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인더는 나의 손 외 임성용
아래는 임성용님의 블로그 산내들을 거닐다(http://blog.daum.net/changmoon)에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라인더는 나의 손 외 시창작방
그라인더는 나의 손
내 손이 할 수 없는 일을
그라인더는 힘차게 대신한다
스위치만 켜면 철판을 갈아내고
파이프를 자르고 용접부위를 말끔히 다듬는다
죽어도 내가 할 수 없는 일
손가락이 잘려도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을
눈도 코도 없는 그라인더는 무슨 무기처럼
날만 들이대면 맹렬하게 해치운다
그러나, 나는 간혹 그라인더를 멸시한다
언제든지 나의 손이 되어준 임무를 배반할 수 있기에
그라인더와 나의 친교는 핏방울로 변한다
그라인더의 날이 철판에 박힐 때
이미 내 손은 그라인더의 근육이다
모터의 전류가 내 몸의 어딘가 단선을 접합해
드디어 나를 작동시킨다
방전된 정신을 급속히 충전시킨다
작업복과 행주
작업복 소매에서 모레가 쏟아졌다
쇳가루가 쏟아졌다. 몸에 구석구석 피스가 박힌듯
편안하게 앉아 밥 한술 뜨기가 거북스러웠다
벌써 뼈만 남은 나뭇가지가 있네, 다음 달에 환갑인 장반장이
뼈다귀 해장국 뼈에 붙은 살점을 발라내며 중얼거렸다
빈 주머니에서 찬바람이 솔기를 뚫고 빠져나왔다
빈 창자에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밥알을 밀어넣고
소주잔을 털자, 식당 아줌마가 흩어진 국물을 쓸어담았다
땟국물 낀 행주가 지나간 탁자 위에
또 모레가 쏟아졌다. 쇳가루가 쏟아졌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모레와 쇳가루는 금방 가루가 되었다
이젠, 우리들이 입은 작업복은 일회용 행주처럼 버려질 것이다
장반장이 몇 천원 부족한 식대를 거두려고 일어섰다.
눈오는 날의 꿈
공구리 까는 함마로
하늘을 찍어내면
점점이 드러나는 하얀 못자국
드릴이 뚫고 지나간 흔적 따라
살아온 길 그대로 먹줄을 놓고
안전벨트 외줄에 매달려
아직 지상에 내려앉지 못한
그대의 얼굴을 조각한다
움퍽, 패인 판화를 찍어누르면
금새 손아귀에서 녹아내리는
강철 같은 꿈 한 장
빈궁(貧窮)
갈비탕 두 그릇을 반반이 나눠
살점을 발라 썰어주며
오늘따라 내 가위질이 영 서툴구나
일곱 살 아들은 삼겹살을 먹겠다고
끝까지 고집불퉁이다
떼를 쓰는 아이의 눈물과 아이를 야단치는 아내의 눈빛이
그렁그렁 갈비탕 그릇에서 뒤엉킨다
내 수중에 만 원 밖에 없는 빈궁은 그렇다치더라도
이 빈궁을 굳이 시로 쓰는 심정이야
남몰래 숨겨도 좋을 궁상을 나는 일부러 떨고 있는 것이냐
주머니가 빈 게 무슨 내세울만한 하소연이고 넋두리더냐
폐렴이 악회되어 입원한 딸에게
나는 수저에 고기를 담아 한술 건네준다
딸애가 기침을 할 때마다 링거액 투명한 줄이 흔들리고
방울방울 너를 적셔주지 못한 나는, 여지없이 밥알이 목줄에 걸린다
미안하구나, 일요일도 없이 일 나가서 미안하고
아침밥 제 때 챙겨주지 못해 미안하고
저녁을 굶고 잠든 너희 얼굴을 그냥 쳐다만 보고 잠든
애비된 이 마음이 흐린 밤 안개처럼 풀어지는구나
비록 지금, 내가 사는 세상이 좋아
이불 한채 없고 별빛 쳐드는 집이 없어 울지는 않지만
나는, 내 빈궁이 또한 남의 빈궁이려니 생각했고
그러므로 남의 일을 내 일로 여겨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뭐, 자랑이라고 이런 살림을 주절거린다고 외면하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남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느끼지 못할 뼈다귀들이다
왜냐면 그들의 식탁에서 삼겹살 값이 아무리 오른다 한들
일곱살 난 아이의 울음을 헤아릴 수 없으므로
아이의 울음에도 열 뜬 기침소리에도
심지어 먹다 남긴 삼겹살 불판에도 삶의 근원과 희망은 없다
오로지 우리에겐 살아가야 한다는 궁상이 있을 뿐이다
목전에 놓인 갈비탕이 식기 전에
우리 네 식구는 그저 울며, 보채며, 이 빈궁을 먹어야 한다.
닳아지는 것들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 세상에서
닳아지는 것들
닳아 모두 없어지는 것들
철칩을 때리던 망치도 닳아
철칩도 망치도 못쓰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부리고
사람이 사람을 녹이는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 빌어먹은 육신
절벅거리며 흘리고 간 그림자도 닳아 없어진다
삶은 누구에게나 아름답다고?
그렇다면 누구나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도축된 영혼을 저울에 달아야 한다
한 근에 얼마씩 똑같은 값으로 팔아야 한다
그러나 왜소한 것들은 자칫 눈 밖으로 사라지고
눈물이 많은 것들은 거추장스럽다
속지 말라, 누구를 믿을 것인가
바늘끝처럼 닳고 닳은 세상에서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사고 팔리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대의 묶인 손은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
그대를 끌고 다닌 발은 닳아 사라지지 않는다
쇠는 닳아 없어져도, 과연
사람의 손과 발이 닳아 없어지는 걸 본 적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