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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예술 비판적 수용자 길러내야
김영찬=오랜만입니다. 이 선배의 많은 책들을 다시 읽다보니 글을 쓰는 데 얼마나 고생했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함께 토론도 한 사이지만, 대담을 위해 꼼꼼히 뒤져 보았더니 참 책을 많이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영미=내가 생각해도 무리하게 일을 했어요. 91년 첫 평론집 낸 뒤로 거의 1년에 한 권씩 책을 쓴 셈이죠. 마흔까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 먹었는 데 약속은 지킨 것 같아요. 하지만 양에 대한 욕심은 많이 줄었고, 덜 쓰더라도 좋은 책을 많이 내려합니다.
김=<한국대중가요사>를 포함해 근래 이 선배의 저서들은 80~90년대 문화현장의 생생한 체험과 고민을 체계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난 시기의 한 매듭을 지었다는 점에서 감회가 남다를 듯합니다. 또 죽 지켜봤던 저로서는 미처 정리되지 않은 부분들에 대한 짐도 좀 있을 것 같습니다.
이=<한국대중가요사>를 쓰고난 뒤 홀가분한 느낌도 들었지요. 하지만 과거에 아쉬움이 남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남아요.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내 경험이나 우리 현상을 설명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80년대 이후 민족극의 작품·작가론, 예술문화운동 조직활동사나 민중가요사와 작품·작가연구는 정리할 시간을 놓쳤어요. 주제자체가 2000년대 관심권에서 멀어지면서 이론적 정리작업이 외면당하는 상황에 온 게 아쉽습니다.
김=90년대 문화비평은 80년대의 좌절을 맛본 운동가들이 대중문화쪽으로 눈돌리면서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80년대의 문제의식과 실천적 관심을 지금까지 견지하며 대중문화 비평의 틀 속에 녹이려 한 이 선배는 좀 특이한 부류 같습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견지해온 당신의 문제의식은 무엇입니까.
이=나는 항상 `~~이어야 한다'이기 보다는 `~~이다'라는 사실 자체를 굉장히 중요시해왔습니다. 섣불리 방향을 제시하라는 식의 주문을 싫어해요. 방향성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무엇인가 먼저 설명해야 어떻게 하느냐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는 것이지요.
90년대 대중문화 연구의 활성화는 80년대 정치, 경제에서 90년대 문화일상으로, 즉 인식에서 욕망으로 관심이 이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80년대 다른이들은 후자쪽의 측면을 무시했지만 나는 그 두가지 관계 자체에 원래 관심을 두고 있었거든요. 80년대 주류인식으로 보자면 나는 주변적이고 탈중심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를테면 민중가요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가 방송의 `가요톱텐'에 올라간다고 문제가 해결될까요. 권력을 잡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런 구조나 체계가 어떻게 변화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대중가요와 민중가요의 관계도 제로섬게임처럼 서로 소멸시키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존재하고 영향을 미침으로써 노래문화 전체를 어떻게 역동적으로 발전시킬까의 구조에 천착하는 거죠. 가요의 경우 민중가요의 경험이 있어 90년대 저항적 록으로 대별되는 인디음악의 구조가 가능했던 겁니다. 실제로 민중가요 운동가 출신들은 지금 대부분 인디음악 유통을 담당하고 있어요. 또하나 저를 특징지우는 건 당대를 좌우하는 중심적인 이론에 별로 휘둘리지 않는 특성을 지녔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외국이론을 별로 안쓴다는 지적이 그런 건데, 난 이론이 옳거나 권위적이므로 그 이론에 관심을 기울여야한다는 식의 방법론을 취하지 않습니다. 내가 실천속에서 이 문제 푸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내 논리의 발전을 위해서, 그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이론 때문에 관심 갖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내 사고방식은 귀납적인 쪽입니다.
김=연극과 대중가요비평을 동시에 하고 있고 저서 역시 일반연극과 민족극, 대중가요, 민중가요 등을 아우르고 있는데, 그런 영역을 한데 이어주는 고리 또는 접점이 있습니까.
이=한마디로 말하면 언어예술이고, 다른 말로 하면 문학인데요. 나는 문학연구자로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언어를 매체로 하는 예술을 얘기할 때와 문학을 얘기할 때 뉘앙스가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올라운드 플레이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실제로 난 시각예술이나 무용, 풍물 등에 대해서는 평론을 하지 않습니다. 대중음악평론가라는 명칭도 맞지 않죠. 노래를 분석하고 비평하려면 가사와 음악이 어우러진 전체를 고려해야 하는 게 내 생각이고 이런 전제아래서만 음악이 고려사항으로 들어옵니다. 향가 고려가요 시조가 원래 악곡이 붙은 노래였잖아요. 말로 전달되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저는 구비문학, 연극, 노래, 방송극, 극영화를 비롯해 심지어 최불암, 사오정시리즈 같은 넌센스퀴즈까지도 다 문학이라고 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서민적이라는 것도 제 관심과 통하지요.
김=제도권 대중예술문화에 비해 비제도권적인 민중가요 민중극이 가진 잠재력은 무엇인가요.
이=80년대 문화운동쪽에서 활동하면서 이른바 비제도권이라고 말하는 영역의 존재가 대중예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깨달았지요. 이런 장르들은 제도권 장르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변화를 몰고옵니다. 나는 마당극처럼 서구 근대극과 원리가 다른 장르에 주목했어요. 우리는 이제 서구 비서구를 아우르고 전문창작자가 아니라 비전문창작자 수용자까지 아우르는 예술이론이나 문예학을 꿈꿀 때가 됐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의 연구는 일종의 커밍아웃이라고 봐요.
