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며
한국진보운동에서 주체형성전략(2) 진보의 새로운 가치와 민주주의
참된
2010. 10. 2. 12:05
진보의 새로운 가치와 민주주의
[맑스코뮤날레 워크숍] 한국진보운동에서 주체형성전략(2)
참세상 2010.09.25 06:21
질문1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은 오늘날 지구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위험사회의 요소들에 대한 관심을 크게 증가시켰다. 게다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이런 위험사회의 요소들을 더욱 확대시켜왔다. 시민운동의 발전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80년대의 가치와 다른 새로운 가치들이 진보운동에서도 필요한 것 같다. 그렇다면 기존의 맑스주의를 벗어나서 오늘날 진보운동이 전면에 내세워야 할 가치는 무엇이며 이들 가치들의 관계는 어떻게 되며 어떤 관점에서 이들 가치들 간의 접합이 필요한지 말해 달라.
고민택(사노위)
시민운동이 ‘발전’하게 된 계기가 질문에서처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증대시킨 위험사회의 요소’ 때문이라는 것에는 선뜻 수긍이 가지 않는다. 물론 시민운동의 범주와 영역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즉 답변자가 시민운동과 구별하여 쓰고자 하는 사회운동과 동일한 것이라면 부분적으로 수용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보다 엄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판단이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앞 단락의 질문처럼 ‘한국의 봉건적 유제와 국가의 비대화’(이 역시 비대화라는 표현보다는 전근대성 또는 노골적 폭력성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보지만)에 대한 즉자적 대응, 즉 ‘민주화’의 연속 또는 그것의 양적 증대 차원을 결코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비판적 지지’는 민족주의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시민운동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다.
‘80년대의 가치와 다른 새로운 가치’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불분명하지만, 만약 ‘80년대의 가치’를 대표적으로 ‘민주주의’나 ‘노동(자) 문제’로 보고, ‘새로운 가치’를 ‘성, 생태, 인권’ 또는 ‘보편적 가치’ 등으로 설정하고 말하는 것이라면, 또한 그 연속 위에서 ‘맑스주의를 벗어나서 오늘날 진보운동이 전면에 내세워야 할 가치’가 무엇이냐를 묻는 것이라면 역으로 오늘날 신자유주의 지구화가 전일적으로 관철되고 있고 더구나 세계공황이 발발/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노동(자계급) 의제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위험사회’의 근원도 이로부터 비롯되고 있으며 ‘성, 생태, 인권’ 문제도 노동 문제로부터 자립하여 존재하는 가치라고 할 수 없다.
물론 노동운동이 경제주의/조합주의/관료주의에 포섭되어 있고, 내부적으로 계층 분화와 위계화가 상당 정도로 진전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성, 생태, 인권’ 문제 등을 자신의 과제로 받아 안고 있지 못한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를 노동자대중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노동운동 또는 노동자투쟁이 스스로 극복하고 나가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다. 그러나 이는 일조일석에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만큼의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조급증을 부리는 것은 엘리트주의/대리주의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다. 인내심을 갖고 끈질기게 소통하고 조직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러한 운동을 노동자계급 외부에서 벌일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안에서 이루기 위한 경로를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 운동은 결코 성공하기 어렵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진보운동이 전면에 내세워야 할 하나의 가치는 없다. 다양한 가치가 경합하면서 대중들에게 시기와 상황에 따라 어필하는 정도가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한국진보운동을 어떻게 범주화해야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생태, 인권, 여성주의, 평화’의 가치가 서로 경합하는 중으로 보인다. 이런 가치를 추구하는 운동들은 자체 완결적인 운동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면서 블록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런 가치들 간의 통합을 위한 횡단대화가 필요한 때다.
거기에 ‘노동’이란 가치가 밑바탕에 깔려야 한다. 위의 가치들을 추구하는 운동들이 종종 변혁운동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한국사회의 계급관계를 놓치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당파성이 있으며, 당파성을 잃으면 공자님 말씀처럼 지당한 말씀으로 남게 될 것이다. 거기에 권력으로부터 의도적으로 배제되는 비정규직, 빈곤층, 이주노동자를 비롯한 소수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가치의 통합을 위한 노력은 사변적이어서는 곤란하고, 실천적이어야 한다. 구체적인 현실을 놓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가치들이 통합이 점점 가능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한국진보운동의 이념을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다각적으로, 그리고 민주주의적으로 경주되어야 한다.
