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두달 전 이랜드 문화제가 한창일 때, 내가 참여했던 이랜드 일반노조 노래패‘비상' 노래연습을 위해 복사했던 악보들. © 조혜원 | |
오랜만에 악보집을 열었다. 한두 달 전 이랜드 문화제가 한창일 때, 내가 참여했던 이랜드 일반노조 노래패 ‘비상' 노래연습을 위해 복사했던 악보들이 가득하다. 노래패 언니들이 가사 외우기 쉽도록 가사만 크게 프린트한 종이도 꽤 여러 장이다. 11월 14일, 아프지만 행복하게 치렀던 이랜드 마지막 문화제가 끝나고 저 악보들을 버릴까, 말까 고민했으나 차마 버리지 못했다. 다시 쓸 일 없어도 저렇게 여러 장씩 복사하고 프린트 했던 시간들, 그 때마다 느꼈던 마음들 악보 형태로라도 남겨두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저 악보집을 다시 펼쳐 볼 일이 생겼다. 이랜드 일반노조 노래패 ‘비상', 아니 이제는 홈플러스 노조 노래패 ‘비상'의 첫 노래연습을 드디어 하게 된 것. 그것도 공식으로 외부 단체한테 공연 섭외를 받아 그 준비를 하기 위해서. 첫 노래연습 날짜는 12월 8일, 바로 어제다.
이 날짜 잡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대부분 언니들은 이 날을 위해 ‘휴무'를 내야만 했다. 가정주부도 많아서 휴무 하나 쓰자면 고민이 많을 텐데 과감히 ‘노래 연습'을 위해 ‘휴무'를 내 주셨다. 얼마나 고맙고 기쁘던지. 헤어진 지 한 달 만에 얼굴 볼 생각에 언니들 만나기 전 악보를 정리하는 내 마음은 설레고 또 설레기만 했다.
파업 중에도 약속 시간 맞춰 다 모인 적 없었듯, 어제도 한 번에 다 모이기는 어려웠다. 특히 휴무를 내지 못한 한 언니, 원래 저녁 6시까지 근무인데 일이 밀려 8시 반이나 되서야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른바 ‘OT(Over Time)' 근무를 한 것. 언니들이 처음에 ‘OT'라고 할 때,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말하나? 잠시 헷갈렸던 내 자신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그렇게 한 명 두 명 오기를 기다리면서 언니들이랑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안 그래도 궁금하기만 했던 500여 일만에 돌아간 일터 이야기들. 언니들이 알아서 풀어 주신다. 일터는 같지만 일하는 분야가 달라서 이렇게 가까이 얼굴 대고 수다 떠는 건 거의 처음이라면서.
▲ 오랜만에 마주한 언니들이 풀어 준 생생한 일터 이야기들과 함께 한 신나는 시간. 수다가 끝이 없다. ©조혜원 | |
“며칠 교육 받고 매장으로 첫 출근하는 전날 밤, 긴장해서 잠이 안 오는 거야. 다음날 6시 반까지 출근인데 밤 꼴딱 샜지. 그런데 일하면서 피곤하진 않더라고.”
“처음 딱 매장에 갔는데 내가 뭘 해야 되나 멍했어. 이제 일한지 보름 정도 됐는데 아직도 좀 서먹하고. 직원들은 대부분 그대로인데 전처럼 막 친하게 안 되네. 적응 시간이 필요한가봐. 그러다가도 매장에서 조합원 얼굴 보면 얼마나 반가운지. 쳐다보면서 손도 막 흔들고, 웃느라고 눈이 반달이 된다니까.^^"
“하긴, 이제 다른 직원들이 전처럼 우리한테 막하지 못하더라. 밥 먹으러 가는 것도, 쉬는 것도 좀 자유롭고."
“그렇게 힘들게 싸우다 들어왔지만 그래도 회사는 회사야. 조금씩 애사심도 생기고, 열심히 하고 싶고. 이제 나도 익숙해져서 일도 잘해."
“어제는 퇴근하고 저녁 8시부터 아침 6시 넘도록 내리 잤어. 덕분에 고등학생 딸을 못 깨워서 얘가 지각했지. 내가 한 번도 안 깨고 죽 자니까 딸애가 놀리길 엄마 죽었나 싶었대.^^"
“팔다리허리 안 쑤신 데가 없어. 집에 가면 무조건 뻗어.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 집안일부터 해. 저녁에 퇴근하면 아무 것도 안하려고. 그래도 빨래랑 설거지랑 쌓인 게 한 가득이야."
한 사람이 말하면 저기서 “나도, 나도!"하며 말을 이어받고. 수다가 끝이 없다. 이러다 노래연습 못하면 어쩌나 잠깐 걱정이 되다가도 이야기가 너무 생생하고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계속 빨려 들어간다. 한 번씩 맞장구도 쳐가면서.
