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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래음반 '환하게'(우창수동지 글)

참된 2013. 12. 19. 19:39

아래는 레프트대구 다음 까페(http://cafe.daum.net/leftdaegu/CkuQ/7?q=%C8%AF%C7%CF%B0%D4%20%C0%BD%B9%DD)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시노래음반 '환하게'(우창수동지 글)| 8호 원고 초고
무등지천 | 조회 2 |추천 0 | 2013.12.13. 17:52
첨부파일 우창수레프트대.hwp 우리는 우유곽에 못으로 시(詩)를 쓰던 시인을 기억 한다 - 전국현장 글쓰기 모임 해방글터 시노래음반 “환하게”를 세상에 내놓으며 - 우창수(가수/작곡가) 오늘, 21세기 초입에 우리는 살 만한가라는 질문에 편안히 대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들려오는 소식과 대다수 노동자 민중의 생활은 고달프고 죽음의 행렬이다. 자본과 세상의 부당함에 맞서 조선소의 배들은 바다가 아니라 하늘로 올랐다. 한 겨울 손자를 위해 군고구마를 굽던 할머니는 이제 투사가 되었다. 국정원과 통진당은 분단이 낳은 기형아이다. 구럼비 바위는 한반도의 수호와 세계평화의 이름으로 거래 당하고 파괴되었다. 국가권력은 늘 국민의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국가를 만들었고, 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21세기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 하여, 노동자 민중의 국가는 없다. 사람의 자정능력이 뛰어나다 지만, 이런 죽임의 문화에서 인간정신은 그 피폐함은 그 한도를 넘고 있다. 나는 그 고통과 절규를 몇 자의 글로 도저히 표현할 자신이 없다. 사람이 할 말이 많아지면 글을 쓴다 했던가? 더 할 말이 많아지면 노래를 하고, 더 나가면 언어가 아니라 몸으로 춤을 춘다 했던가. 노동자 문학이 세상에 목소리를 높이던 때, 예술가 들은 자기반성도 하고 그 현장이란 곳에 몸담기도 하였다. 서로가 옳다고 다투기도 하며 세상을 달구더니 20세기말 세상이 바뀌었다며 손님처럼 권력을 따라 거처를 옮겼다. 잔치가 끝났다며 떠난 곳엔 설거지 거리만 남았고 초라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시인에게 한 선승(禪僧)은 “ 그렇지 사람만이 문제다”라고 화답했고 시인은 오랜 고민과 여행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옥안에서 우유곽에 못으로 시를 쓰던 시인은 출옥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곁을 떠났고, 영원히 그의 새로운 시를 읽지 못하게 되었다. 시인이 감옥에 있는 사이 그의 시는 어느 스무살 청년에게는 시대의 정신 이였고 운동의 지침이 되었다. 이렇게 모두들 자신의 길을 찾아 20세기의 언덕을 넘었다. 이벤트 같은 운동에 실망한 사람들이 모여 대안을 이야기하고 스스로 삶을 바꾸는 것이 인류를 위한 길임을 깨달아 가기도 하고, 희망버스의 날라리들은 노(老)운동가를 당황하게 만들었으나 곧 적응했다. 허나 사람들은 화려한 수사와 보여지는 무대만을 보고는 얼마간은 열광했을지 모르지만, 세상의 저 아래 저음의 목소리로 하나하나 자신의 삶을 투박한 시어(詩語)들로 하나하나 기워나가는 이들을 잊고 있었다. 이 노동자 시인들은 우유곽에 못으로 시를 쓰던 시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국현장 글쓰기모임 해방글터의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라. 화려한 싯구를 찾지 말고 그들의 삶을 보라. 구구절절 가슴이 미어지는 삶과 하나하나 세상을 잇고자 하는 치유가 있다. 그들도 그렇게 견뎠을 것이고 나도 그렇다. 시와 노래가 본디 한몸이라 나는 그 시들에 숨겨진 가락을 드러냈을 뿐이다. 어떤 때는 시노래가 아니어도 좋다. 그들이 써내려간 다른 시들에서 자신의 삶의 반추하고 노동시가 어떠해야지 라는 흰소리보다.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자. 그것이 노래가 되고 그리고 마지막에 그 모두를 품은 춤 한자락이 혁명적이고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는 영(靈)적 성숙의 씻김굿이길 바란다. @ 음반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과정에 대한 글은 해방글터 조성웅동지의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 기고한 글 “시와 노래의 새로운 공동체적 시간을 위해” 가 잘 쓰여져 있어 이곳에 다시 싣 습니다. 우창수 동지는 대구경북 민중언론 뉴스민을 통해 해방글터의 시노래에 대한 칼럼을 쓸 계획입니다. 시와 노래의 새로운 공동체적 시간을 위해 조성웅 (전국현장노동자글스기모임 해방글터 동인) 시는 노래를 통해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고 노래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음계를 시를 통해 완성한다. 