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가수 지민주님

길 그 끝에 서서 지민주

참된 2008. 4. 26. 05:38

지민주님의 길 그 끝에 서서     http://plsong.com/xe/4467(출처 피엘송닷컴)

 

 

 

 

길 그 끝에 서서

 

글  박현욱

곡  지민주

편곡  마구리밴드


우리 앞에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제대로 걸어온거야
언제나 길의 끝에 섰던 사람들이
우리가 온 길을 만들어 온것처럼
눈 앞에 빛이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의 시간이 온거야
먼저 간 사람들의 빛을 따라 온 것처럼
이제 우리가 스스로 빛이 될 차례야
이제 끝이라고 희망은 없다고
길을 찾을 수 없어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숨 쉬고 절망 하지마
그건 우리가 옳은 길을 걸어온 걸 확인하는거야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그렇게 왔잖아 우리 당당하게 이제 진짜 우리의 시간이 온거야

이제 끝이라고 희망은 없다고
길을 찾을 수 없어 빛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숨 쉬고 절망 하지마
그건 우리가 옳은 길을 걸어온 걸 확인하는거야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그렇게 왔잖아 우리 당당하게 이제 진짜 우리의 시간이 온거야
이제는 우리가 길을 만들 차례야 이제는 우리가 빛이 될 차례야
그렇게 왔잖아 우리 당당하게 이제 진짜 우리의 시간이 온거야

 

길 그 끝에 서서는 지민주님의 2집 길 그 끝에 서서라는 노래집에 들어있는 곡이다

 

 

노동가수 지민주    ⓒ 전문수 기자  월간 말
 
 

 

 

 

동지들의 사랑으로 노래부른다.

[월간 말_인터뷰] 노동가수 지민주

현석훈 기자     민중의 소리
 
“긴장 많이 했어요. 어찌나 떨리던지. 우리는 동원된 인원에 익숙하잖아요. 얼마나 올 지도 모르겠고...... 두 시간을 노래할 수 있을까 고민도 됐어요. 하필이면 공연 전날 위가 꼬여서 몸 상태도 최악이었는데, 많이 와 주셔서 정말 행복 했습니다.”

얼마 전 첫 콘서트를 열었던 노동가수 지민주 씨를 만났다. 그녀가 만 명, 2만 명 앞에서 주먹 불끈 쥐고 열창하는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다소 의외일 수도 있겠다. 그녀가 긴장했었다니, 단독콘서트가 부담스럽긴 했었나 보다. 자신의 존재를 빈 객석이 말해주니까. 다행히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보조의자도 동났고, 계단까지 관객으로 가득 메워 졌다.
“콘서트에 오셨던 분들 평균연령이 40대 초반이었어요. 마음이 찡 했습니다. 화물연대는 부안에서 버스까지 대절해서 올라왔어요. 덕분에 경찰이 출동하는 헤프닝도 있었어요. 집회만 문화가 아니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왜 진작 이런 문화를 만들지 못했을까 반성도 됐어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는데…”
13년 만에 처음 콘서트를 연 지민주 씨는 공연장을 방문해 준 나이 많은 관객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박수를 언제 쳐야 할 지 몰라 고민하던 사람들이 자신과, 무대와 일치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보람도 느꼈을 터이다. 늘 현장에서, 집회장에서 만나지만 조금 더 가까워지고,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가 그리 많지 않은 까닭이다.

지민주 씨에게 이번 콘서트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2002년에 성대결절로 수술을 했던 터라 2시간이 넘는 공연을 혼자 소화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는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2002년 6월에 성대결절로 수술을 했었어요. 사람들이 그 돈으로 성형이나 하지 무슨 수술이냐고 농담 삼아 건네는 말이었지만, 걱정을 많이 했었어요. 한달에 30회 이상 공연을 해야 하고, 좋은 음향도 없고. 땡볕에 모래바람에 노래를 해야 하니 관리가 되겠어요? 게다가 모아놓은 돈도 없고 산재를 받을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요. 우리는 대한민국 직업에서 백수로 구분된다고 하더군요.”

