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호명 할아버지(6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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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에 두고 온 누이 - 칠순의 투사 유호명 할아버지
회원 이야기 마당 - (서울)
송태영(전태일문학상 수상자) / 2007년10월31일 19시11분
위 사진과 아랫글은 참세상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유호명 할아버지(69세)를 만나기 위해 난생 처음 국방부를 찾아갔다. 이날 새벽 배형규 목사에 이어 심성민 씨가 탈레반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방부 민원실 앞에선 평통사 주최 <제70차 평화군축 집회>가 열렸다. 아프간 사태 때문인지 몇몇 외신들이 집회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맞은편 전쟁기념관 정문 너머 전투병의 동상이 보였다. 집회는 점심시간에 맞춰 한 시간 가량 진행됐다. 이글거리는 뙤약볕으로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나이 드니까 예전 같지 않고 몸이 잘 안 따르지. 힘들어서 이런 운동 이제 그만하자는 생각도 드는데, 일이 생기면 나도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이 절로 생겨.” 할아버지는 지기이자 동지라고 일컫는 한상준(71세)과 함께 최루탄도 많이 맞고 경찰서 유치장도 많이 끌려다녔다. 서울에서 안 가 본 경찰서가 드물다. 집회가 있으면 만사 제치고 참여한다. 그를 만나기 위해 오늘만도 두 건의 집회에 참가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다음날도 미 대사관 앞 기자회견장에 얼굴을 내밀었다. “1989년에 임수경이 텔레비전에 나오던 때야. 한참 통일 바람이 불던 때였잖아. 그때 일하던 중에 우연히 TV를 보는데 임수경이가 ‘우리는 하나다.’라고 부르짖고 어릴 때 뛰어놀던 대동강, 모란봉, 평양시가지가 나오는데 누님 생각이 나면서 충격을 받았지. 그래서 연세대학교 집회에 한 번 가본거야. 거기서 문 목사님이 앞에 나와서 열사들 이름을 하나씩 부를 때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어. 난 그 전까지 데모하는 학생들 보면 폭도들이라고 했거든. 그날 정말 통곡을 했지. 김도향의 노래 있잖아.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내가 딱 그런 놈이었어.” 할아버지는 그날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 후원회원으로 가입하고 최근까지 헌신적으로 봉사해 왔다. 유가협에서 공로패도 수여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요즘은 유가협에 관심을 갖지 않아서 안타깝다고 말한다. “언제나처럼 대동강 옆 개천에서 동무들과 미역도 감고 놀고 있는데 군복에 총을 메고 우리 쪽으로 군인들이 오는 거야. 국군 간호장교 대위인 여군 한 명이 앞서고 남자 호위병 서넛이 카빈 총을 들고 뒤따르고. 무서웠지. 우리 쪽으로 와서 우리 어머니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는거야. 자세히 보니 당진에 살던 둘째 누이야. 어이구 이 녀석 많이 컸네 그러면서 껴안더라고. 반갑기도 하고, 총을 보니까 무섭기도 했지. 그러고 나서 집에 함께 들어가는데 동네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몰려오더라. 그때 셋째 누님이 둘째 누이가 들어오는 걸 봤대.” 이때 인민군 간호장교 소좌인 셋째 누님은 인민군과 함께 후퇴하지 못하고 집에 숨어 살고 있었다. 인민군 누이는 군의관 장교인 사귀는 남자의 영향으로 간호장교가 되었고, 군국 누이는 어릴 때부터 나이팅게일을 존경해 간호장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 엄마가 빨리 숨어라 그래서 작은누이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로 장롱과 벽 사이 좁은 틈에 숨었단 말야. 혹시라도 장롱 속이 안 보이게 셋째 누님이 가로막고 있었지. 어머니 아버지는 딸이 오니까 반가우면서도 한편 불안한 거야. 서로 반가워하고 인사하고 있는 와중에 인민군 누이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거야. 둘째누이를 핏줄보다 적으로 생각했나봐. 국군을 보니 반동분자들이란 생각이 들었겠지. 죽여버리겠다고 외치면서 권총을 들고 탁, 나와서 국군 누이를 향해 겨눴어. 국군 누이는 멍하니 서 있고 뒤에 서 있던 호위병들이 인민군 누이를 향해 총을 겨누었지.” “나는 누나들 다릴 붙잡고 엉엉 울었지. 금방 누구라도 죽을 것 같았으니까. 자식들은 울면서 바짓가랑이 잡고 말리고, 어머니는 왜들 그러냐고 통곡을 하면서, 절대 방아쇠 당기지 마라, 니들 중 하나는 죽는다, 하나라도 죽는 거 원치 않는다, 당장 총을 내려놓아라, 말리셨는데 그게 어머니 마음이고 우리 마음이야. 동네 사람들 몇몇은 방에 들어와 있고 문 밖에서 보는 사람도 있고 방 안 상황이 그렇게 험악했지. 이게 딱 우리 민족의 아픔이고 현실이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국군누이가 호위병에게 총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럴 수 없다고 머뭇거리자 단호하게 재차 외쳤다. “당장 내려놓지 못하겠어!” 그제서야 호위병들이 총을 내려놓았다. 작은 누이도 총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부모님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둘째누이에게 말했다. “오늘 이 일은 없었던 걸로 하고 작은 애를 도망가게 하자. 동네 사람들도 다 못 본 거다.” 국군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누이는 치마저고리 차림 그대로 뒷간으로 난 쪽문을 박차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것이 가족이 목격한 누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 국군과 인민군 그런 차이도 몰랐어. 인민군 누님은 완전 독기가 올랐었지. 원래 누나가 좀 사상성이 있었거든. 