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는 사람

“배고파서 시작…살다봉께 예술가 소릴 다 듣네요”

참된 2009. 3. 5. 04:11
“배고파서 시작…살다봉께 예술가 소릴 다 듣네요”

진도씻김굿 큰무당의 삶

 

한겨레 정대하 기자 김정효 기자2006-05-15 

 

 

 

» 당골 채정례씨가 전남 진도군 의신면 만길리 자택에서 흰 꽃술이 달린 신칼을 들고 무가를 부르고 있다.

 

 

 

 

세습무 채정례 할머니

 

무당의 삶엔 눈물과 한숨이 한데 섞여 있다. 그들은 가부장제 속에서 고단한 삶을 꿋꿋하게 이겨온 ‘어머니’였다. 그리고 사회적 차별 속에서도 소외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신에게 초연하게 아뢰었던 ‘사제’였다. 삶과 죽음의 끝없는 순환 속에서 망자를 보낸 산 자의 슬픔을 능청스러운 흥겨움으로 달래온 큰무당을 지난 5월1일 만났다.

 

 

사회적 차별에 굿판 멀리했는데
무당 언니 몸져눕자 당골로 홀로 서
“죽은 이 한 풀어주는 일” 보람 느껴
“남도굿 원형 고스란히” 영화·책도

 

 

“앙끄또(아무것도) 없어농께, 자식들 배고플까봐 시작했제….”

 

전남 진도군 의신면 만길리 집에서 만난 채정례(82)씨는 불청객들에게 서슴없이 굿 도구(무구)를 꺼내 보였다. 신칼과 정주(작은 종처럼 생긴 도구)는 수백년 된 것들이다. 채씨의 친정은 이 무구를 사용해 대대로 무업을 대물림해온 세습무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진도에서 꽤 유명한 당골(무당)이었고, 손위 세 자매도 무업을 이었다. 하지만 채씨는 “난 굿 안 하고 살라요” 하며 굿판을 부러 멀리했다. 당골에겐 나이가 많아도 누구나 말을 내릴 정도로 사회적 차별이 여전하던 시절이었다.

 

채씨는 열여덟살 때 지산면에 살던 함인천(80)씨와 결혼했다. 시가는 땅뙈기 한 평 없는 빈농 집안이었다. 홀로된 시아버지를 모시고, 어린 시동생까지 돌봐야 했다. 남의 집 일을 열심히 해주고 품삯을 받았지만,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들었다. 나락 한가마니를 얻어 오면, 일년 내내 일을 해야 했다. 참외도 팔아보고 엿장사도 했다.

 

가난에 찌들어 살던 50여년 전, 채씨는 우연한 기회에 굿판에 발을 디뎠다. 하루는 인근 마을 당골이던 언니가 울상이 돼 채씨를 찾아왔다. 언니는 “아이고, 어쩌야 쓰꺼나…. 일 볼 사람이 없다야. 한날 한꺼번에 세 건의 굿이 몰렸는데, 일손이 딸린다”는 것이었다.

 

채씨는 대뜸 “언니, 걱정 마. 내가 먼저 가 있을게”라고 말했다. 그는 걱정스런 얼굴로 쳐다보는 언니에게 “징, 쾅쾅 뚜들고 하면 뭔 소리 하는지 어떻게 안당가” 하고 배짱을 부렸다. 굿을 의뢰한 집으로 먼저 가, 종이로 신 모양의 형상을 만들고 굿상을 차리면서도 내심 걱정이 됐다. 채씨는 “다른 집 굿을 빨리 끝내고 언니가 도착하자 막 울어 부렀다”고 말했다.

 

그날 이후 그에게 굿은 생계의 수단이었다. 그래도 어렸을 적 어머니의 굿을 담 너머로 보았던 것이 큰 도움이 됐다. 채씨는 “어려서부터 뭔 소리든 도르라니(쉽게) 외웠을 정도”로 기억력이 남달랐다. 언니한테서 무가 사설을 다졌고, 남편 함씨도 장구를 배워 ‘잽이’로 동행했다. 채씨는 언니가 병들어 몸져누워 있을 때 한 망자의 씻김굿을 주재한 뒤, 당골로 홀로 섰다. 당시 굿판에 모인 사람들은 “아따, 당골 어매(엄마) 딸이어서 잘한다. 목청도 좋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때야 밭일하고 와서 혼자 애 낳고 했제.”

 

» 채씨의 친정에서 100여년 넘게 사용해 온 무구들.

