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상식 뒤집어 봐요 시가 보이나요"
한겨레 | 입력 2004.04.16 07:16 글・사진 임주환 기자
[한겨레] ■ 구로노동자문학회 19번째 문학강좌
지난 13일 저녁 8시, 구로노동자문학회(구노문)에서는 제19회 문학강좌의 첫 강의가 열렸다. 문학회 사무실이 자리한 곳은 서울 구로구 가리봉 시장의 일명 야채골목. 길가에서는 쑥, 냉이, 달래 따위를 파는 상인들이 ‘떨이’라며 느지막이 장을 보러 온 이들을 붙들었고, 성미 급한 술꾼들은 그새 취기가 올라 서로 어깨를 밀쳐댔다. 좌판 위에 펼쳐진 봄 풋것들의 싸한 냄새가 저녁 공기에 실려 있었다.
초대시인 장석남씨・30여 청강생 경계 허문 뜻깊은 만남
20대부터 50대까지의 노동자, 학생, 가정주부 등으로 구성된 청강생들은 스무 평 남짓한 문학회의 강당을 가득 메웠다. 이들 30여명은 앉은뱅이책상 앞에 허리를 곧추 세우고 앉아, ‘작가와의 만남’에 초대된 시인 장석남(39)씨의 목소리에 귀를 모았다. 내달 14일까지 매주 화・금요일에 마련될 이번 문학강좌에는 시인 신경림・맹문재・유용주・오철수씨와 소설가 한창훈・박민규・천운영・방현석・전성태씨가 각각 ‘문학과 삶’, ‘광주항쟁세대와 문학’, ‘현장에서 글쓰기’ 등을 주제로 강의를 맡는다. “다들 목련꽃이 하얗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목련꽃의 빛깔을 붕대에 빗댄 시인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시인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목련이 질 때, 그 빛깔은 피고름이 배어든 붕대를 닮았으니까요.” 장씨는 한 시간 가량 자신만의 ‘시론’을 들려줬다. “시란 우리가 강요받아 주입식으로 배운 것들, 믿음・상식・도그마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내 사상을 남들도 알아볼 수 있게 이미지로 제시하는 것이 바로 시적 상상력”이라고 역설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몇몇 청강생들은 다리가 저려오거나 얇은 고무 깔판에 엉덩이가 배겨 불편한 눈치였다. 하지만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져있던 사람들의 자세가 풀어질 무렵, 시인과 독자들, 시인과 예비시인들 사이 마음의 경계도 허물어졌다. 강연 뒤에는 질문이 새로운 질문과 머리를 맞댔다. 자신을 텔레마케터 노동자라고 밝힌 김미숙(36)씨가 “시를 쓰게 하는 힘이 뭐냐”고 묻자, 장씨는 “재미있는 것부터 경건한 것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청강생들이 “문학적 내공을 키워줄 비결이 있느냐고 물을라 치면 “습작이란 한자 그대로 끊임없이 날갯짓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에둘러 갔고, “다른 시인들보다 시가 어렵고 까다롭다”고 몰아세우면 “나는 내 시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구노문은 민주화 열기가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던 1988년 6월, 노동자문학학교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90년대 이후 노동운동과 노동자문예운동이 일순 침체기를 겪었지만, 구노문은 이곳을 거쳐 간 400여명의 회원들과 더불어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켰다. 해마다 4~5월이면 문학강좌를 개최했고, 올 봄에는 지난 2년 동안 중단됐던 계간지 <삶글>도 복간시켰다. 문학강좌가 끝난 뒤 뒷풀이를 위해 강당을 정리하던 이만호 구노문 회장은 “이번 문학강좌 수강생들 중 많은 이들이 매주 1회씩 시와 소설을 번갈아 진행하는 문학회 정기모임에 참여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02)869-2583. www.tong.or.kr 글・사진 임주환 기자 ⓒ 한겨레(http://ww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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