심광현(문화과학)
현재 한국사회는 70-90년대 중반까지의 압축적(서구의 6배에 달하는 가속도의) 실물팽창과 90년대 후반-현재까지의 금융팽창 국면 변화를 급속하게 거쳐 오는 동안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거대한 규모와 속도의 농촌 해체와 도시화(현재 90%를 넘는 도시화율과 전체 인구의 1/2 이상이 수도권 집중), 산업 양극화와 공동화, 핵가족화/가족 해체로 인한 공동체 파괴/개인의 파편화(세계 최고 수위의 이혼율/자살률), 자본주의적 과소비문화 중독과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등, 일일이 거론할 수 없게끔 그간의 압축 성장에 비례하는 만큼 막대한 양과 질의 “위험사회”의 요소들을 대량생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다른 사회에 비해 가장 뒤늦게 - 80년대 학생운동의 확산 과정에서 소수로 - 출범한 한국의 맑스주의 운동은 유례없이 급속한 발전주의적 “노동사회화”의 문제점에 대응해야 하는 동시에, 90년대에 시작된 동구권 해체와 함께 확산된 “TNA"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신자유주의적(금융화-정보화에 의해 가속화된) “탈노동사회화”의 물결에 대응하기 바쁜 가운데, 90년대 이후에는 이에 더하여 “위험사회화”의 물결에 대처해야 하는 삼중-사중의 과제로 인해 중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자기 혁신을 고민할 시간 없이 목전의 불길을 끄기 바쁘게 지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중에서도 한국 맑스주의는 마지막 불길, 즉 “위험사회”의 불길에는 거의 대처할 여력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로 인해 2000년대에 들어서는 마지막 불길에 대처하려는 환경/생태-여성의 이슈를 주제로 한 시민운동 진영에서는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 왔고, 맑스주의에서는 전자가 발전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에 대한 비판을 소홀히 한다는 것으로 맞서는 대립 양상이 두드러져 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발전주의적 노동사회, 신자유주의적 탈노동사회, 그리고 양자가 공히 양산하는 위험사회의 문제는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공히 자본주의의 국면 변화의 역사적 산물이기에 각각의 위험에 맞서는 진보적 가치들의 내적 연결망을 찾는 일은 자본주의의 극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전제 하에서 양자택일의 방식이 아니라 오직 공동의 협력 속에서 만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진경(수유공간N)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지켜보면서 절감했던 것은, 그 사회는 또 하나의 근대사회였다는 사실이었다. 그것과 관련하여 특히 중요한 것은 개발/발전의 이념을 근대 내지 자본주의와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 국가적 통제를 통한 개발의 가속화라는 형태로 변형된, 많은 경우 개발의 속도를 더욱 높이기 위한 과속-개발의 사회였다는 것일 것 같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생산력 발전의 자연법칙을 신봉하지만, 그 생산력을 투입량 분의 산출량으로 정의되는 ‘생산성’과 동일한 것으로 정의한다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생산력이란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이에는 어떤 근본적 단절도 없다. 그러나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얻는 것을 뜻하는 생산성의 관념은 맑스적인 것이라기보다는 벤담의 공리주의에 속한 것이다.
생산력이란 ‘자연과 인간 간의 관계’라는 맑스의 정의를 우리는 좀 더 근본으로 밀고 올라가 근본에서 다시 사유해야 한다. 혁명이란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를 바꾸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제거하는 것이어야 할 뿐 아니라, 인간에 의한 자연의 착취를 제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간의 새로운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가 모색되고 구성되어야 한다. 만약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규정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생산관계에 대해 생산력이 일차적인 규정력을, 혹은 바꿔 말해서 일차적인 지위를 갖는다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혁명의 사유에서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의 혁명 위에서 인간간의 새로운 관계를 사유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장훈교(성공회대)
‘가치’라는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지다만, 사회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재생산의 과정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의미와 규범, 윤리의 체계를 가리키는 것 혹은 사회의 재생산 과정에서 의미를 갖는 실천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우리는 매우 다양한 가치들을 나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윤리적인 차원에서 우리들의 새로운 사회적 상상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것을 생각해본다면 [공유, 인정, 참여]가 핵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의 실현을 위해 지금 21세기 좌파의 정치적인 분배의 대상은 ‘시간의 분배’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① 착취 ② 무시와 함께 ③ 삶의 실패의 문제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세계를 공유하고 우리들의 참여를 통해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문제해결의 지평이 지금 우리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회적 조직화의 방향이나 사회적 상상이 지금 우리의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는데 이것은 공적차원(the Public)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생산하고 그것을 공유하고 그것을 분배하고 관리하는 일종의 공통차원(the Common)의 차원이다.