채씨는 내리 두 아들을 잃고, 의신면으로 이사해 8남매를 낳았다. 굿일을 끝내고 곡식을 대가로 받아 머리에 이고 돌아올 때도 배 곯는 자식들 생각에 부끄러운 줄 몰랐다. 채씨는 “산후 조리도 못하고, 물팍(무릎) 꿇고 업져서 빨래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굿이 없는 날엔 농사일을 했다. 쉽사리 살림이 펴지 않았지만, “남의 집에서 헌 교복을 얻어다 줄이고 늘려서 입혀가며” 자식들을 모두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다. 채씨는 이웃과 나눠 먹기를 좋아하고 분별있는 처신으로 인심을 얻고 살았다. 하지만 채씨는 “자석들 중 한 명도 대학 물을 못 먹인 게 한이 된다”고 말했다.

 

채씨는 요즘도 가끔 굿판에 나간다. 과거처럼 꼭 돈 때문만은 아니다. 죽은 이의 한을 풀어 주고 부정을 깨끗이 씻겨 극락으로 보내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가끔 굿을 하다가 너무 서러워 눈물이 날 때도 있다. 재작년 전북 전주에 가 결혼 못하고 죽은 처녀·총각 8쌍의 저승 혼사굿을 하고 난 뒤 몸치가 났다. 채씨는 “소리도 내지 않고 우는 아버지의 얼굴을 봉께 어찌 눈물이 나던지…”라며 “집에 온 뒤 부모들이 ‘좋은 일 해줘 고맙다. 오래오래 사시라’고 전화를 걸어왔더라”고 말했다.

 

전라도에선 소리를 잘하고 멋진 춤을 추는 무당을 최고로 여겼다. 채씨는 타고난 목구성이 좋고, 굿 사설과 장단이 똑떨어진다. 선율과 시김새를 넣어 변형하는 무대 위의 굿과 다르다. 채씨의 굿은 “남도 굿의 원형을 가장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채씨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지 못했다. 채씨는 “진도씻김굿 보존횐가 뭔가 조직하면서 나만 (문화재에서) 쏙 빼부렀다”고 불편한 심기를 토로했다.

 

“살다봉께 요런 세상도 다 왔소. 나보고 ‘살림하는 예술가’라고 항께….”

 

그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와 영화도 만들어졌고, 그의 삶을 구술로 담은 책도 나왔다. 채씨는 “외국인들이랑 박사들 앞에서 굿도 해보이고 강의도 했다”고 말했다. 채씨는 수년째 5명의 여성에게 굿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내가 죽어불면 (굿을) 흘 사람이 없당께, 기를 쓰고 갈친다”고 했다. 서울에서 판소리를 하는 채수정(35·이화여대 박사과정)씨는 아끼는 제자 중 한 명이다. 이제 제자들도 웬만한 굿은 채씨의 도움 없이 능숙하게 할 정도가 됐다. 채씨는 “막 좋은 세상 살 만하니까 죽음을 앞에 둬 억울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몸에 고름이 차 죽음 문턱까지 갔다가 수술을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채씨는 ‘혹 아직 못 이룬 소망이 있느냐’고 묻자, 빙그레 웃으며 “내가 요렇게 생겼응께, 다음 시상엔 제일 이쁘게 태어나고 싶다”며 담배 연기를 허공에 ‘훅’하고 날려 보냈다.

 

 

진도/글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굿은 우리 삶속 살아있는 문화”
이경엽 목포대 교수 “전통문화예술 기반…종합 보고서 절실”

 

 

“굿이 미신이고 이상한 것이라는 편견이 바뀌어야 합니다.”

 

목포대 이경엽(43·국문학·사진) 교수는 “굿은 우리 삶 속에 살아 있는 문화”라고 말했다. 죽음은 계속되고,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굿은 현대에도 맺힌 것을 푸는 종교적 의례”로서 문화적 수요가 여전하다. 망자의 넋을 씻기는 ‘곽머리굿’이나 여러 조상의 혼을 초청하는 ‘날받이굿’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전라도에선 혈연을 통해 무업을 대물림해온 세습무가 굿을 주재했다. 중부 이북에서 신을 받은 강신무가 무속의례를 수행했던 것과 다른 점이다. 이 교수는 “(사제자였던) 당골들은 모성을 통해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지녔다”고 말했다. 또 “이들 세습무계와 굿은 또한 판소리 등 전통문화예술을 낳은 기반이면서도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우리 전통적인 신분 관념 때문에 세습무를 마냥 붙잡아 둘 수 없었다”고 말했다. 동해안의 별신굿, 경남 남해안 통영 일대, 호남 지역에서 세습무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정도다.

 

이 교수는 “문화재 지정 제도가 지역의 다양한 굿 문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며 “전국 세습무와 굿의 실태를 파악해 자료로 정리하는 종합적인 굿 보고서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기사등록 : 2006-05-15 오후 09: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