시와 노래의 완전한 융합은 새로운 계급투쟁이 태어나고 성장하는, 공동체적 시간이 열리는 순간이다 해방글터, 계급문학을 사수하다 전국현장노동자글쓰기모임, 해방글터는 21세기 내전의 초입에 태어났다. 민주노총의 합법화와 정리해고제, 파견제, 변형근로제를 맞바꿔치기 하며 개량주의자들은 완연하게 자신들의 정치세력화를 시작했고 비정규직운동은 아직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했던 해였다. 전국노동자문학회는 소멸해가고 있었다. 해방글터는 자신의 뚜렷한 "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주 특별하게도 이 땅의 하층민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노점상이었으며 건설노동자였고 대공장 사내하청노동자였고 부품사, 계약직 노동자들이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해방글터는 이 땅 하층민들의 울분과 서러움, 분노를 쏙 빼닮았고 이 속에서 계급문학, 노동문학의 의미를 물었다. "잘나지도 못하고 빼어난 글 솜씨도 없지만 투쟁 속에 동지애로 빈 가슴을 채워가듯이 스스로 삶의 현장, 투쟁의 현장에서 우리의 문학은 몸으로 부딪치며 실천하는 것이 되자고 입술을 물던 노동자들이 모여 해방글터를 열었습니다. ... 우리의 글이 현장 속에서 사는 글이 되고 노동자들의 희망이 되고 투쟁의 힘이 되고 연대의 도구로 제 자리를 찾는 그 역할을 했으면 하는 바람일 뿐입니다(해방글터 첫시집, [땅끝에서 부르는 해방노래], 발문 중에서) 해방글터는 자신들의 삶이 현장이었고 투쟁이었으며 연대의 장이었다. 격렬한 민족문학 논쟁 이후에 주류문단에서 노동문학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노동문학의 계급적 전통은 해방글터를 통해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해방글터는 노동문학을 더욱 새롭게 했다. 해방글터의 시선은 "논쟁하고 협상하고 조정하는 도중에도, 악수하고 사진 찍고 한 잔 하러 가는 도중에도 길위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해방글터 두 번째 시집 [다시 중심으로] 발문 중에서)에게 쫒혀 있었다. 해방글터의 시들은 노동자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며 여럿이라는 것을 드러냈다. 해방글터는 비정규직 신분제도가 제도화되고 공고화되고 있는 시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선으로 삶과 투쟁을 재구성했고 열사투쟁과 비정규직 투쟁을 통제하고 파괴했던 노동조합관료들(노사협조주의자들, 개량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 조합주의자들)과의 전투를 치뤄냈다. 해방글터 동인들의 삶과 투쟁은 자본가계급과 개량주의자들(노사협조주의, 조합주의) 대한 선전포고였고 그것을 진정성 있는 시로 담아냈다. "우리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투쟁하는 투사로서 현장을 조직했고 머리띠를 묶었으며 구호를 외쳤다. 때로 짱돌을 던졌고 때론 쇠파이프를 잡았다. 열사들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최선을 다해 투쟁에 참가했고 투쟁 속에서 살고 사랑하고 성장하고자 했다. 잠시 펜을 들어 시를 쓰는 것을 유보해도 좋았다. ... 우리는 열사가 되고 싶지 않다. 열사처럼 죽으라고 현장을 조직하고 현장을 일으키고 현장 투쟁의 연대망을 건설하는 투사가 되고 싶다. 우리의 시집은 열사투쟁과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기록이자 평가이다"(해방글터 세 번째 시집 [하청노동자 전태일] 발문 중에서) 해방글터의 시들은 열사투쟁과 비정규직 투쟁 시기의 역사적 기록이자 평가이며 이는 마땅히 리얼리즘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요구할 수 있는 계급투쟁의 하나의 성과물이다 해방글터는 시를 위한 독자적인 발전의 시간을 갖지 못했지만 투쟁 속에서 세상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자 했다. 투쟁의 나이는 자연스럽게 글을 다루는 솜씨, 표현하는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 시기 조선남 김영철, 신경현 시인이 첫 번째 시집을 발간했고 조성웅 시인이 자신의 두 번째 시집을 발간했다. 해방글터 동인시집과 개인시집들은 열사투쟁과 비정규직 투쟁의 시기 어느 문학가도 가려 하지 않았던 해방글터 자신의 삶과 투쟁의 빛나는 성취였다. 해방글터 동인들은 80년대 계급문학의 전통을 21세기에 계승하고 도입했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투쟁을 통해 계급투쟁의 변화된 지도를 작성하고 보고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시선으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여성, 정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위계 없는 결합과 연대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했다. 