성대결절. 가수들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직업병이다. 얼마 전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한 ‘청계천8가’의 가수 권혁민 씨도 성대결절 이후 한참동안 노래를 하지 못했다. 학창시절 ‘강철모가지’라는 별명을 가졌던 지민주 씨에게 성대결절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수술 이후 목소리가 바뀔 수도 있고, 아무리 연습한다 한 들 예전과 같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천직으로 여겨 왔던 노래를 더 이상 부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쉽게 믿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수술비도 없었던 지민주 씨에게 믿을 수 있는 것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었다.
“사실 살면서 가장 감동받았을 때가 이 때였어요. 인터넷에 사연을 올렸는데, 전국에서 돈을 보내 줬어요. 일주일 만에 2백만 원 쯤 모았어요. 물론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솔직히 안 들어 올 줄 알았거든요. 수술 받고 제주 민주노총에 전화를 걸어 요양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제주 농민회에서 별채를 빌려주셨어요. 정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언젠가는 갚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괜찮습니다. 무리하지만 않으면 돼요.”
공연 일정을 물었더니 1년에 300번이 넘는다고 했다. 무리하지 않는다 했지만 길거리 앰프로, 방송차 음향으로 온갖 먼지를 다 삼키는데 무리가 가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노동가수 지민주’라는 말을 좋아하는 지민주 씨에게 공연은 바로 현장을 의미했다.
“예전에 삼호중공업에 초청공연을 간 적이 있었어요. 용역경비가 정문을 막아 나서서 몸싸움 끝에 들어갔어요. 회사측에서 무단침입으로 고소하더군요. 경찰서 가서 조사받고 왔어요. 노조측에서 미안했던지, 다시 초청을 하더군요. 노조위원장 이취임식 자리였는데, 삼호중공업 사장이 자리에 참석했어요. 사측에서는 왜 지민주를 불렀냐며 매우 불쾌해 했는데, 제가 무대에서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무식하게 대응하는 곳이 없다.’고 했어요. 하고 싶은 말 다했죠.”

노동가수 지민주
ⓒ 전문수 기자    © 월간 말
물론 조합원들이 좋아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지민주 씨가 다시 삼호중공업 무대에 서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잘못되진 않았다. 밀고 재는 것이 딱 질색인 그녀다. 하지만 여전히 고민은 남는다.
“함께 투쟁하고 함께 간다는 생각을 늘 해요. 하지만 남들은 마무리 집회도 하고 함께 정리는 하는데 전 낄 데가 없잖아요. 난 추운데, 공연하면서 ‘당신들은 춥지 않아’ 이렇게 말하잖아요. 공연은 하지만… 정작 저는 추워서 돌아오게 되는. 외롭죠.”
소외로 인한 외로움은 아닐 것이다. 대중가수는 ‘팬’들의 사랑을 받고 살지만, 민중가수는 ‘동지’들의 사랑을 받고 산다. 그것이 존재의 이유다. 음반시장의 불황은 민중가요 역시 영향을 미치긴 하겠지만, ‘민중가요’라는 시장이 존재 했었는가 반문해보면 딱히 불황 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애초 시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민중가요’, ‘노동가요’를 지속적으로 보급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선물은 앨범을 구매해서 듣는 일이다. 적어도 같은 곳을 보고있다는 이유만으로.

‘노동을 하는 현장은 터지거나, 강제로 끌려 나오거나, 관제탑에 올라가거나, 맞거나, 구속되거나, 그런 현실밖에 없는 거 같습니다. 그래도 어떡하겠습니까, 싸워야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이 척박하고 눈물 나고 소름끼치는 그런 현장일지라도 그 노동의 현장을 지키고, 그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여기 앉아계시는 많은 동지들을 사랑합니다. 제가 지금 부르는 노래는 노동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입니다. 살아남으셔서 끝까지 열사들이 바라는 세상 우리들이 그렇게 만들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 지민주 첫 번째 콘서트 중 -’
그녀의 첫 번째 콘서트.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죽지 마세요.’ 다. 눈물 나고 소름끼치는 노동현장이 있고 끝까지 투쟁하는 사람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녀 역시 포기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척박한 노동의 땅. 그리고 그것에 못지않은 척박한 문화 환경. 끝이 보이지 않는 외로움을 겪으면서 꾹 참고 ‘당신들은 춥지 않으니 살아남아 달라’고 마음을 나눠줄 줄 아는 그녀의 모습이 눈물이 나도록 아름답게 느껴진다.

