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살아가며
운동권 고교생에서 진보정당 주역으로 8.8 재선거에 나가는 최규엽(02.7.23)
참된
2010. 1. 11. 17:14
[진보정치가 만난 사람]운동권 고교생에서 진보정당 주역으로
최규엽 8.8재선거에 나가는 금천지구당 위원장
참세상 클리핑기사 chamnews@jinbo.net / 2002년07월23일 16시20분
기아자동차 출근버스 정류장 인사, 기아자동차서비스노조 임단투 지지방문, 안천중학교 학교폭력사건 관련 서명운동, 지역 노조 정치교육….
지난 2월 지구당 당원총회에서 8.8 재선거 후보로 선출된 최규엽 금천지구당 위원장(50·사진)의 7월 11일 일정이다. 지방선거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금천지구당은 다시 선거국면에 들어갔다. 일찍 출마가 확정되긴 했지만 상황이 그렇게 녹록치만은 않다.
“13일에 후원의 밤을 하는데 재정문제가 심각해요. 이번에 ‘재수’라 친구들도 돈을 잘 안 주더라구.”
지구당이 잡아놓은 선거운동 예산은 기탁금 1천5백만원을 합쳐 모두 3천8백만원. 한 선거구 당 수십억원씩 쓴다는 보수정당의 재·보궐선거 씀씀이에 비하면 1%에도 못 미치는 액수지만 지방선거를 치르면서 얻은 빚까지 짊어지고 있는 지구당으로서는 선거예산 확보가 어려운 상황이다.
재정문제뿐 아니라 선거운동을 뛸 인원이 부족한 것도 큰 문제. 게다가 오는 23일부터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바로 휴가철이 시작된다.
“아예 금천구 주민들이 어느 해수욕장을 많이 가는지 알아내서 거기서 유세해야 할 판이라니깐. 허허.”
지역활동 성과 빛 발해
지난 지방선거 정당투표에서 민주노동당의 금천구 득표율은 6.97%로 서울시 25개 구 가운데 관악구(8.77%), 노원구(7.36%) 다음이다. 금천구에서 득표율이 비교적 높게 나온 것은 지구당이 2000년 총선 이후 꾸준히 벌여온 지역사업 덕분이다.
시흥중앙시장 상인들의 생존권 투쟁 결합, 구청의 ‘걷고 싶은 거리’ 조성사업에 대한 시민감사 청구, 일방적인 도로확장공사 저지투쟁 등 지난 2년 동안 지역에 뿌리를 박기 위한 지구당 차원의 노력이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독산동에는 서울 시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공병대가 위치해 있어 그동안 금천구 주민들은 줄기차게 부대의 이전을 요구해왔다. 금천구에서 출마한 구청장 후보나 국회의원 후보들은 주민들의 표를 얻기 위해 당선만 되면 1년 안에 부대를 이전시키겠다고 공언해왔다.
하지만 최규엽 위원장은 달랐다. 국방부에 직접 찾아가 이전에 필요한 절차와 예상시기를 알아보고 주민들에게 그 구체적인 내용을 소상히 알렸다.
또 임업시험연구원에 의뢰해, 서울시든 금천구든 어느 누구도 보살피지 않는 9백년 된 은행나무 세 그루에 대한 진단을 실시하고 보호를 위한 특별예산을 따내기도 했다.
유신반대 시위 주도
“잠깐 어린 시절 얘기 좀 해주시죠. 전남 부안에서 태어나셨는데….”
“부안서 초등학교 마치고 중학교를 전주로 진학했죠.”
“부안서 초등학교 마치고 중학교를 전주로 진학했죠.”
전주로 온 최규엽은 전주고등학교 3학년을 다니던 1972년 무기정학을 받는다. ‘고전독서회’라는 서클 활동을 하던 그가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헌법을 선포한 데 반발, 시위를 두 차례 주도했기 때문이다.
최규엽은 “4.19혁명을 다시 만들려는 마을 먹고” 1974년 고려대에 진학했다. 당시 신입생으로서 1학년 학생들만 참가하는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는데 같이 활동했던 친구 중에는 설훈(현 민주당 국회의원)이 있었다.
1학년 1학기만 수업을 받았을 뿐 그는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 주된 관심이 있었다. 2학년이 된 1975년에는 신계륜(현 민주당 국회의원) 등과 함께 3월 31일, 4월 7~8일 두 차례 유신헌법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당시 서슬퍼런 유신정권 하에서 보기 드물게 벌어진 이 시위로 고려대에만 휴교령이 내려진 ‘긴급조치 7호’가 선포됐다. 주동자인 최규엽은 제적.
기관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도망을 다니면서도 민청학련과 같은 학생운동 전국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박정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폐결핵을 얻은 그는 1976년 12월 군대에 끌려갔다. 전남 장성에서 32개월 동안 복무하는 동안 리영희, 파울로 프레이리, 모택동 등의 책을 접한 그는 ‘노동자가 일어나야겠구나’라고 깨닫기 시작했다.