해방글터 시노래 음반은 한진 85크레인 아래에서 출발했다 "지난 시기 해방글터의 시들은 저에게는 위로였고, 각성이었으며, 반성과 다짐이었습니다. 명망가의 시가 아니라 지역을 지키며 삶과 노동의 현장에서 일과시, 투쟁이 하나임을 보여준 동지들의 시는, 때론 눈물 나는 서정으로 다가왔고 때론 게으름을 질타했고, 제가 어디에서 노래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동지들의 시가 많은 노동자들에게 읽혀지고 낭송되어지며, 나아가 노동자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문예의 기재로 표현되기를 바랬습니다. 허나 노동자들의 문예물은 집회판에서 한번 낭송되어지고 묻히고 마는, 지역의 노동자 시인들의 소중한 가치가 외면되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늘 안타깝게 생각해왔습니다. 해서 좀더 다양한 방식으로 동지들의 시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해방글터의 시들에 곡을 붙여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2009년 부산과 울산에서 진행한 우창수의 노래나무 심기 “배순덕 傳(전)” / 안윤길, 조성웅 傳(전)이었습니다"(우창수 - <해방글터 시노래 음반 제안 취지> 글 중에서) 노점상, 건설노동자, 금속노동자, 사내하청, 중소사업장 노동자들로 구성된 '전국현장노동자글쓰기모임 해방글터'(htp://cafe.naver.com/ptpen)는 2011년 5월, 한진 85크레인 아래에서 정기모임과 함께 시노래문화제를 진행했다. 85크레인도 가장 어려운 시기였고 해방글터도 오랜 정체 속에서 모임의 지속을 고민해야 했던 시기였다. 해방글터 정기모임을 준비하면서 프로그램 때문에 김진숙 동지에게 트윗 쪽지를 보낸 적이 있다. 김진숙 동지는 "그냥 가볍게 가서 놀자 하는 마음으로 오세요. 다들 연대를 무겁게 생각하니 발걸음도 무거워지는 거 같습니다.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오라고 했다. 그리고 진짜 가볍게 가서 놀자고 온 사람들, 날라리 외부세력들은 우리가 하지 못한, 시와 선동이 하지 못한 웃음을 김진숙 동지와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에게 줬다. "그들은 노란개나리들처럼 몰려와서는 수학여행 온 아이들 마냥 웃고 떠들고 사인해주고 사진찍고, 공장 안에서 거친 사내들이 성긴 손으로 차려내는 저녁을 먹고 그리고 갔다. 그 뿐이었다. 집회도 없었고 발언을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 날 모처럼 조합원들에게서 물 오른 버들강아지 같은 생기가 돌았다. 우리도 웃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울려 웃고 나니 가장 큰 고비를 넘어서 있었다"(김진숙 동지가 한겨레 신문 천사공모에 낸 글 중에서) 이것이 시다. 저 죽음을 견디는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날라리 외부세력들은 웃음을 줬고 가장 중요한 고비를 넘기도록 했다. 이 힘이 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특별한 프로그램 없이 진행한 해방글터 공연이었다. 우창수 동지와 황태현 가수가 노래로 길 안내를 시작하고 조선남, 조성웅, 신경현 시인이 85크레인 투쟁을 형상화 한 시를 김진숙 동지를 위해 낭송했다. 우창수 동지는 배순덕, 조성웅, 신경현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로 화답했다. 시와 노래가 만나 어우러진 마음의 텃밭을 김진숙 동지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해방글터 동인들이 함께 한 동지들 앞에 나가 인사를 했다. 부산에서 한진중공업 투쟁에 긴밀하게 결합했던 해방글터 동인인 배순덕 시인은 동지들 앞에 속 깊은 이야기를 꺼냈다. 해방글터 동인들은 배순덕 시인 뒤에 있었는데 배순덕 시인이 동인들을 의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동인들은 배순덕 시인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특히 우창수 동지와 함께 한 시-노래 공연은 김진숙 동지와 문화제에 함께 한 한진중공업 조합원들과 지역 노동자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스스로 발언하도록 하고 신명을 이끌어냈다. 85크레인만 바라보며 속만 앓던 한 조합원은 김진숙 동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노래를 처음으로 불렀고 사진을 찍는 한 조합원은 "이거 그림된다"며 즐거워했다. 85크레인 아래에서의 시노래 문화제는 무엇보다도 해방글터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했을 뿐만 아니라, 한진조합원들이 마음 속에 묻어준 이야기를 끌어내고 김진숙 동지에게 전달할 수 있게 했다. 