공영기업을 민영화하려는 시도에 대항해서 우리는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지식과 그것을 소비하는 사용자의 지식 그리고 그것과 결합되어 있는 다양한 자원과 결합되어 있는 [노동-사용자-시민]들의 공통의 자원으로 전환할 수 있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것은 단지 형식화된 수준의 [참여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참여경제] 그리고 [참여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은 다양한 위치들과 관련된 지식들을 공유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의 세계에 공동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길에 대한 다양한 자원들을 우리 사회가 이미 축적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고민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되어 시간을 재분배하는 것이 다양한 가치들을 접합하는 한 가지 경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시간의 공유’로 나아가야 한다. 자본의 속도와 동기화된 사회의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급증함에 따라서 자원이 없는 연약한 개인들의 삶의 속도가 끊임없이 증가하고 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을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시간을 조직하며, 직장이 없는 사람은 그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조직한다.
타자의 삶에 대한 지배는 기본적으로 타자의 시간에 대한 식민화를 포함한다. 우리들의 내세우는 가치가 실현되기 위해서 우리는 타자화된 시간을 해방하여 자신의 능력을 실현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야 하고 이런 의미에서 시간을 자신과 동조시키는 과정을 자율적인 삶의 과정으로 연결하기 위해 시간을 재분배하기 위한 전략을 구축해야만 한다.
질문2 이와 관련하여 작년에 적녹보라, 또는 녹적보라의 연대가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몇몇 토론만 진행되었지 실질적인 연대는 없었다. 이것은 상호 간의 신뢰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 원인을 진단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기 바란다. 아울러 적녹보라의 연대를 위해서 각 영역의 운동들이 쇄신해야 할 점과 태도가 있다면 무엇인지 지적해 주기 바란다.
고민택(사노위)
‘적녹보라 또는 녹적보라’의 연대가 이야기된 것은 진전이며 앞으로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그러나 ‘몇몇 토론만 진행’된 현실에서 ‘실질적인 연대’를 곧바로 이끌어 낼 수는 없다. 따라서 ‘상호 간의 신뢰가 없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중을 배제한 채 운동 상층 차원이나 또는 지식인 운동 사이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마치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할 수도 있다.
하나의 원인은 ‘녹이나 보라 또는 보라나 녹’이 ‘적’에 대해 애매한 입장과 태도를 취하고 있는 데 있다. 극단적으로 ‘적’을 ‘적대시’하거나 ‘적’을 ‘해체’하고자 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좀 나은 경우가 ‘적’을 ‘계급’으로 보지 않고 단지 ‘수’로 대하는 정도다. ‘중심성’ 문제만 하더라도 ‘피해의식’ 차원에서 접근하거나 ‘경험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뒤 질문에서 나오지만 이것이 만약 ‘탈노동사회’에 대한 전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연대는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적’이 아직 ‘보라나 녹’이 제기하는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대하지 못하고 있으며 더구나 실천적으로 의미 있는 시도를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틀에서 계급사회 철폐, 즉 자본주의 철폐를 공동의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 이 전제 위에서 ‘적녹보’ 연대가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모두가 받아들여야 한다. ‘적’은 ‘개량주의/의회주의’ 정당(진보정당)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현실화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새로운 정치세력화, 즉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운동을 더 과감하게 더 대중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은 ‘정치적 결사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공동체, 즉 코뮨의 담지체가 되어야 한다.