무대와 앨범은 가수들에게 가장 근본이 되는 삶의 터전이 되고, 때로는 현장에서 투쟁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대장장이’를 각별히 보필해야 한다. 병사들의 목숨을 건져줄 ‘갑옷’과 무기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분노와 슬픔, 고통과 좌절. 하지만 살아가야 하는 이유. 그것을 노래로 표현하고 화두를 던져주는 ‘대장장이’를 아끼고 사랑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찾아가는 공연하고 싶어요. 천막농성장에 조그만 앰프 하나 들고 가는 작은 공연들을 하고 싶네요. 이르면 가을부터 진행해 볼 생각이예요. 내년 여름쯤 앨범도 하나 낼 생각이고요.”
콘서트를 마친 지민주씨는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콘서트가 외도 였는지 모르겠다. 인터뷰 내내 그녀의 표정이 밝았다. 콘서트에서 관객들 보다 더 많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외도가 잦으면 잦아질수록 거꾸로 현실은 조금씩 바뀔 것이다.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질 것이고, 그들은 절대 죽지 않을 테니까.
ⓒ월간 말
 
 
 
아래는 지민주님의 누리집 삶의 노래로 함께하는 노동가수 지민주!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이거 팔면 얼마 남아요?  지민주
(2008-04-26 01:49:57, Hit : 3, Vote : 1)

"이거 팔면 얼마 남아요?"
음반을 보다가 한 사람이 물어본다
"네 아주 많이 남아요^^ 노동가수가 더 많이 생기구요.
노동가요도 많이 보급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좋은 곡들을 들을 수가 있구요
동지들이 힘들때 위로를 해줄 수도 있구요.힘도 드리지요
무엇보다 우리 문화노동자들에게 끝까지 이 길을 갈 수 있게하는 동지들의 마음이
가득 남지요^^"
이렇게 얘기하면 될것을....그런데...난 이미 너무 아파버렸다

나는 가끔 현장에서 음반가판을 한다
내 음반이랑, 여러 동료가수의 음반이 대부분인데 긴박감에 있는 집회보다는
문화제나 조합원 총회같은 좀 여유가 있는곳에 가판대를 설치하고 판매를 한다
그런데 가판을 하면서 요즘들어 이런 저런 생각이들어 마음이 좀 심란하다
얼마전 한 문화제에서 음반 가판을펼치고 그곳 동지에게 사회보는 분께 얘기 좀 해달라고 부탁을했다. 당시 그 문화제에 참가할 조합원들의 리허설이 진행중 이었지만 내 판단에는 부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노동가수 지민주동지가 무대 옆에서 음반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민주 동지는 음반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기 때문에 우리가 도와 드립시다"
아...이렇게 마이크에 대고 얘기를 한다
순간 주위에 있던 동지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이다
"그렇게 힘들었어?"
"이거 다 팔아 주면 되는거예요?"
거기다 함께간 동료가수도 한마디 거든다
"그렇게 구차하게 음반팔아서 뭐하냐? 그렇게 해서까지 동지들 돈을 벌어야겠냐?"
물론 농담반으로 한 얘기였겠지만..나 웃으라고 한 얘긴건 알았지만..
그때 난 너무 힘이 들었다
다른 동료 가수들 음반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다닌건 그거 팔아서 내가 뭐 남기는 것도아니고, 이 노동문화판, 특히 음반의 유통이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현장의 동지들과 어떻게라도 한번 음반으로 만나게 하고 싶었던 목적이 가장 컸는데...사람들은 그저 장.사. 라는 것 밖에 안보았나 보다

음반이라는걸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얘기를 하고 싶기때문이다
자신의 음악을 통해 세상과 교감하고 싶어서이다
그런데 만들긴 했는데 교감할 방법이 없는게 노동가요 음반시장?의 현실이다
시장? 그래...시장이라는 말붙이기가 민망하다
어디 사고 파는곳이 있어야 시장이 형성되는게 아닌가 말이다
빚까지 내가면서 음반 만들어놓고 유통망이 없어서 박스째 잠자고있는 노동가요 음반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글을 보는 분들은 모를것이다
수 없이 많은 날들을 고민과 창작으로 고생하면서 낸 자식같은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인 음반이..세상에 나오자마자 갈 곳을 못찾아 아직도 작업실이나 집 한구석에 쌓여있다
그래서 시작했다
나라도 세상과의 만남을, 동지들과 직접 만나 우리 노동가요를 전하고 싶었다
음반을 낸 동료가 있으면 먼저 연락을 하고 그들과 유통고민도 함께 하면서 음반 가판이란걸 한지 7년 째이다
물론 언제나 내가 웃고있고 힘차게 사람들을 만나려 노력은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조합원-"이거 하나사면 다른거 끼워주나요?"
나-"안돼요 이건 제 음반들이 아니어서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조합원-"피~~~이거팔면 얼마 남아요?"
나-"그런거 없어요"
조합원- "거짓말 하지마요 남는것도  없으면서 왜 남의 것을 팔아요?"
나-"저기요 그냥.....가세요"(꾹~ 참고 있지만 이미 화가 나있는 상태임..장사는 무슨...)

