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과 김순자, 두 노동자 후보의 도전 박은지(2012.12.11)
김소연과 김순자, 두 노동자 후보의 도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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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내가 길을 가는데 한 예순 된 젊은 놈이 얼굴에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녀석이 요 앞에서 고개를 들더니 '빨갱이 새끼가 두 놈이 가는구만' 그러는 거야. 내가 박정희 전두환이한테 가서 매를 직사도록 여러 차례 맞아봤지만 요즘처럼 '빨갱이 새끼 죽여'라고 그러진 않았어. 이제는 길거리에서 그러는 때가 왔거든. 이게 무슨 의미냐. 노동자의 숫자가 그렇게 많아도 진짜 계급적으로 무장된 노동자는 보기가 힘들다는 그런 얘기야. 그런 방증일지도 몰라. 우습게 보는 겨 우리를."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김소연 후보를 불러 걸쭉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백기완 선생, 87년 남한 민중운동 최고의 고양기 그리고 개헌 이후 첫 번째 직선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 후보의 첫발을 내디딘 그, 이제는 여든을 넘긴 노년의 목소리에서 여전히도 쇳소리가 울린다. 대한민국 역사상 진보좌파 진영이 가장 몰락하고 있는 시기, 2012년의 단면을 20여 년 전 민중 후보 백기완 선생은 명징하게 꿰뚫고 있었다. 2012년 대선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빅매치 틈바구니에서 '노동자 대통령'의 이름을 건 두 명의 후보가 있다. 기호 5번 김소연 후보와 기호 7번 김순자 후보, 이들은 여성이며,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한때 해고자였으며, 해고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운동가였으며, 지금은 대한민국 대통령 후보다.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김순자 선거운동본부가 유세를 벌이던 여의도역 출구 앞 상점의 관계자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선거운동원을 재촉한다. 이런 항의는 이른바 '마이너 선본'이 겪는 안타까움과 슬픔이기도 하다. 김순자 선본의 류창표 선거운동원은 이럴 경우 "죄송하지만 선거기간 실례 좀 하겠다면 대부분 양해해주시는 편"이라며 "가끔은 경찰에 신고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러면 경찰이 와서 정리를 해준다"고 말했다. 선거운동을 시작한 지 고작 사흘째, 선거운동원의 이런 노하우는 유력 당선권이 아닌 후보들의 선거유세 자체가 얼마나 천대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김순자 선본의 운동원들은 대부분 대학생이나 청년들로 구성돼 있다. '좌파의 시대' '청년 좌파'라는 구호를 새기고 있는 청년들에게 청소노동자 김순자 후보는 대리인이 아니라 대화 상대에 가깝다. 금방 "기호 7번 김순자"를 외치던 김윤영(서강대4) 학생은 "정당정치에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20대 여성으로서 저와 직접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 후보가 없었고, 박근혜나 문재인의 소식도 TV 버라이어티쇼를 보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며 "김순자 후보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소노동자와 손을 잡고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소수일지라도 가장 현실적으로 내 문제를 이야기하는 후보다"라고 말했다. 김소연 선거운동원의 구성은 좀더 다양하다. 학생, 청년에서부터 노동자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이는 김소연 후보가 대선에 출사표를 내밀게 된 6개월여 과정의 결과물이다. 