자본과 권력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부르주아 사회에서 주어진 틀(프레임) 내부에서의 전선형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프레임 자체를 거부하는 직접행동을 통해서도 표출해야 한다. 특히 후자의 시도가 이루어져야 ‘적녹보’ 연대를 위한 구체적 계기와 실질적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녹과 보’는 ‘개량주의/의회주의’ 정당(진보정당)에 대한 분명한 입장과 태도를 먼저 밝혀야 한다. 그들 운동 또는 세력과 과감하게 결별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비로소 ‘내부 쟁점화’ 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안별 연대나 공조를 넘는 전략적 제휴를 이끌어 내기 어렵다. 당 운동에 대한 비판이나 부정이 당파성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수용하기 어렵다. 종파성이나 패권성은 단지 당 운동 고유의 현상이 아니다. 중앙집중도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한 요소이다 중앙집중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연방주의다.
박래군(인권운동사랑방)
신뢰는 어떻게 생기는가? 정파적인 사고와 활동이 관성화되어 있다. 누군가 무엇을 제안해도 의도를 의심한다. 정파중심의 사고와 실천이 갖는 한계는 명확하지 않는가. 그동안 좌파운동은 용산범대위 활동을 제외하고는 사안별 연대체에서 주로 소외되어 왔고, 의견그룹으로 남아 있었다. 그럴 때 좌파운동은 운동을 책임지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기보다는 답답한 원칙고수론자들로 비쳐졌고, 그것이 다른 세력들의 외면을 받았다.
적녹보라의 연대를 위해서는 용산범대위의 활동으로부터 교훈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용산범대위는 그동안 운동의 흐름을 주도하던 주류세력들이 중심을 형성하기 보다는 주변적 세력들이 중심을 이루었고, 꾸준히 운동을 전개했다. 용산에서는 좌파노동운동, 빈민진영, 인권운동 등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나키스트들도 현장에 결합했다. 아울러 문화예술인들, 종교인들의 실천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용산투쟁을 만들어갔다.
이때 중요했던 것은 어느 정파의 정파적인 사고와 실천이 아니었다. 이명박 정권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 어느 정파의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았다. 그렇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면서 현장을 지켜냈고, 극심한 탄압을 이겨냈다. 그러자 다시 대중들이 현장으로 오기 시작했고, 그 힘으로 매우 작은 부분이지만 정권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기도 했다. 적녹보라의 연대가 현실에서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용산투쟁이 연구되었으면 싶다(물론 한계도 분명히 지적되어야 한다). 운동에 헌신하고 책임지되, 성과를 독점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신뢰가 싹트고 운동의 지도력이 생긴다.
심광현(문화과학)
2009년 좌파진보진영 내에서 ‘적-녹-보’ 연대(생태주의, 페미니즘, 맑스주의, 급진민주주의 등의 연대)의 시급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바 있다. 이런 흐름은 각 운동들이 이제껏 암묵적으로 가정했던 선형적 인과성의 도식으로는 더 이상 전진하기 어렵다는 깨달음에 이르렀음을 예증한다.
그동안 다양하게 분화된 진보적 이념들 간의 새로운 내재적 연대를 주장하면서도 이들이 두는 방점은 각기 다르다. 방점의 차이는 각 운동들의 “경로의존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분화되었던 경로들의 차이만큼 연결되는 경로들의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연결의 경로와 유형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복잡한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앞서 말했던 학제간→복합→융합→통합으로 나아가는 N자형 경로를 포괄하는 학문간 통섭의 경로를 원용해 보는 것이 유용할 수 있다.
이런 경로를 그대로 ‘적-녹-보 연대’에 적용해 본다면 이미 복합 또는 융합 연구 단계에 이른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제외한다면 대개는 학제간 연구와 같은 위상에서 출발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대의 움직임이 통합의 단계에 이르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진통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은 자본/국가가 주도하는 과학기술 중심의 NBIC/ GNR/유비쿼터스 도시 혁명의 경우 이미 2030-40년경까지 융합연구의 로드맵을 그려놓고 있는 것에 비하면 진보운동의 이념적, 학문적, 실천적 로드맵은 지극히 빈곤한 상태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비대칭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문제야말로 심화되고 있는 미국 헤게모니의 해체 과정이 지난 세기의 영국 헤게모니 해체 과정을 반복할 것인지 아니면 전례가 없는 대안 세계화로 나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관건이 될 것이다.
