했다.
오후 4시께 광주공원에 도착하자 이미 각지에서 몰려든 수천명의 인파로 공원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김씨는 곧바로 15명의 동료와 함께 계엄군이 매복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광주와 전남 화순 간 너릿재 터널로 향했다.
계엄군에 의해 폐쇄된 터널 입구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콩볶는 듯한 요란한 총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김씨는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 짧은 순간에 4명의 동료들을 잃어버렸다.
이날 저녁 시민군은 광주공원에서부터 도청을 포위하러 들어갔고 계엄군이 철수해 텅빈 도청을 '접수'했다.
노동청 사무소를 사수하는 임무를 맡은 김씨는 밤에는 경계근무를 섰다. 나머지 시간에는 각지에서 몰려드는 시신을 임시 안치장소인 상무관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았다.
"시체 썩는 냄새가 도청에 진동했지만, 당시에는 그게 싫지 않았습니다. 나도 언제든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저를 그렇게 무감각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가출' 사흘째인 24일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찾아 헤매던 어머니가 도청까지 찾아왔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라는 어머니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내 가족과 친구들을 지켜야 한다."라며 끝까지 남았다.
운명의 26일 계엄군이 곧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날 저녁 대다수 시민이 떠나고 40여명이 '기동타격대'라는 이름으로 남았다.
그러나 밤이 돼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김씨는 평소처럼 조원 6명과 광천동, 임동 일대를 순찰하기 위해 도청을 나섰다.
이튿날 새벽 공용터미널 인근 여인숙에서 동료와 잠시 잠을 청하던 김씨는 여명이 비칠 무렵 요란한 총소리에 눈을 떴다.
밖은 이미 군인들과 탱크로 가득했다. 김씨는 동료들과 도청 사수를 위해 진입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진압군에 쫓겨 달아나다 붙잡힌 김씨는 도청으로 끌려갔다. 도청은 이미 계엄군에 의해 진압돼 피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굴욕의 상무대 영창 = 27일 오후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간 김씨는 6개월 동안 끝없는 조사와 고문에 시달리며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뎌야 했다.
김씨가 수용된 작은 방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200-300명의 사람들로 가득해 생지옥을 연상케 했다. 처음 사흘 동안은 오직 물만 마실 수 있었다. 잠이 들면 밖으로 끌려나가 곤봉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도 '살기 위해' 견딜 수밖에 없었다. 끝없는 고문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조차 지키지 못하게 만들었다.
"젊은 혈기와 의기로 대의를 위해 순수하게 총을 들었지만 끝없는 고문에 목숨만은 부지하고 싶어 살려달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신군부의 정권 찬탈에 이용만 당하고 비명에 가신 5.18 영령들을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결국 징역 5년을 선고받은 뒤 그해 11월 형 집행 면제로 출소했다.
◇잊혀지는 5·18 = 김씨는 민주주의 같은 거창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가족과 친구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지만 5.18이 6.10 항쟁으로 이어지고 군사정권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점에 대해서는 "평범한 시민의 순수함이 민주주의를 위해 큰 역할을 했다."라며 대단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5.18의 숭고함이 점점 잊혀지고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5.18 30주년을 맞아 오월 정신을 되새겨야 할 때임을 강조하는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내실있는 행동을 해야 하고, 특히 당사자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절실하다."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출소 이후 조그만 회사에 취직해 평범한 삶을 살면서도 군부의 서슬퍼런 감시를 받아야 했던 김씨는 1986년 출범한 5.18구속부상자회 나주동지회(현재 회원 120여명)를 이끌며 유공자들의 복지를 위해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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