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태일기념사업회에서 펴내는 책 <사람세상> 11-12월호에 노동가수 박준씨를 만나 글로 썼어요. 글은 언제나 그래요. 쓰고 나면, 그게 인터넷이든 종이로든 세상에 나오면,,,아쉬움이 남고...미련도 생기고..부끄럽기도 하고..
그래도....'노동가요' 또는 '노동문화' 이야기니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곳들이 너무 없으니까 모자란 글이지만,,,남겨놓고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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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원이 만난 사람
“노래하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들불장학회 꾸려 가는 노동가수 박준
“처음에는 제 정체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노동 현장에 갑자기 나타난 가수였으니까.”
지금은 투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노동가수 박준. 그가 노동가수로 처음 나선 99년만 해도 현장에서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전까지 박준 씨가 활동한 터전이 ‘투쟁 현장’이 아니라 ‘명동성당’ 앞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80년 초부터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 활동을 하면서 노래를 시작했어요. 미사 때 성가 곡 대신 아침이슬 같은 노래를 부르곤 했죠. 원래는 사제가 되려고 했는데 몸을 다쳐서 사제 공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몸을 다친 건 전두환 방일반대투위 활동을 한참 하던 때였죠. 유인호 교수와 리영희 선생님 초빙 강의가 열리던 날, 한 여학생을 잡아가려는 백골단과 싸우다가 크게 맞아서 공부를 더 하기 어려울 만큼 몸이 상했어요.”
그 뒤로 박준 씨는 명동 성당 앞에서 85년부터 심장병 어린이와 나누기 위한 거리 공연을 시작하게 됩니다. 동기는 단순했습니다.
“후배 병문안을 갔다가 심장병을 앓고 있는 다섯 살 된 아이 ‘주연’이를 만났어요. 갖고 싶은 게 뭐냐니까 ‘항상 밝게 웃는 곰 인형’이라고 하더군요. 주연이한테 곰 인형을 사주려고 공연을 시작했어요. 제가 많이 가난해서 인형 사줄 돈이 없었거든요. 그때부터 심장병 어린이들을 많이 만나게 됐죠.”
심장병 아이 때문에 시작한 명동 거리 공연은 박준 씨한테 또 다른 세상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상계동 철거민들을 비롯한 빈민들, 그리고 명동성당으로 끊임없이 찾아오는 투쟁하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아이들을 위해 불렀던 노래는 어느새 빈민들과 열사들을 위한 노래가 되었고, 어깨너머로 듣던 ‘파업가’ 같은 노동가요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습니다.
“94년에 ‘시작의 노래’라는 빈민 테이프 작업을 했어요. 저는 거기에 낄 사람이 아니었는데 빈민 활동하는 선배들이랑 주민들 등살에 못 이겨 두 곡을 불렀죠. 그 때 ‘박준이 누구야?’하면서 많이들 놀랐어요.”
빈민 테이프 작업을 하면서 현장에서 노래하고 싶다는 열망은 더 커졌지만 ‘명동’을 떠나기가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노동가수로 나서기까지 긴 시간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명동에서 블루라는 까페를 운영했어요. 명동에서 공연하는 사람들한테 전화선이나 전기를 빼주고, 운동하는 사람들도 많이 오가던 그야말로 아지트였죠. 노래는 하고 싶었지만 수많은 사연과 역사가 있는 블루를 닫기가 쉽지 않았어요. 블루를 정리하는 건 20년 세월을 보낸, 제겐 고향 같은 명동을 떠나야 하는 일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노동가요 창작자이자 가수인 김호철 씨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그는 결국 노동가수의 삶을 걷게 됩니다. 99년에 김호철 씨와 함께 작업한 ‘민주노총 공식 음반’을 내면서부터입니다.
“첫 음반을 내고는 일주일 만에 7킬로그램이 빠질 정도로 죽으라고 다녔어요. ‘세상을 멈춰라’, ‘약속은 지킨다’, ‘깃발’ 세 곡을 줄기차게 불렀죠. 노동 현장은 하나도 낯설지 않았어요. 명동성당에서도 비슷한 노래를 많이 들었고 또 부르기도 했으니까요. 솔직히 명동에 있을 때도 집회 현장에서 노래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이제야 하고 싶은 걸 하게 된 거죠.”
질끈 묶은 긴 머리, 두건으로 머리를 감싸거나 헤드셋을 차고 공연을 하는 박준 씨는 겉모습부터 다른 노동가수들과 조금 다른 느낌을 줍니다. 가끔은 투쟁 현장에서 ‘투쟁가’ 아닌 노래로 사람들과 만나는 모습을 봐도 그렇습니다.