“난 요새 환청이 들려. ‘무조건' 노래 알지? 매출 1억씩 달성할 때마다 ’무조건'이 나와. 12월 4일 그랜드 오픈 하고부터 그러기 시작했어. 어제는 그 노래 아홉 번이나 나오더라고."
"우리들 복귀 한 뒤로 매출이 오르고 그러면 좋은 거겠지?"
“어머, 오랜만이에요, 하면서 우리 기억해 주는 고객들도 있어. 오래 일하면 그런 고객이 생겨. 나한테만 사러 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파업 투쟁 하느라 정말 애썼다고 진심으로 말해주는데 진짜 마음 찡하고 고마워. 눈물도 핑 돌고."
“그래도 진상 고객은 여전해. 특히 젊은 사람들이 더한다니까. 사람들 점심 먹으러 가서 한 번씩 혼자 자리 지킬 때가 있는데, 왜 사람이 이렇게 없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질 않나."
“계산대는 어떻고. 요즘 10만원 넘게 사면 바퀴 달린 장바구니 주잖아. 5만 원 넘으면 그냥 장바구니 주고. 어떤 고객이 17만 원 넘게 샀는데 계산하면서 갑자기 욕심이 생긴 거야. 바구니 두 개 다 받고 싶은 거지. 그래서 계산한 거 다 다시 취소하고 영수증 두 개로 다시 해 주는데 기다리는 고객들한테 얼마나 미안해. 다음 고객한테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 그래도 뭐라고 하진 않더라. 오히려 시간 끈 고객더러 뭐라고 하지."
“상품 다 뜯어놓고 반품하러 오는 고객들은 어떻고. 장바구니 받으려고 일부러 물건 사고 반품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그래도 작정하고 온 사람들 못 돌려보내. 해 줘야지."
“다른 사람 물건 무게 제는 중엔 좀 기다리면 되잖아. 그걸 못 기다리고 막 뭐라 그래. 다른 물건 사고 다시 오세요, 해도 안가고 서서 계속 뭐라는 거야. 휴∼ 속 터져. 그래도 어떻게 고객인데. 기다리느라 애쓰셨다고 웃으면서 귤 하나 까서 건네주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또 괜찮다고 그런다니까."
“나 봐, 벌써 2키로나 빠졌어. 파업할 땐 살 쪄서 걱정이었는데…. 나이 들면 얼굴 살 빠지면 안 되는데."
“새벽에 농산물 까대기(그날 들어온 농산물 담긴 상자를 뜯어 진열대에 차리는 일)하려면 허리가 너무 아파."
서로 일하는 분야가 다르다보니까 쏟아지는 이야기들도 각양각색이다. 노래 연습하러 온 건지, 간만에 수다 떨러 온 건지 갈수록 헷갈린다.
▲ 천막농성장, 홈에버 앞마당에서 자주, 떨리는 맘으로 불렀던 그 노래들을 언제 수다 떨었냐는 듯 정성을 다해 부르신다. © 조혜원 | |
“혜원아 들어 봐. 이런 일 저런 일, 어쩌구 저쩌구. 하하, 호호."
자기들끼리 신이 났다가도 나한테도 알려주고픈지 한 번씩 내 이름도 들먹여 가며 끝없이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어느덧 시간은 저녁 7시가 넘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언니들, 이제 노래연습 해요. 딱 한 시간 만요. 전에 다 불렀던 노래니까요."하고 그 신나는 시간을 자르고야 말았다.
한 달 만에 하는 노래연습. 연습할 시간이 하루뿐인지라 모두가 아는, 전에 이랜드 문화제에서 불렀던 노래들로 준비했다. 전처럼 노래연습 하는 걸 좋아하실까, 이제 이런 거 재미없어 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도 했는데, 아니었다. 천막에서, 홈에버 앞마당에서 자주, 하지만 떨리는 맘으로 불렀던 그 노래들을 다들 즐겁게, 언제 수다 떨었냐는 듯 정성을 다해 부르신다.
언니들,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여전히 노래하는 거 즐거워하는 구나. 잊어버리진 않았을까 걱정했던 노랫말들도 대부분 다 기억하고 계시는 구나. 실내라 그런지 입을 모아 부르는 노래 소리는 왜 그렇게 곱고 힘차게 들리던지.
“와, 언니들 노래 너무 잘해요. 한 달 만에 부르는데 어쩜 그렇게 잘해요. 전보다 목소리도 더 좋아요."
그렇게 감탄을 하니까, “혜원이 얜 늘 잘한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하고 웃어넘긴다.
