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쌍용차가 민주노총(금속노조) 탈퇴 조합원 총투표를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재적 조합원 3,508명 가운데 과반수인 2,642명(75.3%)의 투표와 1,931명(73.1%)의 찬성으로 금속노조 탈퇴를 가결했다.(<한겨레> 9월9일자) 반대가 264명, 투표용지를 받고도 기권한 조합원은 436명으로 집계됐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보수언론을 대변하는 <한국경제신문>은 “민주노총이 KT노조의 탈퇴와 함께 쌍용차까지 탈퇴함으로써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강성 민주노총이 조합원의 심판을 받게 됐기 때문에 이후에 진로를 고민해봐야 할 거다”는 충고까지 곁들였다.
반면 <한겨레>는 사설에서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에 대한 현장의 상반된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한 측면에서는 다수가 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며 또 한 측면에서는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이 제대로 투쟁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현장에서의 비판적 목소리가 높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거대한 투쟁이 일어난 이후 이 투쟁이 완전히 승리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반동으로 치달았던 사례들을 무수히 볼 수 있다. 1905년 혁명 이후 러시아의 정세가 그러했었고, 한국에서도 4.19 이후 5.16 쿠데타 정권의 등장이 이를 잘 말해준다.
반동의 도래와 함께 각종 진보적이며 혁명적인 운동은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된다. 1905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수많은 볼셰비키들이 차르 경찰에 의해 투옥되거나 학살되었다. 한국에서도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인혁당(인민혁명당) 등 많은 진보적인 세력들이 ‘빨갱이’로 마녀사냥 되면서 고문과 투옥, 처형당하기까지 했었다. 반동치하에서 대중들은 숨을 죽인 채 서슬이 퍼런 탄압의 칼날을 피하고자 발버둥질 칠뿐이다. 모든 저항과 단결은 모두 반체제, 반정부로 귀결되기 때문에 꼼짝없이 순응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역사는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반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는 또한 가르치고 있다. 1905년 이후 반동의 물결에 대하여 러시아 인민들은 1917년 혁명으로서 이에 응답하였다. 한국에서도 박정희 파쇼정권은 내부의 모순이 폭발하여 급기야 박정희는 살해당하고 그것이 80년 광주민중항쟁과 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8월6일 비록 공권력의 물리력에 밀린 결과이기는 했지만 회사쪽과 쌍용차지부는 대타협안을 체결했다. 말이 대타협안이지 사측의 요구가 거의 관철된 것이었다. 이 타협안 중에는 ‘민사상 문제와 관련해서는 회사의 회생계획과 맞물려 취하하고, 형사상 문제는 최대한 선처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합의안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공권력과 회사의 도발은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최소한 상집간부들에 대해서는 다음날까지 조합에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으나 몇몇을 제외하고는 바로 당일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리고 상집간부, 연대단위를 포함하여 7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속돼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민사상의 문제는 어떠한가. 8월6일 당일 5억 원을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에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조합원을 상대로 1백억 원대에 이르는 거액을 손해배상 청구한다고 했다.
대타협의 정신은 어디로 간 것인가? 대타협 대신에 현장에서는 숨 막히는 현장 통제가 뒤를 잇고 있다고 한다. 노동 강도는 파업 이전에 비하여 거의 두 배로 올라가서 화장실 가는 것조차 힘들다고 한다. 직장을 비롯한 관리직의 눈치를 보느라 연월차도 낼 수 없고 조퇴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가 얼마나 합법성을 가진 것이며 또 얼마나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것이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회사 쪽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는 반대표를 찍는 것이나 기권하는 것조차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에 대하여 ‘압도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맞지 않다. ‘잘해야’ 1,931표가 찬성표를 던졌을 분이고, 반대와 기권을 합하면 ‘무려’ 7백표나 된다고 표현해야 한다.
민주노총 탈퇴 쌍용차 투표결과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생각해야
민주적 절차를 따질 필요도 없이 정리 해고된 조합원과 투쟁에 참여했다고 해서 회사쪽의 강제휴업으로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조합원을 합한다면 회사쪽에 의해 강행되다시피 했던 탈퇴 찬반투표가 부결로 이어졌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투표 결과에 대해서 ‘반성’과 ‘비판’보다는 ‘현실’을 더 정확히 직시해야 하고 따라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얼마 전 민주노총을 탈퇴한 KT노조의 경우 탈퇴를 묻는 찬성률이 무려 95%를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쌍용차의 경우 사측과 용역의 철옹경비로 인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조합원을 제외하고서도 겨우 70% 정도에 턱걸이했을 뿐이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한쪽은 제조업이고 한쪽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물론 제조업의 경우에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강력한 노조를 유지했기 때문에 일정정도 타당성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핵심적인 차이는 대중 투쟁력에 있었다. KT는 그 내부에 민주노조운동을 지향하는 세력이 다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회사에 대한 대중투쟁으로 표출된 경우는 별로 없었다. 결집되지 않은 대중이 하나의 흐름에 편승해가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에 반해 77일간의 옥쇄파업을 포함하여 구조조정에 대하여 일관되게 대중투쟁을 조직해왔던 것이 쌍용차의 현실이다. 특히나 77일 투쟁을 거치면서 조합원들은 노조쪽과 회사쪽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그만큼 투쟁이 치열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결국 계급간의 투쟁은 혈연과 지연 등을 완전히 넘어서 새로운 질서 재편으로 귀결되었다. 어떤 계급의 입장에 선 활동과 투쟁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모든 조합원들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 바로 77일 전투였다.