시노래 문화제는 서로를 위한 공감의 시간을 만들고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어떤 가능성들을 서로가 품게 하는 공간을 창출했다. 우창수 동지의 제안에 해방글터 동인들이 결의하고 좋은친구들이 공감 해서 추진하는 해방글터 시노래 음반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고 추진되기 시작했다 해방글터와 함께 하는 투쟁사업장 시노래문화제 해방글터 시노래음반은 2011년 6월12일 85크레인 아래에서의 시와 노래와 춤과 공감으로 구성된 공동체적 시간들을 지속하고 유지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해방글터 - 우창수 - 좋은친구들이 시노래음반을 통해 목표하는 바는 새로운 공동체적 시간을 만드는 것이다. 차이는 차이 그 자체로 존중받으면서 오히려 차이 속에서 협력을 생산해내는 가능성의 시간을 만들어냄으로써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체념과 절망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들에게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전망을 공유하는 것이다. 위계없는, 차별없는, 숲의 합창처럼 즐거운 대화로 연결되는 수평적 연대의 새로운 가능성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해방글터, 우창수, 좋은친구들이 진행하고 있는 투쟁사업장 시노래문화제는 작지만 소중한 공동체적 시간을 만들고 있다 지난 6월24일 동대구역 최저임금 농성장에서 해방글터와 함께하는 첫번째 시노래 문화제 "생활임금 쟁취 시노래 공연"이 있었다. 조선남 시인, 신경현 시인이 참여해 시낭송과 이야기마당, 우창수 김은희 동지의 시노래 공연이 있었다. 또 2012년7월25일에는 부산영도 한진중공업 정문 농성장에서 해방글터와 함께하는 두 번째 시노래 문화제 " 이씨 아저씨"가 진행됐다. 이날 문화제는 시낭송, 이야기마당, 시노래 공연, 조합원 발언으로 구성됐고 나와 배순덕 시인이 참가해 시를 낭송하는 이야기 마당을 이어갔다 7월28일 현대자동차 포위의 날, 해방글터 동인들과 우창수 동지는 현대차포위의 날 중앙문화제에 참석했다. 우창수 동지와 류금신 동지는 이 무대 위에서 공연을 했다. 우창수 동지는 배순덕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원청노동자와 하청노동자의 차이' 류금신 동지는 내 시에 곡을 붙인 '환하게'를 불렀다. 오랜만에 보는 류금신 동지의 목소리는 안정되어 있었고 자기치유의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류금신 동지가 부른 '환하게'는 2004년 울산플랜트노조 출범식 때 붙인 시다. 우창수 동지가 곡을 붙이고 노래가 된 시는 업종에 갇히지 않고 공감대의 영역을 확장했다. 류금신 동지는 이 노래를 청소노동자들을 위한 노래로 변주했다. 나아가 환하게라는 단어가 불러 일으키는 영역 속으로 모든 동지들을 초대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새로운 힘을 구성하는 새로운 경험을 갖게 했다. 그리고 8월25일 급박하게 조직된 현대자동차 연대의 날에 난 우창수 동지와 함께 시노래 공연을 했다. 나는 류기혁 열사 추모시를 낭송했고 그는 내 시와 배순덕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를 불렀다. 전 전해투 위원장인 이호동 동지는 "조성웅은 시를 폐부에서 노래처럼 토해내고, 우창수는 노래하며 투쟁의 시어를 가슴에 꽂고 있다"고 했다.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황인화 조합원은 "형 멋지고 너무 좋아요" 그 시를 다시 볼 수 있냐고 해서 너댓권 남은 두번째 시집에 싸인을 해서 선물해주기도 했다. 지회 조합원들은 "가슴 찡하다. ... 어떻게 그렇게 생겨가지고 시를 낭송할 수 있냐 눈 감고 들었다" 등등 적극적인 반응들과 "이제 시인이 다 됐네"라며 과거처럼 적극적으로 투쟁을 조직하지 않는 내게 비판적 견해도 들려줬다. 시와 노래가 현대차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에게,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스며들고 공감할 수 있는 지평이 열려져 있다는 것. 해방글터와 함께 하는 시노래 문화제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있는 곳에서 지속될 것이다.
 
무등지천 13.12.13. 17:57
우창수동지가 첨부해서 보낸 글

앞 장 한 장만 제가 스고 뒤에는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 실린 조성웅 동지의 글입니다
조동지의 글이 구체적이고 잘쓴 글이라 따로 뭐 쓸게없어서 기고글을 다시싣는것을 밝히고 실으면 될것 같습니다 ~
음반책자에도 들어간 글이라 흉될거는 없는것 같구요 ~~
제글이나 조동지 글이나 문맥이나 오타를 잘좀 살펴 두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