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며
진보정당, 계급적단결·동질성확보부터 김명희(1999.7.4)
참된
2010. 1. 13. 18:02
진보정당, 계급적단결·동질성확보부터
뉴스센터 nuovo@hanimail.com / 1999년07월04일 0시58분
김명희/서울지하철노동조합 위원장직무대행 참세상
정치란 글자 그대로 바르게 다스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노동자·민중에게 정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혐오의 대상일 뿐더러 일부 권력지향적 파렴치범들에게 출세의 방편으로서만 유효한 한심한 지경이다. 아니면 고작 지역주의에 편승한 패거리적 활동의 대상으로 규정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는 사회민주화의 질적 성장과 함께 화두로 등장해왔다. 따라서 실천이 요구됐고 나름대로의 시도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대중적 활동으로 우리는 92년 대선시 민중후보 백기완 선대본을 중심으로 현실정치의 선거를 경험했다. 그러나 전두환과 노태우 퇴장이후 민간인 출신간의 경선이라는 변화된 지형에서 노동자·민중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올바로 갖지 못했으며 이 공간에서 민족·민주진영이 안고 있는 정치적·실천적 한계를 분명히 확인하게 됐다. 또한 민주노총이라는 노동자의 희망인 전국조직이 건설된 이후 치뤄진 97년 대선에서조차 국민후보 권영길의 선거운동을 통해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의 한계를 절실하게 체험했다.
92 백선본과 97 국선본을 단순 비교할 순 없다. 그것은 선대본의 성격과 선거운동기조의 차이가 분명했고 추진주체 역시 계급적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충분한 경험의 근거로서 이후를 조망하기엔 부족함이 없지 않지만 지금 우리가 어떠한 원칙을 갖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판단하는데 소중한 근거로 삼을 수 있다.
우선 우리가 주장하는 정치세력화는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를 통일시키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보수정치권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배척당하는 노동자·민중의 정치란 그 목표와 내용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에 대한 공유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속에 오늘에 이르기까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혹독한 착취와 탄압의 대상일 뿐이었다. 우리는 노동자·민중이라는 계급적 위치를 그들로부터 차별적 대우를 통해 체험했고, 문민정부라던 김영삼은 물론이고 국민의 정부라는 김대중정권에 도달해선 보다 극명하게 노동자·민중이란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지배·통제의 대상이란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란 이전과 같이 민주대 반민주의 수준에서 그 대상과 목표를 설정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지난 97대선에서 명백하게 검증됐다. 노동자·민중이 반민중적 지역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목표는 당연히 계급적 단결이어야 하고 그 대상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소외받는 노동자·민중이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모호한 태도로 득표에 연연하는 선거행위는 정치세력화의 실천이 아니고 노동자·민중의 탈을 쓰고 보수정치권에 진출하려는 사기행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계급적 단결을 목표로 하는 정치세력화의 실천은 무엇으로 그 내용을 채워야 하는가?
그것은 자신이 노동자·민중이면서도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인식치 못하고 자신의 미래를 썩어빠진 보수정치권에 기대거나, 진보라는 이름의 선거용 정당을 향해 갖는 환상을 도려내는 것에서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87년 이후 다양한 정치권력을 경험했다. 특히 해방이후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라며 인권대통령의 반열에 오르내리는 김대중정권으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고 있다. 그런데 이것을 극복하자며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 현재 추진되고 있는 진보정당의 수준이라면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선거는 있되 계급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97대선의 한계를 딛고 일어선다고는 하지만 현재까지의 상태로 볼 때 신뢰할만한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그곳이 진정한 정치세력화의 모태가 되려면 현재 노동자·민중에게 절대과제로 남아 있는 고용안정 투쟁에 대한 정치적 지도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그 조직의 당면 사업목표는 노동자·민중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본질적이고 구체적인 과제로부터 출발돼야 한다.
만약 이전부터 회자되었던 2000년 총선을 겨냥해서 노동자, 민중을 단순한 득표 또는 자금확보의 대상이나 선거운동의 동원수단으로 삼는다면 민주노조운동에 또 한번의 치명적 결과만 낳게될 것이다. 그 주체가 역사의 죄인이 됨은 당연하다 하더라도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를 혼란시켜 변혁운동의 역사를 후퇴시킨 계급운동에 대한 그 책임을 무엇으로 담보해낼 수 있는가?
우선 실천으로서 계급성을 토대로 하는 민중연대 강화를 통해 계급적 단결과 동질성을 확보해내야 한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의 사업 역시 노동자 상호간 계급적 자각과 민중연대의 실천을 통한 민중진영의 통일전선 구축에 선봉적 역할을 해내야 한다.
국민의 정부라는 김대중 정권하에서 노동자·민중진영에 대한 탄압은 한편으론 고통이지만 역으로 우리 진영이 계급적 단결을 모아낼 수 있는 지극히 유리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이시기에 우리의 관심과 실천이 선거용 정당으로 한정된다면 또 한번의 쓰라린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만약 민중연대 전선의 강화를 통해서 각 현장으로부터 자신이 노동자·민중임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얻게 된다면 지역에 우선하는 계급적 단결이 가능할 것이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실정치판의 모순해결에 대한 긍정적 전망을 갖게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시기에 권력과 자본의 횡포·탄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더욱 철저해야 한다. 반드시 전제돼야 할 이러한 과제에 충실치 않는다면 진보정당은 진행되더라도 종이호랑이에 불과해 모두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전 민중의 계급운동을 정치적으로 지도할 전국적 조직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그 조직이 고용안정투쟁과 민중연대에 소극적이고, 이 시대 노동자의 고통을 공세적으로 돌파해내겠다는 구체적인 계획과 적극적인 실천을 지도해낼 수 없다면 그 이름과 형식에 관계없이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