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형 열사

윤주형 열사가 1월 23일 페이스북에 마지막으로 남긴 글

참된 2013. 2. 8. 08:59

아래는 윤주형 열사의 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drunkenbrother)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얼마나 외로웠으면......
따뜻하게 꼭 안아라도 볼걸......
희망광장에서 함께 하던 때.......






'나는 아주 공정하고 객관적인 사람인데, 너는 틀렸어. 너와는 어울리지 않겠어.'
심사가 틀어진 이들이 주로 하는 말이다. 어떤 곤란이 온다 해도

입장을 고수하겠다며 스스로를 순교자로 연출한다. 그러다 필요할 때 연락을 할까하며 끙끙 앓기도 한다. 먼저 연락하긴 자존심이 상하고 지는 것 같겠지.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폭풍 같던 마음도 가라앉고, 상대방의 좋았던 모습도 생각난다. 판단이 될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타인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고 그저 미워할 것이지 사랑할 것이지를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니까.

나이가 꺾어지는 30대 즈음이 되면 누구나 왕년의 한가닦이 있고 한 이빨을 하게 된다. 그리고 풍파를 겪은 가치관과 굳어진 성격은 더 바꾸기 힘든 때다. 그렇기 때문에 소통에 있어 최선의 예의는 내게 중요한 모든 일정을 뒤로 물리고 다가서는 것과, 나의 불편한 감정의 요를 이해시키고 또 상대의 그것도 그만큼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열정적인 노력을 허망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진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이의 인정'과 '입장 존중', '취향 존중' 따위의 말이 그것이다. 어른스러운 게으름이 느껴지는 말. '난 이해할 수 없지만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네 입장과 취향을 존중한다.', '난 유물론자고 과학적 사회주의자니까 너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이 본래의 뜻대로 쓰이는 경우를 아직 보지 못했다. 액면으로 전달된 음성 뒤에는 괄호 열고 '나는 나, 너는 너' 괄호 닫고 식으로 관계의 평행선을 그린다. 그런 관계는 민감한 핵심을 피해 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멸하는 관계다. 완강한 입장의 사상가라면서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으로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곤, 모면과 타협을 선택한다.

소중한 관계일수록 피해가선 안 된다. 상대에 대한 모욕이다. 서로

부딪혀 아플 정도로 마모가 되더라도 생각과 관점과 마음을 공유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다 생각하는 것인지, 왜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진심으로 알아야 그때 비로소 상대에 대한 존중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해시키려 설명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피할 수 없게 되는 표현이 있다. 상대의 감정을 건드릴까 두려워하는 바로 그 부분. 컴플렉스와 취약한 자존심을 건드릴 수밖에 없겠지만, 현명함을 핑계로 도망칠 것이 아니라 더 정직하게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것이 참된 애정이자 주인주체로 인정하는 것이며 단단한 뿌리를 가진 관계의 핵심이다. 심리적으로 벌거숭이 만신창이가 된다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관계의, 또는 미워하기를 포기하고 사랑하기를 결정한 대상이라면 더욱 더 문제 극복의 훌륭한 시스템을 갖추는 시작이 될 것이다. 물론 여전히 반쯤 뚜껑이 열린 상태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더해 상대의 마음속을 들여다봐야 하는 감정노동이 중노동이 될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간의 모면을 위해 (객관적 사실이긴 하지만)진심이 아닌 말로, 마음을 숨긴 채 넘어 간다면 상대는 '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하지 않을까? 왜 나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가장 소중한 관계에 금이 갔는데 자신의 일상으로 서둘러 돌아가려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구나. 아, 네가 날 포기하는구나'싶어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될 것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동지. 혁명과 노동자를 외치던 수많은 활동가들은 아무도 그의 고민을 몰랐다. 죽고 난 그를 놓고 말잔치를 벌이는 현실은 차갑다 못해 비정하구나. 노동자의 힘으로 현장과 세상을 바꾸겠다면서 노동자들과 제대로 관계 맺고 있는 것인가? 내게 가장 소중한 관계에서 부터 잊고 있던 관계들을 종일 되짚어 본다. 주접떨지 말고 자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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