“아녜요. 언니들도 잘 들어 봐요. 우리 목소리 진짜 듣기 좋아요."
“그래? 하긴 실내라 그런가? 잘 들리는 거 같긴 해. 우리가 전엔 바깥에서 부르니까 아마 목소리가 흩어졌나 봐."
“날마다 고객 상대하면서 말을 많이 하니까 목이 트인 것도 같아. 전에 파업 투쟁할 땐 집에 가도 목 안 아팠거든. 그런데 지금은 날마다 목이 아파."
전에 연습할 땐, 한 번씩 힘주려고 노래 잘한다는 말 일부러 자주 하기도 했지만 어제는 정말 진심이었다. 노래 소리가 정말 좋았다. 부르는 모습들도 정말 예뻤고.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주는‘제22회 인권상' 수상자로 ‘이랜드 일반노동조합'이 선정됐다. 상을 받고 노래모임에 찾아 온 이랜드 일반노동조합 전 위원장, 부위원장님. © 조혜원 | |
어제 보고 싶던 분들이 노래연습 장소, 마포에 있는 ‘민중의 집'으로 찾아오셨다. 바로 이랜드 일반노동조합 전 위원장, 부위원장님이다. 이분들께 참 기쁜 소식을 들었으니, 바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제22회 인권상' 수상자로 ‘이랜드 일반노동조합'을 선정했다는 사실. 그 상을 받으려고 만난 두 분, 노래모임 있다는 소식을 듣고 행사 끝난 뒤 이렇게 발걸음을 해 주셨다. 상금은 모두 다른 투쟁 현장에 지원하기로 했다는 흐뭇한 이야기도 들려 주셨고.
이렇게 얼굴 본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었는데 세상에, 노래 연습 마지막을 이분들과도 함께 나누었다. 이경옥 전 부위원장님하고야 자주 불렀지만 김경욱 전 위원장님하고 이렇게 마주 앉아 노래해 본 건 처음이었다. 처음엔 수줍은 듯 주저주저하던 전 위원장님, 어느새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같이 부르신다. 노래 부르는 얼굴도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고 부드럽다. 약간 웃음도 지어가면서. 그런 편안한 얼굴 보기 정말 어려웠는데. 비록 노래 공연을 같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짧게 몇 곡 같이 불러 본 시간, 잊지 못할 것 같다. 하긴, 잊어도 큰 문제는 없다. 다음에 또 같이 부르면 될 테니까. ^^
오랜만에 노래연습도 하고, 반가운 얼굴도 만나고. 도저히 그냥 집에 돌아가기가 싫었다. 다음날 새벽에 출근해야 할 언니들이 있음에도, “제가 쏠게요. 우리 딱 한 잔만 하고 가요∼."하고 사람들을 부추겼다. 망설이던 언니들이 하나 둘 “그래 딱 한잔만 하자."며 내 요청에 흔쾌히 응답해 주신다. 그렇게 밤 열시 넘어 우리들은 빈대떡 집에 들어가 소주랑 모듬전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출근한 뒤로 이 시간에 술 먹어본 적, 아니 술 자체를 처음 먹어본다는 이 언니들. 발개진 얼굴로 노래연습 때문에 못 다한 이야기들 나누느라 정신없다. 그래도 걱정돼서 “언니, 내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괜찮으세요?"하고 조심스레 여쭤보면, “괜찮아."하고 웃으며 대답해 주는 언니들. 전 같으면 더 같이 있자고 붙잡았겠지만 11시 좀 넘는 시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만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나눈 소주잔은 너무 정겨웠다. 소주잔의 힘었을까? 헤어지기 전 우리들은 새해부터 한 달에 적어도 한 번은 노래모임을 하자고 마음을 모을 수 있었다. 이제 새로운 노래 좀 배워보자는 다짐까지도.
▲ 행복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 조혜원 | |
김경욱 전 위원장님이 인권상과 함께 받은 저 꽃다발을 나한테 선물로 주셨다. 꽃다발 집에 가져가기 불편해서 주시는 거겠지, 생각되면서도 왜 그렇게 흐뭇하던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 꽃다발을 안방 벽에 걸어놓았다. 저 꽃다발을 선물해 준 김경욱 전 위원장님, 이경옥 전 부위원장님, 그리고 함께 노래를 나눈 홈플러스 조합원 언니들. 평소에 ‘사람’보단 ‘꽃’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온 나지만, 어제 만큼은 그들 모두 꽃보다 아름답게만 보였다.
행복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이렇게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 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이. 오죽 행복하면 이런 생각까지 다 들까. 이랜드한테 고맙다는. 이랜드가 아니었으면, 그들이 그처럼 극악무도하게 노동자들을 탄압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과 내가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