정진우 유세팀장은 "김소연 후보뿐만 아니라 재능교육, 동희오토, 쌍용차, 희망버스 운동 등의 투쟁을 해왔고 다양한 사회적 연대를 만들었던 동지들이 삼삼오오 이번 대선에 적극 대응하고 후보까지 내는 고민을 해보자는 제안이 있었다"며 "통합진보당의 실패, 민주노총의 명망가들이 기성정당에 합류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실망도 있었기에 본인들이 주체가 되고자 했다"고 지금까지의 논의 과정을 설명했다. 6개월 전 이런 제안을 바탕으로 '변혁적 현장 실천과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을 위한 추진 모임'(변혁모임)이 만들어졌고, 기존의 진보정치권이 단일하고 통합된 흐름을 만들지 못하면서 예상치 못하게 변혁모임이 대선 논의의 중심이 되어버렸다. 김소연 후보의 선거운동 중이던 반영진(서울대3) 학생은 "평소 집회나 선전전에서 급진적인 내용을 말하면 시민들이 반감을 갖곤 하는데 선거운동이라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좋다"며 "박근혜나 문재인도 반값 등록금을 말하지만 액수 문제가 아니라 교육만큼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철학 아래 등록금 폐지를 주장하는 김소연 후보의 정책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인문계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계인 정화여상에 입학했던 김소연은 1987년 학내에서 벌어진 학원민주화 투쟁에 참여하게 됐다. 그동안 켜켜이 쌓여 있던 사립학교 비리가 공개되자 전교생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험거부 투쟁 등을 벌여 직선제 학생회를 쟁취했다. 이 사건은 김소연의 생애를 바꿔놓았다. '승리의 아이콘' 김소연 김소연은 이후 구로공단에서 새 삶을 시작한다. 김소연은 1992년 갑을전자에 입사해 어용노조에 맞서는 노동자민주화추진위원회(노민추) 활동을 시작해 1997년 노민추 후보로 나서 노조위원장에 당선된 후 무분별한 경영으로인한 폐업에 맞섰다. 김소연에게 이보다 더 큰 싸움은 이후 기륭전자에서 진행됐다. 정규직과 계약직, 파견직 등이 모두 함께하는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회사는 계약직과 파견직 노동자들에게 해고장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895일의 싸움이 시작됐다. 2008년 94일 동안 이어진 김소연의 단식은 생사의 기로를 몇 번이나 지나게 했지만 2011년 김소연과 그의 동지들은 끝내 승리하고 만다. 이런 김소연을 쌍용차 해고노동자 이창근씨는 "투쟁의 아이콘이 아니라 승리의 아이콘"이라 칭했다. 한국 사회 노동조합의 싸움에서 승리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는 이들은 안다. 김순자의 삶엔 가난한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어릴 적부터 가수가 꿈이었던 끼 많은 소녀는 어려운 집안 형편과 딸들은 공부 안 해도 된다는 분위기 속에서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다. 초등학교를 끝으로 학업을 마친 그는 16살 울산 울주군 언양의 견직공장에 취직해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 후엔 오빠와 함께 가게를 시작했다. 그 시절 그는 7년 동안 하루를 쉬지 않고 일했다고 한다. '청와대가 아니면 다시 청소 일터로' 김순자 2003년 50만 원도 채 안 되는 월급으로 청소 일을 시작했다. 관리직과의 월급 차가 4배나 되는 현실에 화가 나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김순자는 다른 조합원들과 함께 다음 해 일방적인 집단해고를 통보받게 된다. 부당해고 철회를 위해 탈의실에서 시작한 농성, 그러나 학교 안에 청소노동자의 편은 없었다. 학생들은 자기들 취직 안 된다며 문제를 회피했고 도와주기는커녕 구사대를 자처해 조합원들을 농성장에서 끌어냈다. 학교 본관 앞 무기한 천막농성, 정몽준 국회의원 사무실 점거농성, 그렇게 63일간의 투쟁이 끝난 후 복직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청소노동자 김순자는 여전히 저임금에 계약직이다. 그러던 그녀가 지난 총선에 진보신당 비례대표 1번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당시 조합원들은 "언니가 그렇게 가버리면 우리는 어떡하노"라며 불안함에 눈물로 김순자를 서울로 보냈다. 진보신당이 총선에서 3%를 획득하지 못하며 그는 낙선했다. 그리고 다시 빗자루를 들어야 하는 일터로 돌아갔다. 얼마 전 장애인정책 공약선포식에서 사회자는 김소연 후보를 "진짜진짜 용감하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두 후보는 거리 유세에서도 시민들에게 '신기한 후보'다. 서울 종각역에서 유세 중인 김소연 선거운동원에게 한 시민이 묻는다. "이번 선거엔 여자가 둘이고 남자가 하나야?" 박근혜-문재인 후보 외에 그 시민이 목격한 후보는 김소연 후보가 처음인 까닭이다. 