김=요즘 대중예술은 신자유주의적 지배이데올로기가 보통사람들의 생활정서, 욕망과 한데 녹아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80년대 대중예술과 90년대 대중예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근본적으론 변화가 없다고 봐요. 90년대에는 80년대 비제도권의 진보적 예술의 성과와 역량을 흡수해 저항성과 진보성을 얘기할 수 있는 다분화된 대중예술작품들이 늘어났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서태지가 <발해를 꿈꾸며> 같은 현실참여적 가요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나 다양한 젊은 영화의 약진이 그런 사례지요. 그러나 대중문화의 자양분이 되는 비제도권 예술들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은 문제입니다. 70~80년대보다 똑똑해지고 개성이 다양해진 수용자의 안목을 높이기 위해 비제도권에서 또 딴짓을 해야하는 데 그걸 못하고 있는 겁니다.
김=사실 그 가능성이 높아보이진 않아요. 이 대목에서 비제도권 예술을 강화시킬 대안이 궁금해집니다.
이=수용자교육과 수용자네트웍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용자가 변하지 않으면 서민들의 대중예술은 변하지 않아요. 민중가요사 흐름을 보면 70년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 조직적 노래운동 없이 존재했어요. 대중이 먼저 독자적 노래문화를 만든 겁니다. 운동가들의 선도성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예술을 만드는 건 선도적 창작자에 의한 것만은 아닙니다. 이런 맥락에서 수용자교육과 네트워크는 대중예술이 가지고 있는 맹목성에 어느정도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 문화생활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주체로서의 문화수용자를 만드는 활동입니다. 문화모니터 비평모임 같은 수용자들끼리의 네트워크나 비평가, 이론가들의 재교육이 필요합니다. 특히 중고생 대상으로 대중문화의 올바른 수용태도를 가르치고 조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김=시간가는 줄 모르고 얘기했네요. 앞으로 또 어느쪽으로 건너뛸 생각을 하고 있는 지요.
이=다음 단계로 가려면 다시 넓이뛰기를 해야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언어가 있는 한국의 대중예술이 어떤 양상과 원리를 갖는지를 일반론으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먼저 대중가요사를 대충 정리했고요, 지금은 텔레비전 드라마 담론쪽으로 옮겨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어요. 그러나 옛 녹화본도 거의 없고 자료수집이 너무 어려워 한참 고생해야할 것 같아요. 지금 방영되는 드라마를 열심히 보며 감각을 회복(?)하고 있습니다(웃음). 정리/노형석 기자nuge@hani.co.kr 사진/서정민 기자westmin@hani.co.kr
이영미는 누구?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남. △1981~85년:고려대 국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 졸업. △1983년부터 부정기간행물 <노래> 동인으로 활동. △1989~94년 민족극운동 이론비평모임인 `민족극연구회'에서 활동. △1994~현재: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연구위원. △저서:<민족예술운동의 역사와 이론>(한길사, 1991), <노래이야기주머니>(녹두, 1997), <재미있는 연극 길라잡이>(서울미디어, 1994), <서태지와 꽃다지>(한울, 1995), <이강백 희곡의 세계>(시공사, 1998), <마당극 양식의 원리와 특성>(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1996), <마당극·리얼리즘·민족극>(현대미학사, 1997), <한국대중가요사>(시공사, 1998) 등 다수.
이영미가 말하는 이영미
어릴 적 나는 TV에 코를 박고 살았다. 언니 덕분에 열살부터 송창식·김민기의 팬이 되었고 하이틴이 되면서 연극을 봤다. 대학 가서는 극회 활동을 하며 남들처럼 루카치, 하우저, 백낙청을 읽었는데, 이공계 분위기의 집안 탓인지 예민한 문학청년들은 싫어하는 조동일의 도식적이면서도 담대한 분석 또한 꽤 흥미로웠다.
난 국문과 학생이면서도 시보다 말로 된 문학, 즉 구비문학이나 방송극, 노래 가사, 넌센스퀴즈, 연극 같은 데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운동권 부근에 있으면서도 정세분석보다는, 새 세상에서 예술문화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혹은 왜 요즘 음울한 단조의 노래가 유행할까 등의 '이상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결국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마당극·민중가요 등을 연구하고 싶어 노래운동·연극운동 하는 사람들과 10년을 붙어다녔다. 나의 '현장'에 있기 위해 박사과정도, 취직도 포기했고 10년 동안 원고료만으로 먹고살았다. 그 시간은 내게 새로운 생각거리와 할 말을 만들어주었고, 생계형 글쓰기는 글에 대한 두려움을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리고 서른 즈음, 노동가요 대중성 논쟁을 하면서 석사논문 `1920년대 대중화논쟁 연구' 때부터 내가 대중성을 화두로 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나의 주 관심대상은 서민들의 언어예술이다. 마당극이나 방송극이나 민중가요나 다 그런 것들이다. 그렇게 보자면 나는 결국 문학연구자이지만 시·소설 중심의 문학관으로 보자면 아니라고 여겨질 것이다. 나는 여태껏 문학연구 바깥에 버려져있던, 시시껍절해 보이는 것들에 대한 연구가, 문학과 예술에 대한 근본적 관점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문예학의 굵은 줄긋기를 다시 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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