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기 열사

[인터뷰] ‘분신 사망’ 고 김재기씨 부인 “하늘나라서 같이 투쟁한다 했으니...” “남편 유지 받들어 도급화 꼭 막아내고 다시는 이런 일 없는

참된 2015. 2. 22. 15:15

[인터뷰] ‘분신 사망’ 고 김재기씨 부인 “하늘나라서 같이 투쟁한다 했으니...”

“남편 유지 받들어 도급화 꼭 막아내고 다시는 이런 일 없는 세상 되길”

고 김재기씨 부인이 기자회견에서 유족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준비해온 원고를 읽는 도중 혈압이 올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오열하며 읽고 있다.
고 김재기씨 부인이 기자회견에서 유족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준비해온 원고를 읽는 도중 혈압이 올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오열하며 읽고 있다.ⓒ김주형 기자

눈물바다였다. ‘도급화’를 막기 위해 스스로 목숨 끊은 금호타이어노조 대의원 故 김재기씨의 빈소였다. 김씨는 지난 16일 밤 9시경 금호타이어 곡성공장 본관동 앞에서 사측의 도급화를 반대하며 분신사망했다. 고인의 빈소는 광주 광산구 우산동 만평장례식장에 마련돼 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김씨의 부인 정아무개씨(43)는 얼마나 울었는지 흰자위에 핏발이 섰다. 볼에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린 자국이 역력했다.

“남편이 ‘회사가 날 죽이려고 한다’고 했다. 혼자만 죽일 수 없으니까 동료들까지 죽이려고 싸잡아 도급화하려 했다고 했다. 남편의 유언대로 꼭 도급화를 막아내기 바란다.(눈물) 회사가 제 남편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진심어린 사과 아니면 “조문 받지 않겠다”

정씨는 한참동안 말을 하지 못하며 눈물만 뚝뚝 흘렸다. 잠시 후 향을 태우는 냄새가 빈소를 자욱하게 감돌자 그제야 힘겹게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고 김재기씨 부부는 초등학교 동창이자 20여년을 한 이불을 덮고 살아온 잉꼬부부다.

“가정주부인 제가 ‘도급화’가 뭔지 어떻게 알겠냐. 남편이 ‘도급화’에 대해서 너무 힘들어 했고 ‘워크아웃 끝나면서 도급화도 끝났다’고 했는데, 회사는 다시 남편을 표적 삼아 ‘도급화’를 다시 시작한다고, 자기 때문에 자기 동료들이 같이 죽을 수 있다고 너무 힘들어 했다. 남편은 참 착한 사람이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 하고, 불평불만 못 하고0, 가정에서 성실한 사람이다. 회사와 직장동료를 위해서 너무 완벽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이다.”

남편의 죽음에 대한 정씨의 분노는 컸다. 악을 쓰고 통곡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정씨를 비롯한 유족들은 지난 19일 오후 금호타이어 곡성공장장을 비롯한 회사 관계자들의 조문을 거부하고 격렬히 항의했고, 이들을 빈소에서 쫓아냈다. 회사 대표가 와서 진심으로 사죄할 마음이 아닌, 껍데기 조문은 필요 없다는 마음이었다.

“남편이 죽음을 택한 원인이 된 실제 회사 대표가 와서 사과하고 책임져야 한다. 남편 죽음의 원인도 꼭 알고 싶다. (책임질 수 없는) 회사 관계자가 와서 조문한다고 남편 한이 풀리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한 관계자 조문은 받지 않겠다.”

고 김재기씨의 부인이 남편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고 김재기씨의 부인이 남편의 영정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김주형 기자

늦깎이 노동운동 투신 “동료들 위해 모든 것 쏟아 부어”

고 김재기씨는 지난 1995년 금호타이어에 입사해, 2013년 노조 대의원에 당선되고 현장조직에 들어가면서 늦깎이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런 남편에 대해 정씨는 “대의원이 된 뒤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대의원이 되기 전에는 가족과 회사 밖에 몰랐다. 집에서는 겨우 2~3시간 자면서 저와 가족과 있는 시간보다 회사에서 일하며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 뒤에는 회사에 있는 시간은 같은데, 회사보다는 동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전에는 가족에게 많이 충실했고, 뒤로는 직장동료들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면서 너무 힘들게 살았던 것 같다.”

고 김재기씨의 ‘분신 사망’ 소식을 처음 전한 일부 언론들은 그 원인을 ‘부부싸움’이나 ‘가정불화’로 추측했다. 정씨는 일부 언론으로부터 ‘세상에 부부싸움 했다고 직장 가서 분신하는 사람이 어딨냐’는 쓴소리까지 들었다. 정씨는 이 같은 보도에 어안이 벙벙했다.

“부부싸움 않고 사는 부부가 세상에 어디 있나. (16일 당일) 오후반인데 오전에 말도 없이 나가서 오후 6시에 들어왔다. 다짜고짜 ‘연차 썼다’고 하면서 그렇게 나가버렸다. ‘도급화 문제’ 생겨서 광주공장 간 것 알았고, 당시도 부부싸움 정도는 아니고 짜증만 좀 냈다. 그렇게 집을 나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기분 안 좋은 목소리로 ‘(어디서) 전화가 오면 회사 다녀와서 화가 나서 나갔다고 해라’면서 ‘아이들 바꿔 달라’고 하길래 딸을 바꿔줬다. 또 아들 바꿔 달라기에 ‘나갔잖아’ 했더니 ‘알았어, 끊을게’라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마지막 말은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였다. 그때 기분이 이상해서 다시 전화를 해보니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남편은 살면서 부부싸움을 해도 손찌검이나 반말, 막말을 한 적은 없다. 욕 한 번 한 적이 없다. 항상 예의를 갖춰줬다. 싸우더라도 절대 밖에 나가거나 술 먹는 일 없었다. 그냥 방에 들어가거나 잠을 잤다. 딸에게 ‘아빠가 무슨 말 했냐’고 물었더니 ‘엄마 말 잘 들으래’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김재기씨는 7시20분 경 가족, 동료들과 연락이 끊겼다. 남편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정씨는 오후 8시께 파출소에 신고했고 오후 9시50분 넘어서 곡성쪽 파출소(정확한 파출소명 파악 안됨), 곡성경찰서에서 잇따라 연락이 왔다.

“자세한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빨리 와야 한다고 했다. 심하게 흥분하면 순간적으로 혈압이 오르기에 정상적으로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119를 불렀고, 혈압을 잰 뒤에야 순찰차를 타고 곡성으로 갈 수 있었다.”

“남편 뜻 이뤄져 아이들이 아빠 자랑스러워하길”

오후 10시 넘겨 지원파출소를 출발해 곡성 쪽 파출소에 도착한 건 10시50분께. 다시 곡성 쪽 파출소에서 순찰차를 갈아타고 금호타이어 곡성공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씨는 속이 타들어 가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오열한 뒤 간신히 정신을 차리기를 몇 번 반복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말이 남았는지 마지막 힘을 다해 ‘남편의 유언’을 강조했다.

“너무 가엾고 억울하게 힘들게 가서 조용히 묻혀버리면 이 죽음이 헛된 게 된다. 유서에서 보셨듯 (남편이) 하늘나라에서도 뜻 같이하고 투쟁한다 했으니 유언대로 꼭 이뤄주길 바란다. 도급화 꼭 막아내길 바란다. 다시는 이런 일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저희 아이들이 ‘우리 아빠 이런 사람이었다’고 자랑하고 다닐 수 있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