조합원들은 어쩔 수 없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또는 어떤 경우에는 기꺼이 선택했다. 이 결집된 투쟁과 조직력이 핵심간부 대부분이 구속되어 있는 조건에서도 ‘정원투’를 조직하게 하였고 또한 회사쪽의 탈퇴공작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합원이 당해야 될 시련은 어찌 보면 출발에 불과할 수 있다. 정리해고된 조합원들은 당분간 실업수당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해고되지 않은 채 반대나 기권을 행사한 조합원들은 이후 회사쪽의 감시와 회유, 왕따 등에 또 어떻게 대처하면서 회사생활을 할 것인가?
1,931명의 절망이 아니라 700명이 희망이다
9월15일 관계인 대책회의가 열리게 될 것이고 여기에서 쌍차가 회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을 탈퇴할 수 있도록 집요한 공작을 펼친 것도 바로 이 관계인 집회를 겨냥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예상은 100% 회생에 대한 언질을 주기보다 회생을 전제로 더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뻔한 답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에 근거해서 현장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될 것이며 금속과 민주노총을 탈퇴한 ‘조합’은 저자세로 일관할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
상황이 이처럼 험난함에도 쌍차 조합원들의 저력을 믿는다. 엄청난 현장통제와 관리자들의 험악한 눈초리에 질려 그 앞에서는 찍소리 못하고 수그러들지라도 돌아서서는 ‘씨발’을 연발하며 분노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비록 생계가 너무 힘들어 건설 현장의 잡부로 일하고 노점에서 싸구려 1,000냥짜리 장사를 할지라도 정리해고자의 뇌리에는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각인될 것이다.
이것이 희망이다. 1,931명의 절망이 아니라 700명이 희망이다. 100억의 손배가 절망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조직되고 있는 정원투가 희망이다. 헬기와 살수차, 테이저건이 절망이 아니라 77일의 전투 속에서 살아있는 노동자로서의 투혼과 기백이 또한 희망이다.
2009년 9월 11일. 수원구치소 김혁
이에 대하여 보수언론을 대변하는 <한국경제신문>은 “민주노총이 KT노조의 탈퇴와 함께 쌍용차까지 탈퇴함으로써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강성 민주노총이 조합원의 심판을 받게 됐기 때문에 이후에 진로를 고민해봐야 할 거다”는 충고까지 곁들였다.
반면 <한겨레>는 사설에서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에 대한 현장의 상반된 비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한 측면에서는 다수가 탈퇴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며 또 한 측면에서는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이 제대로 투쟁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현장에서의 비판적 목소리가 높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거대한 투쟁이 일어난 이후 이 투쟁이 완전히 승리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반동으로 치달았던 사례들을 무수히 볼 수 있다. 1905년 혁명 이후 러시아의 정세가 그러했었고, 한국에서도 4.19 이후 5.16 쿠데타 정권의 등장이 이를 잘 말해준다.
반동의 도래와 함께 각종 진보적이며 혁명적인 운동은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된다. 1905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 수많은 볼셰비키들이 차르 경찰에 의해 투옥되거나 학살되었다. 한국에서도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인혁당(인민혁명당) 등 많은 진보적인 세력들이 ‘빨갱이’로 마녀사냥 되면서 고문과 투옥, 처형당하기까지 했었다. 반동치하에서 대중들은 숨을 죽인 채 서슬이 퍼런 탄압의 칼날을 피하고자 발버둥질 칠뿐이다. 모든 저항과 단결은 모두 반체제, 반정부로 귀결되기 때문에 꼼짝없이 순응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역사는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반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역사는 또한 가르치고 있다. 1905년 이후 반동의 물결에 대하여 러시아 인민들은 1917년 혁명으로서 이에 응답하였다. 한국에서도 박정희 파쇼정권은 내부의 모순이 폭발하여 급기야 박정희는 살해당하고 그것이 80년 광주민중항쟁과 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8월6일 비록 공권력의 물리력에 밀린 결과이기는 했지만 회사쪽과 쌍용차지부는 대타협안을 체결했다. 말이 대타협안이지 사측의 요구가 거의 관철된 것이었다. 이 타협안 중에는 ‘민사상 문제와 관련해서는 회사의 회생계획과 맞물려 취하하고, 형사상 문제는 최대한 선처하도록 하겠다’는 것이 있다.
하지만 합의안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공권력과 회사의 도발은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최소한 상집간부들에 대해서는 다음날까지 조합에서 업무를 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했으나 몇몇을 제외하고는 바로 당일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리고 상집간부, 연대단위를 포함하여 7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속돼 감옥에 갇혀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민사상의 문제는 어떠한가. 8월6일 당일 5억 원을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에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조합원을 상대로 1백억 원대에 이르는 거액을 손해배상 청구한다고 했다.