“2003년 한국통신 투쟁 때 쪽팔림을 무릅쓰고 헤드셋을 차고 공연을 했어요. 조합원 가까이에서 노래하면 그들과 조금이라도 더 호흡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런 적도 있어요. 언젠가 종로구청 앞에서 공연을 하는데 처음에는 앉아계신 분들이 전부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죠. 그러다가 제가 ‘나그네 설움’을 부르니까 거짓말처럼 앞에서부터 고개가 술술 올라가더니 나중에는 전부 고개를 들고 이 노래를 따라했어요. 기가 막힌 장면이었죠.”
2001년 10월, 박준 씨는 고향 같은 명동에 다시 발걸음을 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힘없는 노동자들의 자녀들이 그를 명동으로 이끌었습니다.
“대우자동차 해고자들이 분유 값이 없어 고생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분들의 아이들을 위해 뭐라도 나누고 싶어서 ‘너희들은 자랑스러운 노동자의 아들딸이다’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혼자 명동성당 앞으로 갔죠. 그 때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월요일마다 해고, 비정규직, 산재, 장애인, 이주 노동자 자녀들과 나누기 위한 명동 거리 공연을 해 왔어요. 옛날에 명동에서 노래하던 때랑은 좀 달라요. 나눔 함에 돈을 넣으려다가 ‘노동’ 이런 글귀를 보고는 그냥 가버리는 사람도 있고, 한 번은 청소하는 아저씨한테 뺨을 맞은 적도 있죠. 그래도 우리가 바라는 ‘노동의 희망’을 사람들과 노래로 나누려는 노력을 계속 하고 있어요.”
처음에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연영석, 서기상, 김대원, 지민주 같은 많은 가수들이 이 공연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명동 거리 공연은 ‘들불장학회’로 거듭나게 됩니다. 몇 년 전부터는 공연하면서 모은 돈으로 열사와 이주, 산재 노동자 자녀들에게 소박한 장학금도 전달하고 있습니다.
“들불장학회는 ‘들불의 노래’에서 비롯된 이름이에요. ‘들불의 노래’는 90년 초에 의문사를 당한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 추모곡이죠. 박창수 열사를 생전에 본 적은 없지만 그분에 대한 애착이 많아서 그랬는지 제가 이 노래를 참 좋아했어요.”
박준 씨를 주축으로 여러 문화노동자들이 함께 꾸려가는 ‘명동 들불장학회’는 최근에 작은 일 하나를 벌렸습니다. 방글라데시 난민촌 아이들한테 학교를 지어주기 위한 후원 콘서트, ‘마드라사로 보내는 들불의 노래’를 꾸린 일입니다. 지난 10월 30, 31일 이틀에 걸쳐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공연입니다.
“지난해 여름 방글라데시에 가서 난민촌 아이들의 삶을 직접 보고 왔어요. 어느 정도 아는 척했던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졌죠. 나를 일깨워 준 방글라데시의 난민촌 아이들과 희망을 나누고 싶어서 이 콘서트를 준비했어요. 10월 공연이 끝은 아니죠. 앞으로 다른 형식과 방법으로 이 공연을 이어갈 거예요.”
남보다 늦게 시작한 노동가수의 길, 하지만 박준 씨는 어느새 선배 노동가수들마저 기대고 싶은, 노동문화계의 맏형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제 마음은 명동에서 처음 노래 할 때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요. 밟히면서도 호소할 수 없는 민중들을 위해 노래하며 살고 싶어요. 주저 없이, 편견 없이, 그리고 끝날 까지······. 그 끝은 나도 몰라요. 노동가수로 노래하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질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제 곧 겨울입니다. 명동 길바닥에서 몇 시간이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기엔 힘든 계절이지요. 하지만 박준 씨는 아무리 추워도 명동 거리 공연을 빼먹는 일은 없습니다. 칼날 같은 추위와 쉬고 싶은 유혹을 밀어낼 수 있는 힘은 바로 ‘희망’입니다.
“저는 ‘희망’이란 단어를 접어본 적이 없어요. 희망도, 기쁨도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제가 노래하기로 선택한 그 세상은 핍박받는 노동자와 민중들의 삶이에요. 그렇기에 부족한 걸음이지만 더욱 더 낮은 곳으로 노래하면서 언제까지나 뚜벅뚜벅 걸어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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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 기대면 형이 부담스러버 한다니깐....혜원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