학생운동가들의 ‘현장투신’이 본격화되기 훨씬 이전이었던 1979년 스물여서살의 최규엽은 대우중공업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기술을 배워 인천 대우중공업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 조직적인 계획에 따른 투신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뛰어들었던 그는 10.26 사건 이후 다시 학교로 향했다.
1980년 서울의 봄. 고려대 학생들을 이끌던 그는 ‘서울역 회군’을 반대한 대표적인 학생운동 지도부 중 한명이었다. ‘서울역 회군’이 있은 며칠 후 광주에서의 비극이 유인물 한 장에 실려 서울로 전해졌다. 최규엽과 동료들은 “하늘이 노래졌다.”
최규엽은 당장 설훈 등과 함께 등사기를 사서 유인물을 만들어 기습적인 시위를 벌였다. 당시 시위과정에서 연행, 구속된 일로 그는 지난해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았다.
1981년에는 그릇을 만드는 잉꼬법랑에 들어가 6개월만에 노조를 결성해 ‘학출’로서는 최초로 노동조합을 만드는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노조를 결성한 다음날 그는 이른바 ‘전국민주노동자연맹사건’에 연루돼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얻어내지 못한 경찰은 이적표현물 소지로 구속을 시켰다. .
97년 독자후보 결의 이끌어
출소 후 동일제강에 들어가 다시 노조를 결성한 최규엽은 서울남부지역노동자연맹(남노련) 결성하고 수배 중에 노회찬, 주대환 등과 함께 <노동자의 벗>을 발간했다. 또 한겨레사회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이종석(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등과 함께 북한문제를 연구하기도 했다.
최규엽은 그 후 92년 서울노동운동연구소장으로 있다가 93년부터 97년까지 전국연합 정책위원장을 맡게 된다. 전국연합 정책위원장으로서 97년 독자후보 방침을 통과시킨 주역이 바로 그였다.
당시 양재덕 전국연합 정치위원장, 노회찬 진보정치연합 대표, 양경규 민주노총 정치위원장과 함께 돈을 갹출해 마포에 ‘국민승리21 준비위원회’ 사무실을 얻은, 그리하여 1997년 독자후보운동, 아니 향후 민주노동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운동의 주역이었다.
그는 현재 민주노동당의 자주통일위원장이다. 2000년 7월부터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매달 마지막 토요일마다 끈질기게 벌이고 있는 용산미군기지투쟁은 통일운동진영으로부터 민주노동당이 큰 신뢰를 얻는 계기가 됐다.
“일본에서는 미군의 여중생 성추행 사건에 대해 클린턴 대통령이 직접 사과를 했어요. 의정부 여중생 사건에서 주한미군은 진상규명은커녕 사과, 보상도 안 하고 있잖아요. 저는 미군기지, 무기도입, 미군범죄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군사적 주권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고 보고 있어요. 군사적 주권 회복의 핵심고리는 전시작전권 반환입니다.”
"자기 옷은 자기가 빨아야죠"
자주통일위원장으로서 서해교전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남북문제는 북쪽 얘기도 들어봐야 해요. 한쪽 얘기만 듣는 상황에서는 판단유보입니다. 누가 선제공격을 했는지, 꽃게잡이 어선이 얼마나 침범을 했는지 따져봐야 하는데 지금은 의혹이 너무 많아요.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꽃게잡이가 문제의 핵심인 만큼 6.15공동선언 정신에 맞게 남북이 하루빨리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해야합니다.”
1983년 학생운동을 하다 노동운동에 뛰어든 미싱사 이덕자(43)씨와 만나 결혼해 독산동에 신혼살림을 차린 그는 바쁜 선거운동 기간에도 밤에 집에 들어가면 와이셔츠, 속옷, 양말 등 옷가지를 자기 손으로 빤다.
“자기 옷은 자기가 빨아야죠. 그리고 가사노동 분담은 진보주의자라면 상식 아니에요.”
최규엽 위원장은 구로노동운동연구소 활동을 하던 1992년 브라질노동자당(PT)의 활동을 소개하는 책을 번역해 펴냈다. 이 책은 지난 4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책갈피)라는 제목으로 다시 발간됐다.
“브라질노동자당 안에는 마오주의자, 맑스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등 다양한 블록이 있지만 정책대결을 펼치며 단결하고 있어요. 그리고 대단히 전투적이죠. 우리당도 배워야해요. 독자적인 자기사업을 펼치면서 시민사회운동을 지도해야 합니다.”
30년 동안 수십번의 구속과 수배생활을 겪으면서도 신념을 지킨 그가 지방선거의 성과를 대선으로 이어가기 위해 다시 먼길을 나서고 있다.
[ 96호] 7.15 ~ 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