대타협의 정신은 어디로 간 것인가? 대타협 대신에 현장에서는 숨 막히는 현장 통제가 뒤를 잇고 있다고 한다. 노동 강도는 파업 이전에 비하여 거의 두 배로 올라가서 화장실 가는 것조차 힘들다고 한다. 직장을 비롯한 관리직의 눈치를 보느라 연월차도 낼 수 없고 조퇴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가 얼마나 합법성을 가진 것이며 또 얼마나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것이겠는가? 이런 상황에서는 회사 쪽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없는 반대표를 찍는 것이나 기권하는 것조차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치러진 선거에 대하여 ‘압도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맞지 않다. ‘잘해야’ 1,931표가 찬성표를 던졌을 분이고, 반대와 기권을 합하면 ‘무려’ 7백표나 된다고 표현해야 한다.
민주노총 탈퇴 쌍용차 투표결과에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생각해야
민주적 절차를 따질 필요도 없이 정리 해고된 조합원과 투쟁에 참여했다고 해서 회사쪽의 강제휴업으로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조합원을 합한다면 회사쪽에 의해 강행되다시피 했던 탈퇴 찬반투표가 부결로 이어졌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투표 결과에 대해서 ‘반성’과 ‘비판’보다는 ‘현실’을 더 정확히 직시해야 하고 따라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얼마 전 민주노총을 탈퇴한 KT노조의 경우 탈퇴를 묻는 찬성률이 무려 95%를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쌍용차의 경우 사측과 용역의 철옹경비로 인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조합원을 제외하고서도 겨우 70% 정도에 턱걸이했을 뿐이다.
그 차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한쪽은 제조업이고 한쪽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물론 제조업의 경우에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강력한 노조를 유지했기 때문에 일정정도 타당성은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핵심적인 차이는 대중 투쟁력에 있었다. KT는 그 내부에 민주노조운동을 지향하는 세력이 다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회사에 대한 대중투쟁으로 표출된 경우는 별로 없었다. 결집되지 않은 대중이 하나의 흐름에 편승해가는 것은 어찌 보면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에 반해 77일간의 옥쇄파업을 포함하여 구조조정에 대하여 일관되게 대중투쟁을 조직해왔던 것이 쌍용차의 현실이다. 특히나 77일 투쟁을 거치면서 조합원들은 노조쪽과 회사쪽으로 완전히 갈라졌다. 그만큼 투쟁이 치열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결국 계급간의 투쟁은 혈연과 지연 등을 완전히 넘어서 새로운 질서 재편으로 귀결되었다. 어떤 계급의 입장에 선 활동과 투쟁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모든 조합원들 스스로가 선택하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 바로 77일 전투였다.
조합원들은 어쩔 수 없이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또는 어떤 경우에는 기꺼이 선택했다. 이 결집된 투쟁과 조직력이 핵심간부 대부분이 구속되어 있는 조건에서도 ‘정원투’를 조직하게 하였고 또한 회사쪽의 탈퇴공작과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합원이 당해야 될 시련은 어찌 보면 출발에 불과할 수 있다. 정리해고된 조합원들은 당분간 실업수당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해고되지 않은 채 반대나 기권을 행사한 조합원들은 이후 회사쪽의 감시와 회유, 왕따 등에 또 어떻게 대처하면서 회사생활을 할 것인가?
1,931명의 절망이 아니라 700명이 희망이다
9월15일 관계인 대책회의가 열리게 될 것이고 여기에서 쌍차가 회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다. 금속노조와 민주노총을 탈퇴할 수 있도록 집요한 공작을 펼친 것도 바로 이 관계인 집회를 겨냥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예상은 100% 회생에 대한 언질을 주기보다 회생을 전제로 더욱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뻔한 답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이에 근거해서 현장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될 것이며 금속과 민주노총을 탈퇴한 ‘조합’은 저자세로 일관할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하다.
상황이 이처럼 험난함에도 쌍차 조합원들의 저력을 믿는다. 엄청난 현장통제와 관리자들의 험악한 눈초리에 질려 그 앞에서는 찍소리 못하고 수그러들지라도 돌아서서는 ‘씨발’을 연발하며 분노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비록 생계가 너무 힘들어 건설 현장의 잡부로 일하고 노점에서 싸구려 1,000냥짜리 장사를 할지라도 정리해고자의 뇌리에는 ‘공장으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각인될 것이다.
이것이 희망이다. 1,931명의 절망이 아니라 700명이 희망이다. 100억의 손배가 절망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조직되고 있는 정원투가 희망이다. 헬기와 살수차, 테이저건이 절망이 아니라 77일의 전투 속에서 살아있는 노동자로서의 투혼과 기백이 또한 희망이다.
2009년 9월 11일. 수원구치소 김혁
덧붙임
김혁님은 금속노조 미조직비정규국장입니다. 쌍용차 77일 파업투쟁으로 현재 수원구치소에 수감중이며 이 편지는 쌍용차 관계인 집회를 앞둔 9월 11일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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