이진경(수유공간N)
나는 한국에서 적녹보라의 연대가 어떤 식으로 시도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적색깃발이 점점 빛이 바래고 영향력도 감소하고 있음이 분명한 만큼이나 녹색 깃발이 최근 10여년간 매우 선명하게 되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나아가 환경운동 단체들의 활동보다도 생태문제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은 더욱 높고 강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지금 4대강 개발 문제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열기가 아주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이에 앞서 새만금 저지투쟁이나 천성산 터널 저지 투쟁의 경우도 대중적인 관심사가 광범하게 확대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새만금 투쟁은 그렇게 강하게 솟아올랐던 투쟁의 열기를 법원의 선고에 통째로 맡겨버리고 방기해버리는 어이없는 결과로 귀착되었음에도, 다시 대운하나 4대강 문제가 불거졌을 때 대중의 관심과 열기는 결코 몇몇 운동 단체로 환원되지 않는 강도와 폭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대개의 비율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지구적 스케일의 비평형적 항상성이 깨져가는 사태가 이미 심각하게 진행되어 한국의 경우 기후 자체가 이미 아열대로 변환되고 있는 현실에서, 그리고 수많은 생물들이 인간으로 인해 급속히 죽어가는 ‘6번째의 멸종기’를 사는 지금, 이 문제는 인간의 생존 자체와도 결부된 근본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야말로 정말 혁명이 아니고선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상태인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혁명의 전망은 녹색운동에서도, 적색운동에서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저지’와 ‘보존’이라는, 자본주의와 근대국가와 상태하기엔 너무도 힘겹고 무력한 전술만이 있는 것 같다.
녹색운동이 적색운동에 대해 갖고 있는 거리감은, 사회주의의 역사를 보나 노동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를 보나 아주 쉽게 이해가 된다. 사회주의의 드러난 현실은 자본주의 이상으로 자연을 파괴해 가는 체제가 사회주의였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노동운동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연대의 시도도 하지 않았으며, 맑스주의나 사회주의 이념 또한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깊은 사유나 통찰은커녕 이론적 공감조차 표시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적색운동이 녹색운동에 대해 갖고 있는 거리감은 사실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적색운동은, 아니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노동자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 진보적 의미를 갖는 것이라면 어떤 운동과도 연대해야 함을, 그러한 연대와 동맹의 방향과 전술을 능동적으로 제안할 것을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른 운동에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그들과 연대를 하려는 능동적이고 주동적인 입장을 갖고 있을 때에만 유의미하다. 다른 운동이 다른 운동인 한, 그들의 문제를 찾고 지적하는 것에 머문다면, 그것은 연대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알리바이를 남에게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문해야 하지 않을까?
장훈교(성공회대)
[적-녹-보라] 동맹은 (1) [사회주의-생태주의-여성주의]의 대안적인 접합에 대한 전략과 실천의 문제뿐만 아니라 (2) 다원화되고 분화되어 있는 다양한 지향의 운동들이 결정적으로 파편화되고 분리되는 경향을 넘어서 새로운 ‘종합’을 구성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각 지향과 운동들의 분화가 독립적인 역사적인 경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새로운 종합을 구성하는 문제가 지난 시간과의 전투 및 과거에 구축되는 다양한 선행조건(pre-condition)들에 의해 제약받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충분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맹의 문제설정 자체가 주어진 공동의 세계에 대한 공동실천의 문제를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공동의 사회적 실천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이해관계’로 환원될 수 없는 열정과 감정, 공감, 평화적인 대화구축의 문제들이 발생한다. 운동의 연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감정의 문제들 자체가 기존의 전략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다양한 갈등과 이해관계들의 하위체계로의 종합이라는 발상 자체가 갖는 공리주의적인 전략설정이 갖는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상호신뢰의 부족이 아니라, 이런 문제의 발생 자체가 우리가 종합의 과정을 선험적으로 부여된 종합이 아닌 정치적인 종합의 과정의 중요한 정치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중요하다.
운동의 구성원들과 운동 사이에 발생하는 감정과 열정, 공감과 감수성의 문제들이 그 자체로 정치의 문제라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단지 ‘신뢰’구축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정치적인 종합을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의 재구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래서 우리의 능력을 전유하는 질서로부터 우리들의 능력을 재전유하여 공동의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으로 [적-녹-보라]동맹의 토대를 구축하려는 이론적인 노력들이 전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