이런 반응은 김순자 선본도 마찬가지다. 김성일 선거운동 본부장은 "가장 당혹스러운 반응이 문재인 지지도를 깎아먹기 위해 새누리당의 돈을 받고 나온 게 아니냐는 것"이라며 황당한 경험을 소개했다. 김소연 후보는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와의 인터뷰 중 "당신은 좌파냐?"라는 물음에 "나는 노동자파고 비정규직파다"라고 대답했다. 김순자 후보는 유세 중 청년 실업과 관련해 "서울대 연고대 나온다고 취업 안 된다. 근데 노동자가 청와대에 가면 취직된다"는 말로 청중의 이목을 끌었다. 물론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반응도 없지 않다. 지나가며 노골적으로 입에 담기 힘들 말을 내뱉는 사람들도 있다. 김순자 후보의 '모든 노동자에게 유급 안식년'이나 김소연 후보의 '재벌 재산 환수'가 그리 황당한 공약인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나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의 공약을 찾아보라. 실현 불가능하고 의지조차 없는 공약이 더 많다.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 부정선거 논란으로 정치적으로 몰락했고, 진보정의당은 후보 사퇴와 함께 문재인 지지를 선택했고, 진보신당은 대통령 후보를 내지 못했다. 진보신당은 애초 '사회연대 대선운동'을 제안하며 진보좌파 공동 대응을 추진하며 '변혁모임' 등과 협상을 벌여왔으나 이견으로 공동 선거 대응을 접었다. 쇠락한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쓸쓸한 거울 이후 진보신당은 전국위원회를 통해 독자 대응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무소속 김소연 후보 지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이미 대통령 후보를 결의하고 있던 김순자 후보는 탈당과 함께 무소속 출마를 선택했다. 김순자 후보에게 여전히 이 문제는 아쉬움이다. 김순자 후보는 선거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건 진보신당과의 관계"라며 "진보신당 후보로 나갔으면 행복했을 텐데, 진보신당이야말로 비정규직과 함께하는 당이라 총선도 출마하게 됐는데 이번에는 대선 안 하겠다고 하니 비정규직의 목소리를 더 내야 하는데 낼 곳이 없다는 것에 안타까움이 컸다"고 말했다. 김소연 후보 역시 김순자 후보 문제에 대해서는 대단히 조심스럽다. 김소연 후보는 "힘있게 하나로 모아가야 하는데 그만큼 저희가 무너져 있는 것"이라며 "당혹스러웠지만 그분(김순자 후보)의 판단이 있는 것이고 저희는 충실히 계획대로 임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순자 후보는 김소연 후보에 대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는 수십 명이 내도 적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목소리보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더 크지 않은가"라며 더 많은 노동자 대통령 후보가 나오는 게 좋다고 평했다. 12월 19일 투표함에서 김소연과 김순자는 과연 국민 몇 명의 마음을 얻게 될까. 2012년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의 대혼란이 무소속 두 노동자 대통령 후보의 등장에 고스란히 거울처럼 반영돼 있다. 득표 자체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선거는 선거다. 지금까지 진보 후보가 가장 많은 득표를 한 것은 2002년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95만7148표(3.89%)다. 이 글이 인쇄되어 사람들에게 읽힐 즈음이면 대통령 선거는 이미 끝나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당선 속에 두 노동자 후보의 선거 투쟁 결과는 관심 있는 분들 사이에서 잠시 회자된 채 크리스마스 캐롤 속에 파묻혀가고 있을 것 같다. 1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쇠락한 노동운동과 진보정치가 두 후보의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지웠다. 그 많던 이론가, 운동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글 / 박은지 진보신당 서울동작당원협의회 부위원장, 진보신당 대변인. 진보신당 19대 총선 비례대표 후보, 전직 국어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