형제들 중에서 공부도 제일 잘하고, 특히 산수를 참 잘했고 미모도 빼어났어.” 맏누이는 지금 부산에 있는 성당에서 노인들 목욕봉사를 하며 살고 있다. 마음이 인자하고 온유해 남을 위한 봉사를 좋아한다고 한다. 북쪽 누이는 지금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치마저고리 차림으로 국군 점령지역을 어떻게 빠져나갔을까? “3일만 후퇴하면 된다고 했는데 3일이 어느새 60여 년이 되었어. 이승만에게 속았어. 중공군이 물밀듯이 내려올 때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우린 살기 위해서 가재도구를 고스란히 남겨두고 피난했지. 결국 누님만 두고 내려왔다. “그게 밥상공동체고 지붕공동체야. 서로 추락하지 않게 잡아주고, 먹을 것 있으면 나눠 먹고 도와주면서 내려왔어. 그때는 서로 자기 것을 아끼지 않았어. 요즘 사람들 자기 것 챙기고 먼저 먹으려고 얼마나 영악해. 문명은 발전했지만 완전 헛것이지.” 더러 예고 없이 기차가 떠나 잠시 정이 쌓인 사람들과 헤어지기도 했다. 객차 후미를 분리시키고 기차가 출발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가족은 기차 앞 쪽에 탔기 때문에 부산까지 갈 수 있었다. 낮과 밤들이 지붕 위에서 흘러갔다. 드디어 부산에 도착했다. 새벽에 부산에 도착하자 “재첩국 사이소”, “오징어 사이소”란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음식 이름이었다. “아버지는 유언으로 어머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그래. 그 대신 어머니가 빼빠지게 일만 하고 살았지. 메리야스 보따리 장사를 했던 어머닌 결국 길에서 장사하다 쓰러져 죽었어. 고혈압이었지. 66년도였을 거야. 유언도 못 남기고 죽었어. 어머니도 작은 누이 한 번 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자주 했어.“ 그도 어머니 속 많이 썩여 후회가 많다고 한다. 사동에서의 일을 꺼내지 않던 맏누이에게선 딱 한 번 영숙이(북한 누이)가 보고 싶다는 얘길 들었다. 매형 장례식 때였다. “이산가족 문제는 말야, 그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야. 우리 민족 모두의 문제이지. 이산가족이 아니라도 당연히 만나서 함께 살아야 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는 거잖아. 난 우리 가족만 찾겠다는 생각은 없어. 7천만 겨레가 만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니까. 7천만이 다 이산가족이야.” 금강산에 가봤냐는 질문에 갈 생각도 없다고 한다. 민족이 갈라서 있는데 무슨 염치로 가냐며 민족이 하나된 이후에 가보겠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교회 주보에 적힌 ‘분단 65년’이란 글자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분단을 유지하는 통일의 장애물은 무엇일까? “장애물을 치워야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듯 분단 장애물을 치워야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거야. 부시가 북한을 미사일 공격하면 내 동무들을 향해 쏜다는 것이잖아. 미군 철군 없는 평화는 없어.” 할아버지는 왕십리 유리공장에서 일할 때 만난 아내와 딸 둘과 함께 가족을 이뤘다. 큰딸은 시집가고 작은 딸은 데리고 있다. 자식들이 대선 지지자가 다 다르다고 한다. 자신의 생각대로 이끌어보려고 애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포기했다. 생각이 다르면 다른 대로 만나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반공주의자인 넷째 누이와도 지금은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문 목사님은 돌아가신 분이 아냐. 땅 속에 묻힌 분이 아니야. 故자를 떼어 내고 대신 늦봄이란 그분의 호만 붙여야지. 문 목사님의 거룩한 뜻은 내 가슴에, 그리고 우리들 가슴에 살아 꿈틀대고 있으니까. 열사들도 모두 살아 우리들 가슴에서 부활했잖아. 살아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변해도, 죽은 자는 그 뜻 그대로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변하더라도 열사들은 세월이 흘러가도 변함이 없어.” 유가협에서 후원활동을 하며 자주 만난 문 목사에 대한 애정은 각별해 보였다. 두 분은 몇 가지 점에서 닮은 모습이었다. 예수를 시대적 예언자로 인식하고 그 뜻을 따라 실천한 점과 늦은 나이에 투사의 삶을 시작한 늦봄들이란 점, 열사들에 대한 애정과 통일에 대한 의지가 각별하다는 점이 그렇다. 할아버지는 종종 열사들의 묘지를 혼자서 찾아간다. 저녁에 <파병반대 국민행동>에서 주최하는 집회에 참석해 다시 할아버지를 만났다. 길 건너로 미 대사관 건물이 보였다. 스피커에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 들려왔다. 시위자들은 이번 아프간 사태의 근본적 책임은 미국의 아프간 점령을 도운 현 정부에게 있다며 철군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촛불집회를 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하는데 열사들이야말로 자기 몸을 불태워서 제사로 자신을 역사 앞에 바친 거잖아. 촛불을 봐. 어둠을 바쳐서 시대를 밝히잖아. 열사들도 자기 몸을 희생해서 수많은 생명을 살린 거야.” 할아버지는 작년에 교회 목사의 권유로 유언장을 미리 써두었다. 그의 유언장엔 물론 민족 통일의 염원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다. 요즘 젊은이들이 통일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분단체제를 물려줘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할아버지 살아생전에 평양 동무들을, 생사를 알 수 없는 누이를, 대동강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길 건너 미 대사관 건물에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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