위에 쓴말 진짜 있었던 일이다
그것보다 심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경우엔 좋은 얘기도 해주시고 관심도 가져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얼마전 문화제의 말들처럼 아직도 난 가판을 하면서 가끔 힘이든다

그런데..생각해보니 그 사회자분의 말이 틀린건 아니었다
가수가 음반을 내면 그것으로 먹고 살 수 있어야 하는게 맞는데.나조차 그 말이 처량하게 들린건, 그렇게 세상과 만날 통로들이 다 막혀버린 노동가요 음반의 현실, 아니 노동문화의 현실이 너무 막막해서가 아니었을까?
길이 보이지않으면  내가 만들면 된다는 마음으로 달려왔고 빛이 보이지 않으면 내가 빛이 되면 된다는 마음으로 힘들지만 꾸준히 해온 음반가판대는 내가 할 수있는 또다른 노동문화 살리기였다

그런데...
요즘은 그 길도 자꾸 좁아져가고
그 빛도 점점 희미해져간다

동지들의 사랑으로 노동가요 음반을 살리고싶다
투쟁의 현장에서 힘이되고 절망의 공단에서 희망이 되었던 노동가요...
점점 사라져가는 노동문화 동지들의 손을 이제는 잡아야 되지않을까?

그날 문화제를 마치고 난 후  나는 심한 몸살이 들었다
날씨가 많이 추웠지만 분명한건 그 날씨 때문에 내가 아픈건 절.대.로. 아니었다

 

 

 

 "지민주동지! 약 타가세요^^"  지민주
(2008-04-18 03:00:08, Hit : 38, Vote : 4)
"지민주동지! 약 타가세요^^"
동지? 동지라...약을 주는 사람이 나한테 동지라고 하니까..기분이...막 좋아졌다

코스콤 비정규노조 촛불문화제에 갔던 날이다
요 근래 위가 많이 아파서 죽으로 연명? 하며 흐믈거리고 살고 있었는데 코비에 가니 민의련 한의사 분들이 오셔서 진료을 한다고 했다
그래.이참에 나도 스윽~~끼어서 몸 상태 점검을 받아야지...
장투 동지들이 들어갈 천막에 냉큼 들어가.. 그것도 특혜를 받아 맨 처음으로 진맥을 받았다
솔직히 한의원에는 거의 가본 기억이 없었고 이렇게 차가 쌩쌩 달리는 천막안에서 진료를 받으니 기분이 이상하기도했다

"제가 위가 좀 아파요..그래서 죽만 먹고..기운도 없고.."
기회다 싶어 좔좔~~~~얘기를 해댔다
의사가 얘기한다
" 맥이 아주 잘 뛰네요. 아까보니 노래도 씩씩하게 하시던데..일단 침을 놓아드리죠"
컥!! 침이라니!!!
내가 너무 무서워 하는 주사과의 그 뾰족한...무서워서 귀도 못 뚫고있던 내가
벌벌 떨면서 침을 맞았다.
10분정도 있어야해서 천막 구석에 누워 다른 동지들의 진료 모습을 보는데 맘이 싸해진다

"허리가 너무 아파요...야전침대에서 자서 이렇게 복대를 하지 않으면 오래 앉아있기도 힘들어요"
"기운도 없고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고..약 좀 지을 수 있을까요?"
"야!000동지 빨리 잡아와...아프다고 그랬는데 병원가기도 힘들잖아 꼭 끌고와"
동지들의 그 소리에는 200일이 넘는 천막농성의 한숨과 고단함도 같이 묻어나온다

침도 빼고 천막을 나오려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민주동지! 약 타가세요~~~"
동지? 아! 그래 동지다
어느 병원에서도 약국에서도 들어본적이 없는 동지라는 말에
잠시 그 한의사의 얼굴을 쳐다봤다
약봉투에는 지민주동지라는 내이름이 또박또박 쓰여있다
약을 타들고 천막을 나오는데
뭔지 뿌듯함과 희망도 느껴진다
그래.. 세상에 동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자꾸 늘어날수록  희망도 그 양만큼 늘어나는건 아닐까?

힘들게 싸우고 있는 동지들의 또 다른 중심을 세워주고 버텨나가게 해주는 힘을 주는
민의련 동지들...감사합니다
의사가 왔다는 말에 냉큼 들어가 내 건강을 챙기려했던거보다
내 마음이 이렇게 더 많이 치유가된건 동지의 이름으로 진료하고 걱정해준 당신들 때문인것 같습니다

위는 어떻냐구요?
오늘 저는 고기반찬을 오랜만에 먹었습니다
그것으로 대답은 충분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